린다 시리즈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잘못 산 것은 아니다.
새해 저녁 남편이 이혼하자고 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도 생각나지 않으니 그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남편의 말에 반대 의견을 말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고 자신은 너무 참고 살아왔다고 한다.
어안이 벙벙하다는 말을 체험했다. “나도 참고 살았지 어떻게 자신만 참고 살았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차분히 말이 나왔다. 남편은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산다고 했고 나도 그러자고 했다. 조잘거리던 나의 입술이 너무 무거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방으로 들어왔다. 1분도 아니고 10초간의 대화였다.
반듯이 누웠다. 한동안 천장을 보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살았나, 어디가 문제였지,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담담했던 내 마음이 아프기 시작했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울다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 직감적으로 아침은 아니었다. 살찐 몸처럼 부어오른 눈이 비둔하다. 정적 속에서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를 써서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니 몸은 모래주머니가 달린 듯 무겁다.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썼다. 참고 살았던 나의 이야기를 더듬으며 쓰는 중간중간 눈물이 흘렀다. 쓸려고 드니 별 별것이 다 생각났다. 남편은 결혼 후 시집 문제에서는 늘 나에게 참으라고만 했다. 연애 때와 다르게 결혼하고 보니 우리는 좋아하는 음식도 달랐다. 덜렁거리는 나와 꼼꼼한 성격의 남편은 잔소리꾼으로 변했다. 결혼생활 3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는가? 결혼은 사소한 것들로 싸우고 참아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미국에 있는 딸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나의 핸드폰은 딸이 보내는 ‘카톡’ 소리로 방을 가득 메웠다. 나는 딸과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혼한다고 말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아들이 소식을 듣고 집에 왔다.
말을 할 수 없는 나는 편지를 보여주었다. 딸과 아들은 “엄마, 너무 힘들었겠다.”라는 말을 했다. 그 순간 자욱한 물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안개가 걷히고 커다란 잔잔한 호수가 보이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스스로 놀랐다. 거창한 말도 아닌 진심 어린 말로 나를 알아준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남편은 읽었는데 아무 말이 없다. 딸과 아들은 이혼을 말 한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지나온 삶이 허무하며 미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며 자신은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았다.”라고 한다. 맞다. 가족을 위해 성실히 살아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허무하다니. 자신이 쌓아온 일들과 이것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미래를 점 칠 수 있을 텐데. 남편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들도 밥벌이를 잘하고 남편도 늦은 나이까지 일을 할 수 있고 아무리 찾아봐도 커다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잘못 살았다는 말만 거듭했다.
결론은 딸과 아들이 “아빠가 갱년기”같다고 말했다. “갱년기”라고? 남편의 나이 오십 대 후반이다. 생각해보니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의 남편이 한참 전부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가끔씩 삶이 재미없다고 말했었다. 그럴 때마다 “사는 것이 다 그렇지 뭐, 나라고 특별히 재미있겠어.”라며 퉁명스러운 말로 남편의 말을 막았다.
나는 남편의 말과 행동에서 우울과 불안, 분노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남편의 지나간 삶은 먹고살기 위한 시간이었고 젊은 시절 가졌던 꿈과 이상은 가족을 위해 접어두었다. 마치 갱년기가 여성에게만 찾아오는 병처럼 좋은 약이나 식품은 나이 든 여성의 것들로 넘쳐났다. 남성의 갱년기는 생각도 못했다. 신호를 보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나의 둔감한 성격을 탓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중년의 위기는 익숙하고 낡은 삶의 방식이 지루하니 변화를 주고 싶다는 외침이 아니었을까 한다. 남편이 더 이상 참 고 살지 않겠다는 말은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과 여행을 가기로 했다. 잠시나마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 가서 기분을 바꿔주고 싶었다. 울고불고 당장이라도 이혼할 것 같은 마음은 사라지고 여행을 떠났다.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되듯이 중년의 위기는 본연의 또 다른 나를 찾아야 한다는 내적 요구이다. 중년의 삶에서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지금부터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신호이다. 내적 갈등이 불쑥 분노의 표현으로 이혼이라는 말을 꺼낸 것이다. 남편은 아들중학교 시절 질풍노도의 시기에 사춘기가 아닌 ‘사충기’라고 쓴 종이를 벽에 붙이며 실실 웃었다. 아마도 사사건건 충돌하기 시기라는 뜻이 아닐까. 지금 남편이 그렇다. 바쁜 시간을 지나 여유를 찾게 되었을 때 꿈꿔왔던 이상을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던 일들이 봄날 새싹 올라오듯 올라온 것이 아닐까. 지금은 이룰 수 없다는 현실에서 충돌하고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에 힘들어하는 것이 아닐까. 중년의 위기는 다시 꺼내 든 꿈 꿔왔던 이상과 현실의 충돌 인지도 모르겠다.
위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중년의 위기는 인생의 중년을 평가하고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재도약의 기회다. 심리학자 융은 ‘중년기에 맞은 신경증이 우리를 성숙하게 완성해 줄 신호’라고 했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잘못 산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면 꿈의 근처에 있다. 중년의 위기뿐 아니라 삶의 위기는 늘 있어 스스로 자신을 잘 돌봐야 하지만 주위의 따뜻한 이해와 사랑도 필요하다.
린다가 이혼할 뻔한 중년의 위기는 지나갔다. 남편의 갱년기도 한바탕 이혼 소동으로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