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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an 17. 2017

우리가 창의적일 수 없는 이유

언디 크리에이티브 캠프를 다녀오다



한낮 최고 온도가 영하 5도였던가, 지난 주말이.

나는 몇 주 전부터 그 주말 동안 크리에이티브 캠프를 가려고 예약해 두었었다. 페북의 지인이 올린 글을 보고 신청한 '언디 크리에이티브 캠프'.





 캠프의 취지에 대한 글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는데, 이 곳에 가면 지금 내 마음 한 구석에 뭔가 빠진듯한 허한 느낌을 채울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직감이 밀려왔다. 캠프의 주최자가 누군지에 대한 설명도, 캠프에 가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로 입금을 했다. 글을 올렸던 페북 지인이 그 기획자 중 한 명이긴 하였으나 나는 그 지인조차 한 번 만난 게 전부 인... 내게는 아직은 낯선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주로 이런 곳에 갈 때 혼자서 간다. 그러므로 온전히 홀로 낯선 환경에 1박 2일 나 자신을 던져놓는 결정이었다. 





캠프는 반신반의하며 기대하고 있었으나 추운 것을 너무나도 싫어하는지라 그 주의 날씨 소식을 들었을 때는 혹시나 취소되지는 않으려나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숙소 예약이 캔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바쁘다는 핑계로 안내 메일을 자세히 읽지 않고 있다가 금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모두가 모여서 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전에 독일어 수업을 듣고 나서 가려고 했던 계획을 급히 변경하고(아쉽게도 캔슬...), 하나하나 가는 방법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는 길의 설명은 중간에서 끊겨있었다. 마지막 정류장에서 숙소까지 이동하는 구간이 없다. 숙소의 위치를 알고 싶으면 오는 길에 미션을 수행하라고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동생이 말한다. 



"런닝맨이야?"



그러게. 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내심 이런 미션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금 설렘. 


미션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했다. 2017년 내 꿈이나 목표를 위해 내게 필요한 가치를 표현하는 단어(예. 초콜릿-당충전)와  2017년에 내가 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가치를 표현하는 단어 (예. 손수건-위로)를 찾아야 했다. 이건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한 번씩 해보길 권한다. 처음에는 숨이 턱 막힌 것처럼 막막했는데, 나중에는 너무 여러 가지가 생각나서 하나를 고르기가 어려웠다. 





한 해를 돌아본 짤막한 한 페이지




 내 경우는 내게 필요한 가치를 표현하는 단어로는 - 반지, 유튜브, 책 시크릿, 별 등이 처음에 나왔다. 믿음을 나타내는 반지, 카메라 울렁증을 극복하고 싶어서 셀프 영상 찍어서 올려볼까 하는 마음에 유튜브, 그동안 좀 소홀히 해왔던 시크릿을 다시 실천해보고 싶어서 책 시크릿, 희망을 놓지 않고 싶어서 별... 모두 나에게 필요한 것들. 하지만 내가 최종적으로 골랐던 건 '도끼'였다. 


 내게 필요한 단어로 '도끼'를 집어 든 이유는, 내 주위의 울타리 혹은 벽 혹은 편견을 깨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 단어들을 생각하기 위해선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작년이 내게 어떤 해였는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게 뭔지, 내가 사람들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한 생각들. 작년 한 해, 이미 나는 내 인생에서 터닝포인트였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격변한 한 해'를 보냈지만, 나는 아직도 더 큰 발걸음을 내딛고 싶다. 지금까지는 내가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들만 해왔다면, 앞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데 '할 수 없다고 생각함'으로 인해서 '안 하고' 있는 일들을 향해서 돌진하고 싶다. 거기서 나를 가로막을 '난 못할 거야'라는 생각을 시원하게 날려버리기 위한 도끼가 지금 내게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주위에 주고 싶은 건, '거울'. 내가 내 삶을 열심히 살아내고, 내 주위 사람들이 그런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삶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현실적인 희망'을 얻었으면 했다. 내가 그렇게 이 인생을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얻은 미션 단어를 가지고 목적지로 향했다. 우리가 모이는 곳은 인천에 있는 믿음의 섬, 신도. 일단 지하철을 타고 공항철도를 타고 운서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낯선 환경이 시작되었다. 새로 생긴 역인지 건물은 깔끔했고, 주위에 큰 건물도 들쑥날쑥 있었지만 어쩐지 휑한 것은 그곳의 분위기와 드물게 주위를 걷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삼목선착장으로 향하는 버스는 2대. 한 대는 40분 뒤에 도착한다고 해서 나머지 한대를 십여분 정도 기다려야 하는 상황. 그마저도 이 곳을 향하는 미션에서 스마트폰이 허용이 되어서 다행이었지,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었다면 낙오자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싶다. 이렇게 인적 드문 거리에서 모델하우스의 전단지를 나눠주시는 분들이 끈질기게(이 단어밖에 쓸 수가 없다) 다가오셨다. 시간을 비웃듯이 느려 보이는 이 거리에 시간에 엉덩이를 걷어 차이듯이 무작정 들이대며 다가오는 그 전단지들이 어울리지 않아 더 불쾌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분들이 무슨 잘못이랴, 이렇게 사람 없는 거리에 저런 홍보 방법을 택한 '원인제공자'를 슬며시 탓해 본다. 







 버스가 너무나도 기다려진 건 비단 추위 때문만이 아니라 저 모델하우스 전단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새 한 명, 두 명 나의 일행이 될 '예정'인 사람들이 정류장에 모여들었고 버스는 우리를 싣고 삼목선착장으로 향했다. 바닷바람은 숨이 멎을 듯 차가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상쾌했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잡념이 도망가고,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싫진 않았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내린 겨울의 신도는 조용하고 깨끗한 아담한 섬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이동수단인 공영버스 정류장에서 모델하우스 전단지보다 더 큰일이 일어났다. 





12시 30분 버스는 점식 식사로 인해 운행하지 않습니다. 
1시 30분 버스를 이용해 주세요.





버스는 매 시각 30분에 있고, 우리가 타려는 버스는 12시 30분이었는데 해당 시간은 기사님들의 점심시간이라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알림 글이 버스 문에 붙어 있었다. 서울에서는, 아니 심지어 내 고향에서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 아프리카쯤 가야 이런 일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나였는데. 서울에서 고작 한두 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이야.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면 걷거나, 기다렸다가 가기도 했겠지만 더 일찍 도착해서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지라 우리는 주최 측에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다. 사실 원래 미션은 가는 길에 나처럼 이 캠프에 가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그 사람들과 내가 쓴 단어들을 공유하고 미션 인증을 하면 정확한 주소를 알 수 있는 컨셉이었으나, 우리는 조금 색다른 사고를 겪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뭉치게 되었다. 그리고 버스가 아닌 다른 차로 숙소까지 이동을 하게 된다.




언니도 참 대단하다. 낯선 사람들이랑 그런 곳도 가고.
나는 그런 거 못해.




출발하기 전, 내 동생이 했던 말.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교적이고 활발한 사람들만 이런 곳에 모인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저런 곳에 가도 어울리지 못할 거야 라고. 확실히 그런 사람들이 많이 온다. 친구와 함께 오기도 한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진 않다. 활발하기만 한 사람들만 모이면 그곳은 확신하건대 난장판이 된다. (하하) 조금 조용한 사람도, 그 중간인 사람도, 또 활발한 사람들도 모여서 늘 적당한 밸런스를 이루게 된다. 나는 이것도 꽤 상대적이라고 본다. 늘 활발한 사람들만 모아놔도 그 안에서 밸런스를 찾아간다. 그때 그 장소에 모이는 사람들의 구성에 따라서 누군가는 평소보다 더 활발해지기도, 누군가는 평소보다 더 차분해지기도 하지 않을까. 나는 대체적으로 잔잔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절대 먼저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도 내 편견이려나) 그래서 차 안에서 누군가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 보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보고, 몇몇은 그에 대답하며 애써 보지만 처음은 늘 그렇듯 정말 정말 어색하다. 학교를 다니고, 회사를 다닐 때도 우리 모두 겪었던, 대부분 비슷비슷한 그런 '처음'을 겪게 된다. 학교와 회사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  







 숙소에 도착하니 정말 정말 더 어색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모두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중 다수는 정말 수면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핑크 핑크 한!

 다들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엄청 편하게들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점심은 다과였고, 배고픈 이들을 달래기 위해 라면이 끓여졌고, 한참 동안 다음 일정을 기다렸지만 왠지 다들 수다에 열중하고 있다. 

 늘 형식을 갖추고 정해진 일정을 따라 내 몸을 맡기는 것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조금 문화 충격. 그리고 아마 2년 전의 나였더라면, '왜 시작을 하지 않는 거지'하고 속으로 불만을 품을 수도 있었을 상황. 그 날은 불만까지는 아니었지만, '언제 시작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들고 들고 든 고개가 지칠 때쯤 주최자로 보이는 사람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확실히 여긴 뭔가 달랐다. 



그리고 그의 첫마디.




 다들 벌써부터 이렇게 자연스럽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네요!





 아기새들의 자연스러운 교감 형성을 지켜보고 있었던 어미새 마냥 해맑은 그 한 마디로 이 캠프의 일정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흔히 겪었던, 어색해서 친한 사람끼리만 뭉쳐서 이야기한다거나 아니면 이야기는 하고 있으나 나 어색해서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언제 이게 끝나나 라는 표정으로 있는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정말 활기차고 따뜻한 이야기의 시장 같은 곳이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너무 좋은데, 반대쪽 귓가로 얼핏 얼핏 들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그런 느낌. 




개인얼굴 보호를 위해서 사진은 최대한 작게 :)




 캠프의 시작이 그러했듯이 캠프에서 경험했던 모든 활동을 하나하나 너무 상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만의 소중한 경험이었고, 무엇을 했는지 보다는 무엇을 느꼈는지가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크리에이티브 캠프'를 통해 '창의성'을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었고, '언디'로 뭉친 사람들이 주는 '무언가'를 겪고 싶어서 온 목적이 컸다. 그래서 '창의성'에 관해서 내가 얻은 느낌은 1+1 같은 느낌으로 기분 좋게 내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리고 기대 이상의 깨달음이었다.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내 머리와 내 마음을 쓰는 힘




 이번 캠프를 통해 내가 얻은 것 첫 번째. 내가 생각하는 '창의력'의 정의이다. 포인트는 '내' 머리와 '내' 마음이다. '창의'의 사전적 정의는 '새로운 의견을 생각하여 냄, 또는 그 의견'이다. 그래서 우리는 창의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꼭 뭔가 굉장히 특별하고 남다르고 세상에 없는 혁신적인 의견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나 또한 그랬다. 첫 번째 활동을 할 때도 그랬다. 첫 번째로 같이 했던 팀원은 나를 포함하여 총 4명. 그중 2명은 우리가 아이디어를 나눌 시간이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들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참 창의적인 친구들이라고. 그런데 1박 2일의 시간을 그 친구들과 함께 지낸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친구들의 아이디어는 모두 자신이 평소에 '좋아하던 것', '하고 싶었던 것', '원했던 것'을 아무 고민 없이 꺼내서 우리의 주제를 향해 내던진 것이었다. 그 친구들과 나의 차이는 '내가 얼마큼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지'와 '그리고 집중하고 있는지'였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개의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내가 평소에 굉장히 공감하고 있는 개념인데, 그 말인즉슨 '나'를 통해서 나오는 의견은 새로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적합하든 적합하지 않든, 실현 가능성이 있든 없든,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는 있다! 그건 매우 소중한 일이다. 하지만 그 비슷한 의견조차도 더 깊이 있게 이야기할수록 분명히 다른 점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집중해야 하는 일은 '내 머리'와 '내 마음'을 스스로가 명확히 알고 키워나감과 동시에 '틀리면 안 돼'라는 두려움을 버리는 것. 거기서 내 머리와 내 마음이 타인과 사회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때에, 공공을 위한 창의력이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다고 생각 중이다)








나는 느린 크리에이티-버



두 번째. 개개인의 성격, 생활 습관이 모두 다른 것처럼 창의적인 일을 처리해가는 과정에서의 타입이나 속도도 제각각이구나라는 생각. 그리고 나는 느린 크리에이티버(Creativer/내 마음대로 만든 단어임)라는 깨달음. 

그것을 미처 알지 못한 채, 나와 맞지 않은 시간과 환경에서 요구받은 창의력이 발현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창의력이 없는 일이라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우리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창의적일 수 없는 환경과 조직 속에서 가장 창의적인 일을 해내길 바라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속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할 만큼 빠른 곳이라서 그 창의력마저도 빠르게 처리해내는 사람이 우세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갇혀있다. 

 내가 생각할 때 사람들은 창의력을 발휘함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타입으로 나누어진다고 본다.

원하는 때에 창의력을 쓸 수 있도록 훈련된 사람과 아직 훈련이 필요한 사람. 창의력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양한 타입으로 나누어진다. 

'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

'즉흥적인 사람'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때 더 잘 발현되는 사람'

등등등






우리가 사회에서 - 학교든, 회사든 - 흔히 겪어온 창의력 테스트는 이런 상황인 경우가 많다.


하얀색 혹은 베이지색 벽으로 둘러싸인 책상만 가득한 공간에 다들 모여 앉아서 이런 말을 듣는다. 



'자, 너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이야. 어서 이 문제를 창의적으로 풀어보렴!' 



제한적인 시간과 내가 선택하지 않은 환경에 놓인다.

우리는 일단 무작정 머리를 싸매고 고뇌하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풀어내었다. 30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아래와 같은 절차를 거치게 된다.


1. 제한 시간 내에 창의적으로 풀어낸 사람은 인정받고 칭찬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책'을 하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2. 창의적인 답에 대해서 '건강한 피드백'이 아닌 '냉정한 평가'를 받는다.


1번의 경우, 창의력이 발달하기는커녕 후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 나는 역시 창의력 하고는 거리가 먼가 봐.'

한 명이 기뻐할 때 나머지 9명은 위와 같은 생각을 할 확률이 높다. 


우리의 목적이 1명의 창의력 100을 키우는 것인지, 10명의 창의력 10을 키우는 것이어야 할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혹은 10명 모두가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자책할 수도 있다. 그 때 우리는 문제점을 개개인에게 둘 뿐, 그 환경을 조성한 사람에게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는 창의성을 그렇게나 강조하면서도, 사람들이 창의력이라는 말과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는 사건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2번의 경우는 주로 회사에서 더 강하게 겪게 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모든 회사는 창의적인 아이디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또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직원들은 창의성과 거리가 멀다. 아니, 우리가 멀어지고 싶어서 멀어진 건 아니라고 거듭 말씀드린다. 특히 내가 겪었던 회사는 신입 사원들에게서 창의력을 쪽쪽 빨아먹는 곳이었는데, 2년 이상 근무한 직원들은 이미 모든 일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새로운 게 나올 게 없다고 단정 짓는 곳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논리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일이었다. 처음 회사를 들어올 때는 창의적이라고 평가받던 직원들이 해가 갈수록 창의적이지 않은 직원으로 취급됨으로 인해서 회사가 직원들의 창의성을 죽이고 있는 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회사는 신입 사원들을 마구잡이로 채용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중간 관리자는 거의 다 나가고 신입과 관리급 직원들이 넘쳐나는 모래시계형 구조로 바뀌어버렸다. 


  아이디어만으로 유지될 수 없는 곳이 특히나 회사이기에, 업무의 흐름과 요령을 가진 실무급 직원들을 잃은 회사는 일을 비효율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고, 잔업과 초과 근무에 시달리며 몇 년을 다니다가 결국 그 직원도 회사를 떠나게 되는 일이 반복된다. 이는 건강한 피드백이 없이 '독한 평가'가 반복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냉정한 평가라는 말도 아깝다) 우리는 사회에서 그냥 평가가 아니라 때로는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수치심까지 동반하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직원을 '아직 덜 당해봐서 그렇다'라고 폄하하기까지 한다. 


 2번에 대한 이야기가 더 길어졌지만, 아무튼 이 곳에서는 제한된 시간은 있었지만 독한 평가를 두려워할 일은 없었다. 제한된 시간을 통해서 '나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필요한 타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메인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돕는 과정에서 내 창의력을 발휘하거나 혹은 캠프에 참여한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냥 그들의 아이디어에 함께 푹 빠져 즐기면서' 그 기분을 느끼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질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놀라고 공감함'으로서 내 창의력에 영감을 받고 자극을 줄 수 있는 경험이 참 소중했다고 생각된다. 





내 마음을 따라 선택한 환경
내 마음을 따라 선택한 사람들 




 마지막으로 창의력을 떠나서 이 캠프를 통해서 가장 보람찼던 것은 내가 선택한 환경에 만족하였고, 내가 선택한 좋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는 것. 

 우리는 선택권 없이 어떤 시대, 어떤 나라, 어떤 도시, 어떤 가정이라는 환경과 문화 속에서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 회사까지 - '선택권'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환경을 선택하는 경험은 거의 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선택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사회 문화에 길들여진 선택이었을 확률이 더 높다. 내 경우는 그랬다. 심지어 사람들마저 그러하다. 우리는 부모나 형제를 선택할 수 없고, 선생님이나 동네 어른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환경에서 만난 사람들 속에 생겨난 자연스러운 관계들은 우리가 내 진심을 따라 선택했다고 보기 어렵다. 심지어 가끔은 친구마저도 내가 원해서 선택하지 않은 사람일 경우가 많다. 그냥 옆에 있어서, 취미가 비슷해서, 같은 팀이어서, 등등. 특히 특정 조직을 통해서 맺어진 친구 관계는 -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회사 등 - 그 조직에서 나오고 나서야 진짜 친구 관계가 분명해진다. 








  시간이 좀 오래 지나고 되돌아보면 (슬프게도) 이 친구와는 그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이지 친구라고 부르기는 어려워지는 순간마저 오기도 한다. 그것을 깨달은 것이 작년. 이제 내가 머물 곳, 내가 내 시간을 할애할 곳을 내 의지로 선택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런 내 행보 중 한 곳이 바로 언디 크리에이티브 캠프였다. 페북 지인이 언디 크리에이티브 캠프에 관련한 글을 올리면서 나를 개인적으로 설득한 것도 아니었고, 당연하게도 친구가 같이 가자고 꼬드긴 것도 아니었으며, 회사나 학교에서 요구하기에 의무적으로 수료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이 좋다고 이야기한 곳도 아니었고, 어마어마하게 유명하니까 나도 한 번 해볼래 라는 유행 따라가기도 아니었다. 심지어 가서 뭘 하는지도 몰랐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지금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을 이 곳에 가면 채우고 올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직감을 따랐고 그런 분위기를 제공하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기대했던 곳, 기대했던 사람들이라는 만족감. 어쩌면 그 이상.



 물론 내 기대에 맞지 않는다고 실망할 수도 있었을 거다.  모든 게 100% 만족스러웠다고도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실제로 이 곳에서는 아니었지만, 다른 곳에서 실망스러운 사람들을 만난 경험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동안은 내 마음이 원하는 판단을 내리는 것을 굉장히 유아적인 일이라고 정의하고 점점 더 머리를 써서 이성적으로 스마트하게 판단하려고 발버둥 쳐왔다. 하지만 그건 스마트폰을 고를 때 하는 일이고 삶에 있어서 진짜 중요한 선택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언디 크리에이티브 캠프'를 선택한 것은 내 가슴이 선택한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스스로 시험해보는 작은 도전(?)이었다.







개연성과 필연성의 간극 자체를,
실패를 통해 줄여가면서 발달되는 거니까




 역시 직감을 따르길 잘했다고 말하자, 캠프에서 알게 된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때때로 직감이 틀릴 때도 있지만 직감이라는 개념 자체가 개연성(어떤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과 필연성(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의 간극 자체를 실패를 통해 줄여가면서 발달되는 거니까 이번 직감은 성공적인 걸로!"



 지금까지는 직감은 마치 하늘에 뜬 태양의 이미지처럼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실패를 통해서 점점 발달시켜 간다는 개념이 색다르다. 직감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편견을 또 하나 깼다. 느려도 좋다. 내 마음이 자라는 이 기분이 마음을 따뜻하게 채운다. 작년에 이렇게 내 마음을 키우는 사람을 만나서 내 인생의 방향키를 트는데 엄청난 도움을 받았는데, 이 캠프에서 그런 사람들을 한 번에 우수수 만난 기분이다. 토요일 밤도, 일요일 밤도 웃으면서 잠이 들었다. 



끝으로, 이 곳에서의 경험이 앞으로 어떻게 나를 또 우리를 성장시켜갈지 너무너무 많이 기대가 된다. 

(아,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니까 조금만 해야지.)



아름다운 신도에서의 언디 크리에이티브 캠프 참여 후기,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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