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이의 유럽일기 May 05. 2018

독일 헬스장의 츤데레 남직원

깜빡하고 멤버십 카드를 두고 온 날



나는 과거 헬스장을 말 그대로 '극혐'하던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엄마와 같이 다니기 시작한 헬스장에서 일주일 만에 허리 부상을 입고 난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답답한 실내에서 땀냄새에 찌들어 쳇바퀴 돌듯 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운동을 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만들어낸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랬던 내가 나이가 들면서 건강의 중요성을 절절히 느끼게 되면서 조금씩 자전거나 산보 등 야외 운동을 시작하다가 결국 밖에서 운동할 엄두가 나지 않던 작년 겨울, 독일의 헬스장에 덜컥 가입을 해버렸다. 

친구가 다닌다기에 동기 부여가 돼서 다른 곳은 알아보지도 않고 정말 '덜컥' 같은 곳에 가입을 했는데 막상 친구는 보지 못하고 나만 홀로 다니고 있다. 



한국에서 헬스장은 많이 다녀보지 않아서 비교하긴 힘들지만,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 내가 등록한 곳이 함부르크에서도 가격이 좀 나가는 헬스장인 것 같다. 2년을 하면 더 싸게 할 수도 있었는데 평생 헬스장을 기피해온 내 성향을 고려하여 나는 1년을 택했다. 지금 생각하면 2년을 택했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하고 있다.

오늘로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한 지 4달 정도가 지났는데, 헬스장에 못 가게 되는 날이면 섭섭할 정도로 헬스장이 좋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나 자신을 보며 스스로도 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언제나 그림같은 알스터 호수




처음에는 뷰가 좋았다. 헬스장은 함부르크의 중심가인 알스터 호수 근처에 위치해 있다. 호수가 바로 근처에 있는 건물 위에 있어서 헬스장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정말 아름답다. 친구의 말만 듣고 이 곳에 덜컥 가입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 경치 이야기를 들었던 게 가장 컸다. 아직도 관광객 티를 못 벗은 건지, 나는 알스터 호수를 아직도 많이 애정 하는 편이다. 예쁜 것도 자꾸 보면 질린다는데, 알스터 호수는 질리지가 않는다. 낮에 운동을 해도, 밤에 운동을 해도 아름다운 알스터 호수가 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창문에 비쳐서 사진은 좀 아쉽지만 실물이 더 멋진 경치





그렇게 다니다 보니 어느샌가 땀 흘려 운동한 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서 느끼는 밤바람이 참 좋아졌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오가는 길이 조금 힘들긴 해도 일주일 중 헬스장에 가지 않는 날보다 가는 날이 더 많아졌다. 헬스장은 입구가 두 군데 있는데 어느 쪽으로 들어가든 꼭 카운터에 가서 직원을 통해 체크인을 해야 한다. 여기는 카드로 락커 문을 터치해서 열고 잠그게 되어있는데 둘째 날에는 그것도 모른 채 바로 락커로 갔다가 카드가 고장 난 줄 알고 깜짝 놀랐었다. (고장내면 10유로 내고 교체해야 함) 어쨌든 그런 방식으로 회원이 드나드는 것을 체크하고 있는 지라 카드를 꼭 가져가야 했다. 



지지난주에는 저조한 컨디션과 힘든 싸움을 벌이다 겨우 이기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헬스장에 왔는데 깜빡하고 지갑을 두고 나온 사실을 깨달았다. 기분이 좋을 때는 아무 데나 말도 잘 걸지만, 기분이 너무너무 바닥을 치고 있어서 헬스장 직원에게 카드를 잊고 왔느니 어쩌니 사정 설명하는 것조차 싫은 날이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집으로 돌아가서 카드를 가지고 나와서 다시 헬스장에 갔다. (내가 생각해도 다시 돌아간 게 신기할 정도로 저기압이었는데... 기다리던 친구가 오라고 오라고 해서 돌아간거긴 하지만) 

친구는 '이름을 말하면 일일용 카드를 줄텐데'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고 집에 다녀온 게 잘했다 싶었다. 왜냐면 카드를 가지고 와서 체크인을 하는 동안에도 그 날의 직원은 헬스장 문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괜찮냐는 주제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독일어로만 했던 좀 깐깐한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독일어로 '나 독일어 못해요'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보통은 영어로 말해준다.) 그 내용도 눈치와 한 두 단어 들리는 걸로 그나마 알아들어서 다행. 아마 그녀의 영어 실력도 내 독일어 실력이랑 비슷한가 보다. 독일에서 독일어 못하는 제가 죄인입죠. 휴.

그래도 신기한 건 친구가 있어서 그랬는지, 운동을 해서 그랬는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운동을 하고 나니 몸도 마음도 훨씬 가벼워졌었다. 




그런데 바보같이 오늘 또 카드를 두고 왔다. 헬스장에 가기 전에 살 것이 있어 마트에 들렸는데, 계산대에서 계산하려고 지갑을 여는 순간 늘 있어야 하는 그곳이 비어있는 걸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엊그제 헬스장에서 너무 늦게 마무리를 하는 바람에 머리도 못 말리고 허겁지겁 나오느라 카드를 아무 데나 쑤셔 넣은 것 같았다. 다른 곳에 두면 금방 잃어버리는 내 성격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자주 쓰는 건 늘 바로바로 같은 자리에 두려고 신경 쓰는 편인데도, 이렇게 정신없는 순간이 한 번 다녀가면 도루묵이다. 




우선 볼일을 다 보고 나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헬스장으로 향했다. 헬스장 카운터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얼굴이 이제 조금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워낙 사람이 자주 바뀌는 곳이라 제발 아는 얼굴이 있기를 바라며 입구를 열었다. 그래도 얼마 되지 않는 동양인이기에 날 기억해주는 직원이면 일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는 빗나갔다. 완전 처음 보는 남자 직원이었다. 게다가 첫인상은 조금 깐깐해 보인다. 심지어 지금 좀 바빠 보인다. 직원은 한 명인데 나 말고도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3명 또는 4명 정도 돼 보였다. 일단 내 뒤에 대기 손님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다른 손님들의 일을 먼저 처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체크인, 또 체크인.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직원은 나도 체크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조심스레 얘길 꺼냈다. 





나: "Hello :) Umm...  I think I forgot to bring my card today." 
                            "안녕하세요 :) 음... 제가 오늘 카드를 깜빡한 것 같아요."

시크한 남직원: "Okay. Do you have an ID?" 
                        "그렇군요. 그럼 신분증 좀 주시겠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 (아니 왜 이걸 예상 못했지...) 친구가 했던 말 때문에 나는 그냥 이름을 물어볼 줄 알았는데 직원은 사진이 박힌 신분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필이면 여권을 또 안 들고 와서 신분증도 없는 상황. 






나: Ummmmm... Can I show them on my phone? as a picture?      
    : "음..... 핸드폰으로 보여드려도 되나요? 사진으로?"

시크한 남직원:  No. I need your ID with your name and photo.
                      : (단호박) 안됩니다. 이름이랑 사진이 들어간 신분증 보여주셔야 돼요.






몇 번 설득을 해보아도 계속 단호하게 신분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잠시 생각하는 척을 했지만 없는 신분증을 어디서 만들어낼 것인가. 그래서 조금 불쌍한 표정 연기를 시작했다. 






나: Hmmm... Sorry. I don't have my ID now.
     음... 죄송해요. 지금 신분증이 없어요.

시크한 남직원: Okay then, please write your name here.
                      : (한층 더 시크해진 표정으로) 그럼 여기 이름 적어주세요.




'휴, 넘어가 주나 보다. 다행이네.'라고 안심하며 노란 포스트잇에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서 냈다.

그는 내 이름을 컴퓨터에 집어넣더니 내 멤버십 카드와 똑같이 생긴 카드 하나를 스캔해서 줬다. 






오늘 받은 일일용 멤버십 카드





시크한 남직원: I need 5 euro for deposit.
                        I'll give it back to you once you return the card.
                      : 보증금으로 5유로 주셔야 해요. 카드 반환하시면 그때 돌려드려요.




오늘은 또 무슨 날인 건가.

하필 늘 챙겨 다니던 캐시가 오늘따라 없었다. 정말 1유로도 없었다. 한 번은 봐줬는데 두 번은 안 봐주려나?

괜히 다시 쭈그러든 나는 다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 독일 은행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나: I don't have any cash today... Can I give my debit card instead?
     저 오늘 현금이 하나도 없어서요... 체크카드라도 대신드리면 안 될까요?






다짜고짜 체크카드를 내민 내가 엉뚱했던 건지(?) 직원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아... 역시 안 되는 건가.' 하고 포기가 빠른 나의 포기가 시작되려던 찰나.






시크한 남직원: It's okay then. Just bring it back before you leave, ok?
                      : 괜찮아요 그럼. 가기 전에 꼭 돌려만 주세요. 알겠죠?






마지막에 "Ok?"를 말할 때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역시 바디랭귀지는 세계 공통 언어인가 보다.

'원래는 안되는데 이번에만 특별히 해드리는 거예요.'의 그 표정. 

완전 안 해줄 것처럼 방어를 치더니 갑자기 방어 해제하고 쑥 하고 카드를 내미는 이 분.

'뭐지, 독일에도 츤데레가 있었나.' 하고 약간 어버버 당황하다가 땡큐를 외치며 덥석 카드를 받아 들었다.

행여나 돌아가는 길에 까먹고 내 카드인 줄 알고 가지고 갈까 봐 주문처럼 '돌려줘야 한다... 돌려줘야한다...'를되뇌이며.





덕분에 기분 좋게 운동을 하고 돌아가는 길, 잊지 않고 카드를 반납하며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덧붙였다.

그 직원도 매너 넘치게 아니라고 했지만 내심 좋은 일 해서(?) 뿌듯해하는 표정이었다. 

'너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말도 해주고 올걸 하는 후회가 지금 든다. 내가 미국인이었으면 바로 그런 리액션이 나왔을 텐데 미안, 난 한국인, 그중에도 소심한 한국인이란다. 




독일인이 차갑다, 특히 북쪽 독일인이 차갑다는 말을 많이 듣고 또 경험도 하지만, (함부르크는 완전 북쪽)

그래도 나의 1년 동안은 여전히 마음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오늘도 한 명 추가요.











- 글쓴이 소개

필명 노이(Noey). 30대인게 행복한 평범한 사람.

운 좋게 모 대기업 공채 해외사업부에 입사하여 인생이 꽃길일 줄 알았으나 흙길만 밟다가 나옴. 잠시 디지털 노마드를 꿈꿨으나 천성이 집순이라서 보류 중. 더 늦기 전에 독일워홀비자를 써보려고 작년에 독일에 왔다가 함부르크와 사랑에 빠져 아직 독일 거주 중. 

호기심이 폭발할 때, 감성이 충만할 때 글을 쓰며 생계를 위해 이것저것 도전해 보는 중.

Naver blog: https://lifeisllll.blog.me/

Instagram: https://www.instagram.com/noey_way/









- 글: 노이

- 본문 사진: 노이

- 커버 사진: Photo by Brad Neathery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에서 바라보는 근로자의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