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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ul 04. 2018

예민한 나에게 예민한 내가

생리 기간도 아닌데 마음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면서 아팠어. 

나의 감정 기복이 월경전증후군 때문일거야! 라고 나를 위안했는데, 역시 아니었나봐.


아침부터 수영장에서 이상한 또라이도 만났고,  

어떤 친구 때문에 서운하기도 했어. 

날이 더워 쳐지는 몸이 저기압으로 이어져 기분까지 다운되고 수업도 집중이 안됐어. 

수업이 끝나고는 한 케냐 친구의 초대로 집에 가서 케이크를 먹었어.  

기분이 좀 안좋았는데 그 친구랑 이야기하면서 많이 좋아졌어. 

특히 공부할 때 ‘어렵다(It’s hard)’라고 생각하지 말고 ‘난 해낼거야(I’ll get it)’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도 너무 도움이 많이 됐고, 어학 비자에 관한 내용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  

분명 나보다 어린 친구인데 훨씬 더 똑부러진 느낌이었어.



그러고 집에 와서는 정신없이 생리컵을 포장해서 우체국에 가느라 바빴어. 우체국이 6시에 문을 닫는 데 그 안에 무조건 골인해야 했거든. 6시 전에 줄만 서면 6시가 넘어도 업무를 처리해줘. 칼같은 독일 문화에 비하면, 꽤 관대한 우체국인 것 같아 우리 동네 우체국은. 대신 번호표가 없고, 작아서 문 밖으로 늘어설 만큼 긴 줄을 감당해야하긴 했지.



일을 끝내고는 오늘 케냐 친구의 말에 자극을 받아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서 바로 공부를 할까 하다가, 오늘 하루 너무 지친 내 마음을 달래려고 공원에서 30분만 누워있다가 오기로 결정했어.  



오늘 하루 그 선택을 하고, 또 정말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누워있어준 내 자신에게 너무 고마웠어.  

보통은 핸드폰을 보거나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거든.

그런데 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혼자 와서 아무 것도 안하고 정말 누워만 있거나, 친구와 와서 수다를 떨더라고.

나처럼 공원까지 나와서 생산적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없었어.

그래서 나도 한 번쯤 정말 다 놓고 공원만 즐겨보고 싶었거든.



처음엔 별 생각없이 뙤약볕에 누워있다가 너무 더워서 나무 아래 그늘로 옮겼어.  

난 누워서 나무를 올려다보는게 좋은가봐.  

나뭇잎과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보고있으니까 외롭지가 않았어.  

같은 잔디밭에 누워있는데 나무 옆이 아닌 거랑 나무 아래에 있는 거랑 너무 느낌이 달랐어.  

사주에서 나는 나무라고 하더라고. 커다란 고목이라고. 

그런데 역마살이 있어 (ㅎㅎ) 

난 떠돌이 나무인가봐. 

그런 나무가 진짜로 있을까?  

어쨌든 나는 나무라 한 군데 정착하기가 오래 걸리나봐.  

장소도, 사람도 말이야.

그리고 나는 나무 같은 사람이라서 나비처럼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는 것 같아.

대신 내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에겐 편안한 그늘을 내어주고 말동무가 되어주지. 

그런데 아직 내 나무는 한 번에 한 명 밖에 받아주지 못해. 

그래서 누군가 이미 앉아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기다려야 해. 

기다리다 지쳐 떠나는 사람도 여럿 있었지만.



오늘 내 마음을 괴롭힌 여러가지 생각들이 있었는데, 나무를 보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내 안의 내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어. 



나는 요즘 누구든 상관없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별것도 아닌 말에 기분이 상하고, 그냥 아예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하는 경향이 강해. 그리고 얼마 전에 그런 글을 봤어. 관계의 가치를 모르는 여자는 만나지 말라고 말이야. 만나선 안되는 여자의 기준이 몇 가지 더 있었는데 난 그 중에 두 개 정도가 해당되는 것 같았어. 그동안 한 사람을 오래 사귀지 못했던 나라서, 나는 내가 관계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비하했어. 그리고 그런 내가 너무 싫어졌어. 요즘 내가 열심히 찾으려고 애썼던 진짜 나의 모습이라는게 사실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못된 나였나 싶어서 말이야. 그런데 나무를 통해서 내 안의 내가 나에게 말해줬어. 



“노이, 넌 니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너의 많은 걸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야. 그런 니가 관계의 가치를 모르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야. 오히려 너에게는 관계 하나하나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또 깊어서 동시에 여러 관계를 맺을 수 없을 뿐이야. 관계의 가치를 모른다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비록 니가 세세한 건 못챙겨준다고 해도 너는 누구보다 많이 니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진심으로 대하잖아.” 




이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났어. 누워있는데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어. 잊고 있던 나를 다시 생각나게 해줘서 고마웠어. 그래, 예전의 나는 그랬는데 지금 나를 사랑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잠깐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뿐이야. 예전의 나는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남을 위하기만 했고, 그래서 이제 나를 사랑하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남을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았어. 어떻게 하면 나를 해치지 않고 상대도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에서, 내 마음을 다해 상대를 사랑할 수 있을지 아직 그 밸런스를 찾지 못했을 뿐이야.  




요즘 주위 사람들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어.  

이건 누구 하나와의 문제가 아니라 좀 다수의 사람과 겪고 있어서 결국은 내 문제 같아 이것도. 

그 중에 한 친구가 평소에 나랑 가장 얘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 또 내가 마음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이라 가장 많이 부딪히는 것일 뿐 그 친구의 잘못은 아니야.  

정말 내가 생각해도 이런 사람은 피곤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말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곤 해. 



내 안의 내가 다시 말했어.


“노이, 너의 예민함은 큰 재능이자 축복이야. 너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 느끼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다 보고 느낄 수가 있어. 거기엔 긍정적인 것도 있고 부정적인 것도 있지. 너무 많은 것들이 한 번에 느껴져. 그 중에 니가 시선과 관심을 두는 것들이 부정적인 것인지 긍정적인 것인지가 중요한 포인트야. 부정적인 느낌들은 마치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야. 아니면 잡아두면 고여서 썩는 물 같은 거지. 그저 흘려보내야 돼. 사람들은 때로 그 말의 무게를 모르고 던져. 그들은 느끼지 못해. 나만 느낄 수 있어. 모르는 것을 탓해선 안돼. 그러니까 지나가는 바람처럼 흘려보내거나, 흘려보내지지 않는다면 (중앙역 오줌 찌린내처럼) 내가 숨을 참고 비켜가야 돼. 부정적으로 느껴진 말이나 생각을 붙들고 있는 건 내가 스스로 찌린내를 맡으려고 냄새나는 공중 화장실 옆에 서있는 거나 다름없어. 그게 누군가의 말이라면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 부정적인 의견을 담아서 답하면 부정적인 에너지를 키울 뿐이니까. 그냥 무시하고 다른 주제로 대화를 바꿔.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자주 반복된다면, 그 사람이 너와 맞지 않는 것 뿐이니 거리를 두어도 좋아. 그게 여러명이 되도 상관없어.  

그리고 긍정적인 말과 에너지는 마치 예쁜 꽃이나 나무의 씨앗 같은 거야. 그것들은 오래 붙잡아두고 물을 주고 웃어주면 무럭무럭 자라나서 예쁘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그래, 부정적인 말들은 긍정적인 말이라는 꽃과 나무가 자라게 해주는 비료 정도에 불과해. 그러니까 냄새나는 화장실 옆에 서있을지, 초록싹이 돋은 정원에 서있을지만 내가 결정하면 되는 거야. 알겠지? 잊지마. 예민한 건 너의 재능이고 너는 그것을 잘 다스리는 법을 아직 익히지 못한 것 뿐이야. 그리고 넌 그걸 다스릴 수 있어.” 




그리고 요즘은 확실히 전보다 우울하거나 저기압이 되어도 회복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어. 

오늘의 하늘, 나무, 잔디밭, 바람, 사람들, 음악, 그리고 이 공간에 나를 데리고 온 나 자신. 

모든 것에 너무너무 감사해. 

고마워. 









글쓴이는: 

필명 노이(Noey). 

30대인 게 행복한 멀티포텐셜라이트.

더 늦기 전에 독일 워홀 비자를 써보려고 작년에 독일에 왔다가 얼떨결에 아직 독일 거주 중. 

호기심이 폭발할 때, 감성이 충만할 때 글을 쓰며 생계를 위해 이것저것 도전해 보는 중.



- 함부르크 구매 대행 블로그: https://lifeisllll.blog.me/

- 개인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noey_way/

- 표지 사진 출처: Photo by The Roaming Platypu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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