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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Aug 05. 2018

노브라로 나가보았다

아주 깊이 파인 옷을 입고





"이게 쉬웠으면 철인이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 선수들을 독려하기 위한 문구가 여기저기 배치되 있었다.





우연히 날 찾아와




때는 바야흐로 며칠 전 함부르크에서 철인 3종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차량 통행이 통제되고 사람들도 길을 마음대로 건널 수 없고 안내를 받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인지 철인 3종 경기를 응원하러 나온 사람들 몇몇 외에는 길에 사람이 없이 한적했다. 그 많던 차들이 없는 게 가장 크게 한 몫했다. 나처럼 경기가 있는지 모르고 나온 사람들은 차를 돌리거나 자전거를 돌려야 했다. 사실 그때 내가 있던 곳은 사이클 경기를 하는 구간이었기 때문에 철인 3종 경기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지인분께 들으니 함부르크의 기온이 평균 기온보다 많이 높은 바람에 알스터 호수 물에 박테리아가 생겨서 수영이 사이클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철인 3종 경기든, 그냥 사이클 경기든 그저 아직도 모든 게 신기한 외국인인 나는 근처의 식당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조금 맛은 떨어지지만 건강한 바질 파스타를 먹으며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가 앉은자리 바로 옆에는 횡단보도가 있었는데, 어떤 커플이 길을 건너서 내 뒤쪽 방향으로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 구경을 하던 터라 그들을 무심코 바라본 나는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고개를 180도 꺾고, 고개가 더 꺾이지 못할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건 바로 여자분이 입고 있었던 새파란 색상의 아디다스 원피스 때문이었다. 선글라스까지 멋지게 끼고 있어서 사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그녀가 마치 미국 파파라치에 찍힌 패셔니스타가 사진에서 튀어나와 걷고 있는 듯 아름다워 보였다. 함부르크에서 지내면서 가끔 패션 감각이 정말 뛰어난 사람들을 길에서 볼 때가 있는데 그건 한국에 비하면 아주 가뭄에 콩 나듯 드문 일이다. 그런 드문 일이기도 했지만, 내가 고개를 180도나 꺾은 건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정확히 '내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파란 색깔의 아디다스 원피스? 그건 흔한 거 아냐?





하지만 그녀가 입고 있던 건 내가 알던 아디다스의 원피스가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시원 해지는 바다처럼 파란 컬러에, 앞이 시원하게 파진 브이넥, 허벅지의 중간 정도까지 오는 적당한 앞 기장의 길이와 허벅지를 모두 가려주는 뒤태까지. 그리고 그녀는 그 훤히 파진 브이넥 사이로 드러나는 그녀의 거무잡잡한 피부를 그 무엇으로도 가리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큰 포인트였다. 너무 빠르게 지나간 일이기도 했고, 우선 내 시야를 사로잡은 게 전체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녀가 노브라로 그 코디를 소화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나는 당장 아이폰을 열어 저 원피스를 찾기 시작했다. 만약 1분 내로 검색 결과에 나오지 않았다면, 달려가서 직접 물어볼 수도 있을 정도로 흥분돼 있었다.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넌 나의 운명



다행히 바로 판매하는 곳을 찾을 수 있었고, 때마침 운이 좋게도 50% 세일까지 하고 있었다. (운명인가, 이렇게 예쁜 옷이 50% 세일이라니?)

 당장 구매를 하려던 마음을 잠깐 누르고, 우선 운영 중인 구매대행스토어의 인스타 계정에 포스팅을 하고 며칠을 더 고민했다. 여동생이나 친구들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내가 옷을 살 때 의견을 구하는 경우는 사실 드문 편인데, 이번에 망설인 이유는 정말로 그 옷이 많이 파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해외 생활을 하고 시야가 넓어지고 취향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나는 한국인. 아무리 특이한 옷을 좋아하는 나라도 망설여지긴 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의외로(?) 주위의 찬성표를 많이 받았고, 심지어 큰 기대 없이 올린 인스타 포스팅을 통해 구매 문의까지 빗발치기 시작.

더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무조건 산다'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리고 세일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함부르크에 하나뿐인 아디다스 매장을 찾아갔다.

오프라인 매장에는 이미 품절.

온라인에는 블랙 색상 품절. 남은 사이즈는 블루 색상의  XS와 S 사이즈뿐.

불행 중 다행으로 최근에 운동하면서 살이 많이 빠져서 S사이즈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받자마자 입어본 착샷 (feat. 노브라)





택배가 도착한 날에는 어찌나 설레고 기쁘던지 받자마자 걸쳐보고 사진을 찍어 주위에 또 검사(?)를 받았다.

일단 처음 입어본 결과는, 만족 만족 대-만족!

그날 나는 설날 새 옷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흥얼거리며 새 옷을 입고 일을 했다.







외출 전 (신났음)





드디어 노브라로 도전하다


그리고 어제는 드디어 내가 바라던 대로(?) 바로 그 원피스를 입고 노브라 코디에 바깥 외출에 도전했다. 한국에 비하면야 여긴 시원한 정도겠지만 그래도 함부르크도 올해 여름은 평균보다 더워서, 그리고 이 도시는 원래 많이 안 덥다 보니 에어컨 있는 곳이 거의 없는지라, 어딜 가도 더웠고 어제도 아주아주 더운 날 중 하나였다. 그래서 더더욱, 이 브이넥 원피스와 노브라 코디를 도전하겠노라고 큰 마음을 먹고 거울 앞에 섰다. 우선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숙여보며 사전 체크를 했다. 매너를 위해서 니플 패드는 사용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았다.

탄뎀에서 공부할 책과 헬스용품을 넣은 헬스장 가방을 메고 드디어 밖으로 나섰다.

일단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가슴이 정말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엄청 덥긴 했지만 가슴은 뻥 뚫려서 확 트인 느낌. 나이가 들수록 갑갑한 걸 못 견디게 된 나는 사실 평소에도 자주 노브라로 나간다. 물론 그래도 괜찮을 법한 옷들을 - 잘 가려지는 - 입었다. 그것도 굉장히 편했는데, 이렇게 깊이 파인 옷을 입고 노브라로 나가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막힌 게 뻥 뚫린 느낌이랄까?

왜 종종 날이 더우면 남자들이 셔츠 단추를 좀 과하게 푸는 걸 보거나, 아니면 며칠 전 본 철인 3종 경기에서도 달리기를 하던 남자들이 더워서 가슴팍을 오픈-하는 것도 보았었는데, 사실 여자로서는 거의 길에서 할 수 없는 행동이자 코디였기 때문에 그게 이상해 보였고, 그 느낌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푹 패인 옷을 노브라로 입고 나서니 그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진짜 이건 겪어보지 않으면 말로 설명이 잘 안된다.







아, 시원하다!







사람들의 시선


동네에서는 크게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버스를 탈 때부터는 좀 달랐다. 선글라스를 끼고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도도한 듯 앉아있었지만, 확실히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기본적으로 노랑머리를 한 동양인 여자애라서 평소에도 한국에서보다 타인의 시선을 좀 받는 편이긴 한데, 평소에 받던 것의 2배 이상 정도는 느껴졌던 것 같다. 독일 사람들이 봐도 과감한 스타일이긴 하다. 그래도 딱히 기분 나쁜 눈총을 받거나 손가락질을 받진 않았다. 절반은 호기심, 절반은 긍정적인 시선이라고 느껴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저녁을 먹으려고 베트남식 아시아 식당을 갔는데 내가 눈에 띄자마자 캐셔를 보던 여자분이 나를 강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고, 주문을 한 뒤에는 웃으며 나보고 어디서 왔냐고 묻기도 했다. 그 또한 꽤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는 한국에 비하면 다양성을 더 많이 추구하는 곳이라 큰 유행을 타지는 않지만, 스타일면에서 봤을 땐 한국도 여기도 비슷한 것 같다. 캐주얼이 좋은 사람은 캐주얼을, 스포티룩이 좋은 사람은 스포티룩을, 샤랄라 드레스가 좋은 사람은 샤랄라 드레스를 입는다. 결국 자기가 편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추구하는 것이니까.







외국인 친구의 반응


버스를 타고 내린 곳에서 얼마 전부터 함께 탄뎀을 하기로 한 친구를 만났다. 칠레 출신의 여자 친구인데, 독일어를 아주 잘하는 데다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어서 지난주부터 함께 탄뎀을 하기로 했다. 친구는 나와 탄뎀을 하는 1시간 30분의 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내 옷이나 스타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딱딱하게 공부만 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한 두 번 정도 내 옷에 시선을 주는 건 느껴졌지만, 내 옷이 좋다 나쁘다 등의 어떠한 의견도 주지 않았고, 나도 물을까 말까 하다가 일부러 묻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반응을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라고 다 이런 것은 아닌데, 어쨌든 이 친구의 반응도 꽤 새로웠다. (그녀의 속마음은 다음 주에 만나면 물어보기로.)





마치 하이힐을 신는 날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지쳐있었다. 운동을 하고 온 탓도 있지만, 사실 혹시나 옷이 떠서 가슴이 보이지는 않을지 줄곧 신경이 쓰였던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옷을 노브라로 입는 건 마치 하이힐을 신는 것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불편하지만 아름답다.

대중교통보다는 택시나 자동차.

그래서 편하게 입고 싶은 날에는 안에 최소 검정 브라탑이나 브이넥 나시를 받쳐 입고, 시원하고 섹시하게 입고 싶은 날에는 노브라로 다시 입고 나가볼 만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마 우리나라였으면 바로 데일리룩으로 노브라로 나가긴 당연히 엄청 힘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여행을 가거나 물놀이를 가는 특별한 날에도 좋고, 브이넥의 탑브라와 함께 입어주면 조금 과감한 데일리룩, 가슴을 다 가리는 나시와 입는다면 귀여운 코디도 연출할 수 있어서 일석삼조의 느낌.

그래도 역시나 엉뚱하고 가끔은 대범한 나는 한 번쯤 도전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에 가게 되면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ps. 이 경험 이후 내 몸을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사랑하게 된 것 같다. 한 뼘 더.





글, 사진: 노이

커버 사진: Photo by Ryan Moren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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