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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Aug 02. 2018

인종차별을 대하는 새로운 꿀팁

이제 스마트하게 대처하자


늘 독일 생활의 좋은 이야기만 적은 것 같아 오늘은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하나 남겨볼까 한다.

해외에서 오랜 지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늘 빠지지 않는 주제로 '인종 차별'이 있다. 

찢어진 눈을 만들면서 '칭총챙총', '니하오'를 연발하는 길거리에서 당하는 인종 차별이 제일 흔하면서 제일 기분이 나쁜 경우인데 오늘 그것을 제대로 겪어서 공유해보려고 한다. 


인종 차별은 전 세계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 우리나라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 인종 차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이럴 때 이렇게 대응하자 정도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길거리 인종 차별의 경우는 소소한 장난질 정도에 불과했다. 남자가 내게 다가오거나 혹은 지나가면서 '니하오'를 하는 건 인종 차별 축에 넣지도 않는다. 그 정도는 내가 유럽 사람들의 국적을 모두 구분하지 못하듯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이 날 중국인으로 오해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진짜 악동들을 만났다. 



집에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대형 마트로 가던 길이었다. 날씨도 좋았고, 기분도 정말 좋은 날이었다. 지하철을 타도 됐지만 산책도 할 겸 헤드폰을 쓰고 걸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마트에 도착하기 몇 분 전쯤 어떤 베이커리 앞 벤치에 흑인 여자애들이 대여섯 명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처음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길래 그냥 흥이 넘치는 사람들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앞에 걸어가는 어떤 남자의 뒤통수에다 대고 쓰레기 같은 걸 집어던졌다. 다행히도 가벼운 거라 그 남자에게 맞진 않고 바로 뒤에 떨어지는데 그쳤다. 남자는 자신의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고, 그 모습을 보며 그 무리는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단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저 무리가 정상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그 앞을 지나칠 무렵이었다. 갑자기 내 뒤에서 누군가가 알아듣지 못할 이상한 말들을 랩처럼 쏟아부으며 내 등 뒤로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뒤를 휙 돌아보니 그 무리 중 한 명이 내 뒤에서 또 장난을 친 것 같았다. 아마 내가 헤드폰을 쓰고 있어서 자기 소리가 잘 안 들릴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내가 듣고 있던 건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자연의 소리... 였기 때문에 그 소리는 매우 잘 들리고야 말았다. 그 여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차라리 내가 알아차리지 않았으면 모르겠는데 너무 다 들어버린 나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헤드폰을 벗으며 "너 지금 뭐라고 했어?"라고 물었다. 그러자 낼름 입을 닫는 시늉을 하며 "아무말도 안 했는데?"라고 시치미를 뗐다. 내가 한 번 더 뭐라고 했냐고 묻자 어느 새 덩치가 좀 더 큰 여자애가 다가와서는 무슨 조폭의 어깨라도 되는 것 마냥 위협하듯 날 노려보며 다가왔다. 


막상 자기가 놀린 사람이 정면으로 쳐다보고 되물으면 아무 말도 못하고 뒤로 숨고, 덩치 좀 있는 친구가 대신 무리를 지킨다는 양 어깨를 한껏 끌어올린 이 상황이라니.

'어라... 이거 하이스쿨 미드에서 많이 봤던 것 같은데...?'

막상 얼굴을 보고 얘기하니 아마 스무살 초반쯤 되보이는 어린 친구들 같았다.

'그래, 어린 친구들이겠지.' 생각하며 (외국인의 나이는 정말 가늠하기가 어렵다.)

더 이상 묻지 않고 마음을 다잡으며 가던 길을 가려고 하는데, 그때부터 다같이 합창하듯 내 등 뒤에다 대고 온갖 인종차별 발언을 내뱉기 시작했다.



'칭총챙총', '니하오', 'F*ck you'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기분나쁜 말들을 다 쏟아부으려는 듯 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그것도 다수의 무리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정말로 화가 났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자기가 그런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딘가에 해소하려는 심리라는 것도 알고 있고, 자신이 못배운 티를 내는 거라는 것도 평소에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그걸 알아도 감정이 달아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예전에 친구들이 알려준 혹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봤던, 그럴 때 이런 말을 해줘라, 저런 말을 해줘라 라던 것들이 있었지만  (주로 비슷한 수준의 욕이나 유럽인을 비하하는 말) 애초에 그런 건 머리에 담아두지도 않았다. 평소에 가볍게 듣는 인종차별 발언에는 솔직히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주고 무시하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서로 적당히 기브앤테이크를 한 기분이다. 하지만 이건 좀 달랐다. 나 혼자서 뭐라고 말을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도 내 성이 가시지 않았다. 그들은 더 정신없이 노래하고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 열받네.





포기하고 뒤를 돌아 길을 걸으면서도 분이 가시지 않았던 나는(나는 꽤 다혈질이다.), 불현듯 좋은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꺼내 그들을 찍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스스로 관종인 것 마냥 미친 듯 소리지르고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찍는 게 딱히 이상하지도 않았다. 자기들이 찍히는 걸 알자 한 명이 찍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더니 이내 카메라를 의식하고 고개를 돌리고 몇 명은 더 신나게 춤을 추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꿈쩍하지 않고 보란 듯이 몇 초 더 영상을 찍고 마트를 향해 다시 걸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내가 사야 할 물건은 몇 개 되지 않았고, 난 금방 다시 저 길을 돌아가야 했다. 길을 건너서 갈 수도 있었지만, X은 더러워서 피한다지만, 나는 왠지 피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브런치에서 호주에 사시는 분이 인종 차별 발언을 하는 외국인을 향해서 침착하고 현명하게 대처하신 글을 읽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건 왠만한 깡다구와 영어 실력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분이 어떻게 말했는지도 기억도 안났다. 하지만 대충 자기소개를 하고, 이름을 묻고, 지금 니가 하는 행동이 인종 차별이라는거다 - 라고 말한 것 까진 기억이 났다. 그래, 돌아가는 길에 다시 부딪힌다면, 그 스킬을 나도 써먹어보자 다짐을 하면서 마트를 나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무리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당시에는 영상을 제대로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지금 글을 쓰면서 다시 보니 내가 영상을 찍기 시작하자 절반은 이미 등을 돌리고 도망가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웃겼다. 자신들은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괴롭혀도 괜찮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이 찍히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모순이라니. 




어쨌든 그들의 모습을 비디오로 찍은 건 내 스스로에게 꽤 만족감(?)을 안겨주는 방법이었다.

똑같이 욕하고 소리를 질러봤자 그냥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고, 그런 상대에게 먹히지도 않는다. 왜냐면 그런 사람들은 이미 자기보다 약해보이는 사람, 혼자있는 사람을 골라서 괴롭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얼굴을 스마트폰에 찍히는 건 좀 다른 일이다. 

내 입장에서도 혹시나 나중에 부딪히거나 해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사람들이 도망가버리면 신고할 수도 없으니 증거용으로 남기기도 좋았다. 상대가 왜 자기를 찍냐고 난리를 쳐도 할 말이 있다. 아니면 찍는 척만 해도 상대는 충분히 그것을 의식할 것이다. 



어차피 세상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저런 사람이 완전히 사라질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당하기만 하는 것도 너무나 억울하지 않은가.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은 당신의 친구가 다음부터 저런 일을 당하면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스마트폰을 들이밀어 보시길.


-> 정정합니다. 올린지 좀 지난 글이지만 오늘(11월 4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어서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독일에서는 동양인에게 칭챙총 등 인종 차별 발언을 하면서 괴롭히는 사람은 경찰에 신고할 수 있고, 인정될 경우 인종 차별 발언을 한 사람에게 벌금이 500-1,000유로 정도 부과된다고 합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독일에서 상대의 동의 없이 동영상 촬영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는데 인종 차별 발언을 한 사람을 촬영해서 경찰에 보여주는 것 정도는 불법이 아니라고 하네요.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이 올 때까지 상대를 붙잡고 있어야 하는게 좀 어려울 수 있겠지만, 도망가더라도 윽박지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노이

커버 사진: Photo by Brooke Lar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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