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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Nov 15. 2018

살면서 지금이 가장 그리울 거야

십년 뒤의 나에게 쓰는 편지

To. 십년 뒤의 나에게,



안녕 십년 뒤의 노이,


넌 아직도 노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니?

오늘은 2018년 11월 18일이야. 아니, 사실은 14일이야. 날짜 감각 없는 건 십년 뒤에도 여전하니?

아참, 그리고 오늘은 수요일이기도 해.



오늘은 아침부터 우체국에 들려서 택배를 보내고, 헬스장에 갔다가 도서관에 왔어.

원래 목표는 유튜브 채널 영상 소개를 하나 편집하는 거였는데, K양이랑 god 이야기를 잔뜩 하다가 오후를 하얗게 불태웠지 뭐야. 10월말 쯤에 god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같이 걸을까'라는 프로그램을 찍었는데 그동안 마음이 심란해서 보지 않다가 뒤늦게 보기 시작했는데, 옛날 생각이 엄청 많이 나더라구. 그런데 잊어버린 기억도 너무 많았어. 친구는 기억하는 내용을 나는 기억해내지 못하는 게 너무 많은 거야. 내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은 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왠지 슬펐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지금을 제외하고 나에게 가장 행복했던 날들을 꼽으라면 아마 나는 god를 열렬히 좋아했던 2000년대를 꼽을 것 같아. 그만큼 행복했던 날들 중에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는 건 너무 슬프지 않아?



그렇게 배터리가 5%가 되어가도록 수다를 떨다가 프랑스에 사는 A언니에게 전해줄 내용이 생각나서 오랜만에 언니에게 연락을 했어. 언니는 요즘 몸이 좋지 않아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아직 프랑스 의료보험증을 기다리고 있대. 엄청 오래 기다리고 있어.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하나봐. 프랑스는 행정 처리가 독일보다 훨씬 느리대. 독일은 양반이라고 하더라구.

그래서 언니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언니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 몸이 아프니까 하고 싶은 걸 마음 껏 못해서 갑갑하긴 한데, 그래도 죽기 전에 언제 이런 시간이 또 올까 싶다고.



나도 그런 얘길 들은게 생각이 났어. "아플 때 가장 많이 성장한다."는 말이.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언니는 비록 몸은 아프지만, 인생에서 둘도 없을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나서 생각을 해보니 나도 그렇더라구.

나도 말이야, 요즘이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그리울 시간인 것 같아.


2018년은 말이야, 지금까지 살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친구도 가장 적고, 가장 돈도 적게 벌고, 가장 이룬 것도 없는 시기야.

그런데 2018년은 말이야, 지금까지 살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나 자신과 대화한 시간이 많았고, 적지만 깊은 울림으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과 더 깊어졌고, 내 인생에서 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고, 가장 많은 꿈을 꾸고 있는 시기이기도 해.



빨강머리 앤의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었대.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가지 골목을 만나게 되는데, 그 골목을 돌면 누구에게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고 말이야.

초록지붕집을 가기 전에 앤은 가장 큰 골목길을 돌았고, 그 골목길을 다 돌았을 때 마주한 초록지붕집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행복한 날들을 살아가게 돼.

나에게 함부르크는 마치 초록지붕집 같은 곳이야. 함부르크에 살기 전과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있어.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순간 가장 크게 좌회전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만 방심하고 핸들에 집중하지 않으면 차가 금방 경로를 이탈하려고 해서 참 힘들다 힘들다 생각했는데, 사실 이 불안과 긴장들 조차도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다는 의미처럼 느껴져서 감사한 거야. 참 신기하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다니.



19살의 내가 빨리 서른이 되고 싶어했던 거 생각나?

난 그때도 20대에도 그게 참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30살이 넘고나니 그 때 예상했던 것 처럼 나의 30대가 이렇게 참 좋은 날들로 가득할 줄이야.

사실은 19살의 나는, 십년 뒤의 나를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십년 뒤의 너보다 어쩌면 무언가를 더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거 생각나? 내가 한 2년 전에 거의 30년인가 40년 뒤의 나에게 편지를 써둔게 있는데 그게 가끔씩 읽어보면 아직 30년이 지나지 않은 지금도 힘이 나고 의미가 있더라.

그래서 내가 살면서 가장 그리울 이 시간을 기억력이 안좋은 너를 위해서 틈틈이 편지로 남겨두려고 해.



훔쳐보라고 쓰는 일기장에 적어두면, 아마 너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보겠지.




2028년 11월 14일의 노이에게,

2018년 11월 14일의 노이가,












- Cover photo image: Photo by fotografierend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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