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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ul 03. 2018

이렇게 나이 들고 싶진 않았는데





오늘은 아이들이 유독 눈에 띄는 하루였다. 오후에 택배를 보내기 위해 우체국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바로 앞의 창구에 아빠와 한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아빠가 들고 온 물건은 네모난 박스가 아니라 아이 키보다도 두 배는 더 길어 보이는 기다란 기둥 같이 생긴 물건 대여섯 개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여섯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는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내 앞에 줄을 서 있는 여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유혹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어설픈 탭댄스 같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잘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여자는 답례로 아이에게 뭐라고 몇 마디 말을 건네는 듯했다. 앞에 서있던 여자가 차례가 되어 사라지자 이제 그 아이의 앞에 서있는 사람은 내가 되었다. 눈을 마주치고 씩 웃자 배시시 따라 웃으며 부끄러운지 아빠 다리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수줍음도 잠시 그 아이는 또다시 춤을 추었다. 음악도 없었고, 흥얼거림도 없었다. 리듬은 그저 그 아이 머리 속에만 있는 듯했다. 나는 앞의 여자처럼 말을 건네줄 수 없었다. 아마 그 아이가 한국 아이였어도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아이는 춤을 추고 있었고, 말이 필요한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양손으로 박스를 든 상체를 좌우로 기우뚱 거리며 알 수 없는 아이의 장단에 맞추어 답례의 춤을 춰주었다. - 이런 걸 춤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

어른들은 이런 곳에선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점잖은 것인데, 지루할 수 있는 기다림의 시간을 춤을 추면서 달랠 수 있는 아이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갑자기 대기인 수가 20명, 30명을 훌쩍 넘어가는 서울의 은행이 생각났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차례를 기다리는 그 지루한 시간을 어른들도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기다리면 안 되는 걸까? 

언젠가 은행 클럽이 오픈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좋겠다.










 

우체국 일을 마친 뒤에는 가까운 공원의 잔디밭에 누워서 한참 동안 독일어 공부를 했다. 그곳에는 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아장아장 걷다 넘어지는 아이, 좀 큰 여섯일곱 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섞여 강아지와 함께 걷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면서 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아이들보다 큰 개들이 쫓고 쫓기며 뛰어다녔다. 햇살은 따뜻하고, 헤드폰에서는 간질간질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아이들은 해맑게 웃고, 개들이 뛰어노는 그 공간 안에 있으니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느낌이었다. 참 신기하다. 친구랑 있어도 외로울 때가 더 많은데. 역시 외로움은 누군가와 함께 있느냐, 혼자 있느냐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고, 내가 누워있던 자리에 그늘이 져서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엎드려 있으면 잔디밭의 찬 기운이 얇은 돗자리를 뚫고 올라와서 더 춥게 느껴졌다. 오늘 새로 배운 내용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 이대로 집에 돌아가긴 아쉬워 앉은 채로 몇 분을 더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헤드폰에서는 같은 음악이 반복되고 있었다. (Harold O'Neal의 Sam and Sam이라는 곡인데, 잔잔한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 번쯤 들어볼 만한 곡이다.)




그때, 왼쪽 시야에 두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한 여자아이가 손을 내밀며 뭐라고 내게 말을 걸고 있었고, 음악을 듣고 있던 나는 헤드폰을 벗어 목에 걸었다. 절반은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고, 절반은 독일어라서 알아듣지 못했다. 잘 못 들었다고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다시 들어도 알아듣지 못할 나임을 알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분위기와 뉘앙스를 보며 아이가 하려는 말을 추측하고 있었다. 아이는 손에 장난감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장난감이라기보다, 액세서리였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도 어릴 때 많이 만들었던 것이었다. 납작한 플라스틱 고무 같은 줄 여러 개를 교차로 꼬아가면서 볼펜처럼 얇고 긴 기둥 같이 만드는 액세서리인데, 연관된 이름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 이미지를 찾지 못했다. (생각나지 않는 이 답답함...ㅠ)

그 아이의 손에 들린 그것은 검은색과 흰색이었고, 얼핏 보기에 끝에 작은 축구공 같은 게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아이의 양손목에는 뭔지 알 수 없는 게 잔뜩 들어있는 비닐봉지가 4개는 걸려있는 것 같았다.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한 상태에서 책에 집중하다 막 깨어난 어리바리한 상태의 나는 상황을 정말 대충 파악하고는 이 아이가 나에게 이 액세서리를 팔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길에서 찌라시를 나눠준다거나 하는 게 많은 것 처럼 유럽에선 뭔가를 달라거나 사달라는 부탁을 일대일로 다가와서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뭔가를 내밀면 습관적으로 거절을 하게 되버렸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간단히 미소 지으며 '나인 당케(노 땡큐)'로 대답했다. 조금 미안했지만, 그래도 아이는 웃으며 '츄스!(바이!)'를 외치며 친구와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다시 책에 좀 더 집중을 하다가 가방과 돗자리를 챙겨서 집으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렇게 오분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에 스치며 나는 갑자기 아주 못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 아이는 그저 나에게 작은 선물을 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어쩌면 그 축구공이 달린 액세서리는 얼마 전 독일과의 축구 경기에서 이긴 우리나라를 축하해주려는 의미였을까?

나는 왜 그렇게 당연하게도 그 어린아이가 나에게 물건을 팔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왜 한 번 더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았을까. 

그 어린 아이가 내민 손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우체국에서 날보며 수줍어하던 아이처럼, 이 아이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저 나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것을 표현했을 뿐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너무나 냉랭한 못난 어른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들고나니 나조차도 깨닫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지극히 계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해맑은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인데, 그 바람이 무색하게 나는 너무나 속세에 찌든 한 어른의 나를 발견했다.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좀 더 나은 어른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쪽을 바라보다 다른 한쪽에 너무 등을 지고 있었던 건 아닌지. 




오늘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를 통해 또 하나를 배워간다.

오늘까진 못난 어른이지만, 내일은 2% 더 순수해진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쓴이는: 

필명 노이(Noey). 

30대인 게 행복한 멀티포텐셜라이트.

더 늦기 전에 독일 워홀 비자를 써보려고 작년에 독일에 왔다가 얼떨결에 아직 독일 거주 중. 

호기심이 폭발할 때, 감성이 충만할 때 글을 쓰며 생계를 위해 이것저것 도전해 보는 중.



- 함부르크 구매 대행 블로그: https://lifeisllll.blog.me/

- 개인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noey_way/



- 표지 사진 출처: Photo by Rene Berna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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