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하게 펼쳐진 터키의 하늘은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4년 전 뜨거운 여름 날, 처음 올려다 본 터키의 하늘은 열망 그 자체였다.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열흘간의 터키 여행은 잊지 못할 많은 추억을 남겼으며, 문득 문득 터키의 열망 같은 하늘이 그리워 기억 저 편 속을 헤집고 들어가 그 날의 추억들을 만끽하곤 한다.
성지순례의 목적으로 출발한 우리 일행은 터키 땅을 떠나기 전 그곳의 위험 요소들에 대해 사전 교육을 철저히 받았고, 이로 인해 기대감과 함께 두려움도 많았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소매치기가 많으니 가방은 크로스로 매고 가슴 앞에 단단히 고정시켜 놓을 것과 혼자 다니는 일은 없도록 하며, 해 떨어지기 전에는 반드시 숙소로 돌아와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실제로 우리에게 주의 사항을 전달해 주시는 분도 백을 날치기 당하면서 부상을 당한 일이 있다고 전해주셨다. 또한, 몇 달 전에 선교사 세 명이 그곳의 과격한 무슬림 행동 대원으로부터 무참히 살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터키 땅에 발을 디뎠을 때 드넓은 하늘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잠시,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틀까지는 대낮에 시내를 걸어 다니는 것도 긴장이 돼서 주변을 두리번대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경계하지 않았다. 검은 머리의 작은 체구를 가진 동양인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것을 그들은 신기하게 바라봤다. 이상스런 신기가 아닌 호기심과 호감이 가득한 신기였다.
한 번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문 밖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무척이나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식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우리 중 몇몇이 그들 곁으로 갔다. 그들은 아이돌 가수를 본 것처럼 탄성을 질렀고, 펄쩍 뛰기까지 하면서 좋아했다.
잠시 길거리에 선 채로 서로 잘 안 되는 영어를 하면서 통성명을 하였고, 낯선 땅에서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몇 몇 터키인들은 시내를 걸어 다니면 윙크를 하면서 부담스런 호의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터키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호의들은 경직되어 있던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었고, 날치기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사회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심지어 선교사님들의 순교는 아주 먼 나라의 듣도 보도 못한 땅에서 일어난 일쯤으로 멀게만 느껴졌다.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현지인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구 카드쿄이로 가기 위해 배를 탄 후 외곽지역으로 한참을 달렸다.
얼마 후 도착한 곳은 화려한 이스탄불의 중심가와는 달리 황량한 변두리 지역이었고, 우리의 80년대의 판자촌과 비슷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정말 반갑게 맞아 주었다. 특이하게도 본처와 후처가 한 집에 같이 살고 있었고, 우리가 안방에서 본처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후처는 들어오지 못하고 방문 앞에 서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아이들은 6명이었는데 두 명은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늦게 들어온다고 했다.
훈남인 첫째와 둘째가 우리가 사가지고 간 닭으로 밖에서 바비큐를 구웠고, 안에서는 셋째 딸이 본처를 도와 상을 차리고 있었다. 음식이 준비되어지고 다함께 즐거운 식사를 하는 중에도 후처는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기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둘째가 치는 4현으로 된 터키 전통 악기 연주에 맞춰 셋째와 넷째 딸들이 민요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고, 우리는 춤을 어설프지만 열심히 따라하며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밤을 행복하게 보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재개발 지역으로 언제 강제 철거될지 모르는 상황이며, 더욱이 월세가 몇 달째 밀려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우리를 기쁘게 맞아주었으며, 낙심과 두려움이 아닌 미래 저 어딘가에 있을 희망을 보며 살고 있었다. 노을 질 무렵에 그들이 불러준 흥겨운 터키 민요는 그들의 희망가였으리라.
다음 날 이스탄불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셀축으로 향했다. 셀축의 마지막 여정은 사도 요한의 묘가 있는 교회였다. 사도 요한의 교회로 가는 차 안에서부터 배가 스스로 아프기 시작하였다. 도착지에 빨리 다다르기만 기다리면서 참고 참았다.
드디어 교회 입구에 도착하였고 내리자마자 화장실을 찾았다. 다행히 근처에 공중 화장실이 있어서 뛰어갔다. 그런데 화장실 문이 큰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난감했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모두 교회로 들어가 버렸고, 나만 홀로 남게 되었다. 배는 점점 더 아파오고 내 인내의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되었을 때, 교회 정문 앞에 있는 상점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한 소년이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그 소년이 나의 구세주가 되어주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Where is toilet?"
"There."
그 소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져 있었던 그 화장실이었다.
“Close! another! another!"
다급해진 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소년은 잠시 난처해하며 주저하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나의 간절함이 소년에게 전달된 것을 기뻐하며 서둘러 뒤따라갔다. 소년은 골목 외진 곳으로 들어갔고, 그 곳은 사람도 없고 아무런 기척도 없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불안이 엄습해왔다. 소년이 안내한 곳은 골목 막다른 곳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자물쇠를 여는 소년의 등을 바라보면서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터키를 떠나기 전 한국에서 교육받았던 터키의 여러 위험요소들과 선교사님들이 처참히 살해된 이야기들이 생각이 나면서 나도 이곳에서 행방도 모른 채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뒤늦게야 내가 일행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나의 행방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고 다닐 것이다. 해가 떨어질 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현지 경찰과 한국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이러한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신문에는 이러한 기사가 실릴 것이리라.
“한국에서 온 성지순례 여행객 1명이 실종 하루 만에 무슬림에게 무참히 살해 된 후 암매장.”
“철컹!”
소년은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 심장은 이미 미친 듯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고, 다리까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그동안 용케 참아왔던 인내의 끈도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소년은 마당 구석에 있는 화장실 문을 열어 주며,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였다. 나는 다음날 신문에 실릴 헤드라인은 일단 접어 두기로 하고 마당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에 앉았다. 볼 일을 해결하고 나오니 소년은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은 자물쇠를 잠그고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와 가게로 들어갔다. 소년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폴에 나오는 마왕의 소굴에서 빠져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 요한 교회로 들어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세례 터와 요한의 묘를 둘러보았다.
교회를 나와 내려가니 그 소녀는 올라올 때처럼 상점에서 물건을 팔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테세큐르 에데림!”
소년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터키라는 나라는 참으로 오묘한 곳이다. 동서양의 문화를 이리도 아름답게 품고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내가 그곳에서 만난 터키인들은 몇 만 년 전 이 땅에서 꽃을 피웠던 역사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닮아있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