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이의 유럽일기 Oct 31. 2019

그러게 그동안
그거 안해놓고 뭐했어?

그러게...




나는 대체적으로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기준에서 성공한 삶은 아닐지 몰라도 내 기준에서는 후회 없이 살고 있다는 자존심 같은 자부심 하나만큼은 마음속에 줄곧 남아있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어이없을 정도로 작은 틈새에 무너지고는 한다. 오늘이 그러했다. 상황은 이러하다. 처음엔 정말로 1년만 있다가 더 있고 싶으면 있고 아니면 그냥 돌아가야지, 라는 생각으로 건너온 독일이었는데, 심지어 더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취업을 할 줄 알았는데, 내 깊은 진심은 공부를 더 하기를 원했다. 현실적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과 늦은 나이의 부담감, 외국어 그것도 어렵기로 유명한 독일어로 학사 공부를 다시 한다고? 차라리 회사를 다니는 게 쉽겠다 싶을 만큼 부담이 컸다. 그래서 결정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머리로 했던 예측은 이러다 결국 회사를 다니겠지, 였는데 이미 몇 번의 퇴사를 겪은 전문 퇴사러인 나는 이번엔 끝까지 회사에 다시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 까짓 거, 다시 가보자 대학교. 남들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할 건 뭐야!




하지만 결정이 늦어진 만큼 주어진 시간은 촉박했다. 짧은 시간 동안 평소보다 두 배, 세 배의 시간과 공을 들여 독일어 실력을 끌어올리려고 애를 썼다. 초중급에서 중고급으로 넘어가는 단계는 너무나 편차가 컸다. 갑자기 무리해서 공부를 하니 몸도 여기저기가 아파왔다. 스트레스에 온 몸이 돌아가면서 아팠다. 이게 무슨 고생이야 싶으면서 마음 한 편으로는 씁쓸한 후회가 잊을만하면 피어올랐다. 




'그러게, 지난 2년 동안 독일어 공부 안 해놓고 뭐했냐?'




그때는 독일어를 배우고자 하는 욕망도 크지 않았고,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갈 것이라는 막연한 마음으로 독일에서 그동안 지친 마음과 몸을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그것을 알면서도 막상 지금 독일어를 배우고 싶은 욕망이 커지고 실제로 필요성도 커지는 상황이 되자, 나는 과거의 나를 다시 불러와 앞에 세워 놓고 혼을 낸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혼내니까 깨갱하는 강아지처럼 나 자신이 나 자신 앞에서 쭈그러든다. 





'아니, 뭐,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래도 마음을 부여잡고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를 했다. 일단은 독일어가 너무 급하다 싶어서 한동안은 아무것도 안 들여다보고 독일어만 붙잡고 있었는데, 슬슬 서류 준비를 할 때가 되어서 요즘은 절반은 독일어, 절반은 서류 준비에 시간을 쏟고 있다. 기억도 안나는 고등학교 성적표와 수능 성적표가 필요하다고 했다. 수능 성적표는 그렇다 치고, 고등학교 때 성적표까지? 아이고,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지금 내 걸 받을 수 있나? 해보기도 전에 까마득한 예전 일을 들춰내는 게 상상만 해도 복잡할 것 같아서 학사 과정에 지원하지 않으려던 것이었는데, 결국 내가 공부하고 싶은 건 학사 과정을 들어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알아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모교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다행히 온라인으로 출력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연동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출력을 하려고 하자 난관에 부딪쳤다. 보안이니 뭐니 하면서 깔아야 하는 프로그램들을 도서관 컴퓨터에 깔 수 있는 권한이 내게 없었다. 갑자기 예전에 대학교 성적표를 뽑았던 때가 떠올랐다. 코워킹 스페이스에 일일 권을 결제하고 내 노트북에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한 뒤에 다시 출력을 시도했다. 




조회 가능한 성적표가 없습니다.



'네? 뭐라고요? 저 공인인증서로 로그인까지 했는데, 내 주민 번호 맞는데?' 순간 이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내 이름이었다. 아차, 나 개명했었지. 교육청에 등록된 내 고교 성적표의 이름과 지금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학교에 직접 문의를 하라고 한다. 하, 또 일이 귀찮게 되었다. 그렇다면 수능 성적표도 뽑을 수 없는 걸까? 수능도 예전 이름으로 봤는데. 그래도 수능 성적표를 발급하는 기관은 다른 곳이었기에 혹시나 해서 시도를 해봤다. 어라? 똑같이 공인인증서로 조회하는데 의외로 성적표 조회가 되었다. 아마 수능 성적표는 주민번호만으로 데이터를 조회하는 듯했다. 이걸로라도 한 번 어떻게 안되는지 물어볼까? 하는 마음에 출력을 하려고 하니 이번에는 출력 불가 프린터라고 출력이 되지 않았다.




노트를 꺼냈다. 검은 펜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생각나는 대로 끄적이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없을까, 없을까... 모처럼 하기로 한 것이니 어떻게든 계획한 대로 끌고 가고 싶었다. 잘 달리다가 이렇게 어이없이 장애물을 만나서 잘못하다 시동이 꺼지면 다시 시동을 걸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부탁할만한 사람이 없나. 하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개명한 사람의 수능 성적표는 한국 교육과정 평가원에 직접 방문해야 한다는데 그 기관이 충북 진천에 있다. 땅 한 번 밟아보지도 못한 곳에 지인이 있을 리가 없지. 




'중간중간 한국에 들어갈 때 이런 증명서나 받아두지 뭐했냐! 남들은 잘만 챙기는 것 같더구만.'




회초리를 들고 머리에 뿔이 난 마음속 상사에게 또 혼이 났다. '그때는 구매대행 준비 때문에 바빴잖아. 나도 가서 놀기만 한 건 아니라고!'라고 외쳐보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가 될 뿐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줄이 끊어진 듯이 온갖 생각이 흩어져 나왔다. 




'지금이라도 다시 회사를 알아봐?' 손가락이 링크드인을 찾는다. 아는 회사의 채용 정보를 검색한다. '아니야, 회사는 안 가기로 했잖아.' 무슨 다른 정보라도 없나 독일 대사관 홈페이지를 뒤졌다. '사업 비자? 아니야 프리랜서 비자? 프리랜서로 할 걸 그랬나?' '아니, 그냥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까?' 




머릿속이 온통 복잡해졌다. 이대로 두면 다시 멈추지 않는 고민에 고민만 거듭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 뻔했다. 작은 균열이 갑자기 전체 계획까지 뒤흔들며 머릿속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 독일어 듣기 공부를 위해 들었던 팟캐스트가 떠올랐다. 




마음이 괴로울 땐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세요.



    


바로 지금,
이 순간,
정말 지금, 딱 이 순간,
내 문제는 무엇인가?






질문을 나에게 던지는 순간, 머릿속의 생각들은 멈추고, 뇌세포는 모두 이 질문에 집중한다. 

단 1초의 과거도, 단 1초의 미래도 허용되지 않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내 문제는 무엇인가?








거창하게 한국으로 돌아가니 마니 하던 내 고민의 원인은 우습게도 아주 작은 돌맹이였다.


 





"성적증명서를 출력할 수 없어서 이번 학기에 지원할 수가 없어. 기간을 맞추기 힘들어. 애써 보면 어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급하다고 막 우겨넣으면서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대학 지원은."






그러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다음 학기에 지원하면 되지.'





하지만 그 사이에 비자가 끝나버리는데. 문제 생기면 어떡하지?






'임시 비자를 주겠지, 안 주면 뭐 또 나갔다가 들어오던가. 그건 지금 걱정할 게 아냐.'












질문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리고 먹물처럼 퍼져나가던 검은 생각들도 어느 순간 말끔히 사라졌다. 나를 괴롭혔던 건 지금 이 순간과 전혀 상관없는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그것을 걷어내는 순간, 모든 것이 다시 편안해졌다. 순간에 깨어있을 수 있다는 건 좀 더 빨리 배웠으면 좋았을 인생 스킬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부적인 벽이든, 외부적인 벽이든 무언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장애물에 부딪쳤을 때, 나는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탓하고 혼내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마치 축구 경기를 보면서 입으로는 마치 자기가  프로 선수인 양 열심히 뛰는 선수들을 욕하며 입으로 축구를 하는 사람들처럼, 이미 다 끝난 일의 결과를 보고 나서야 '내 그럴 줄 알았어~' 자기는 그럴 줄 알았다고 훈수를 두는 사람들처럼. 평소에 저렇게 말하진 않아야지, 생각했던 말들을 나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중요한 걸 잊어버리는 게,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하지 못하는 게, 
실수하는 게,
흔들리는 게,
그리고도 다시 일어서서 걷는 게,
그게 당연한 거야.
그게 당연한 거야. 






오늘 잠자기 전에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그리고 이 말도.








그리고 아까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 진심은 아니었어.





매거진의 이전글 내 이름을 기억해줬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