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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Nov 06. 2019

독일어 시험은 토익과 달랐다

기승전토익




말하기 시험 6번 문제입니다.



히죽히죽. 마지막 문제를 알리는 안내자의 멘트와 함께 내 입가에는 스멀스멀 웃음이 새 나왔다. 감시하던 감독관 언니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도 잠시, 되는대로 마지막 문제에 대한 답을 마이크에 쏟아내고 안내자의 신호에 맞춰 녹음 중지 버튼을 눌렀다. 



‘딸깍’





“(작게 속삭이듯이)와, 끝났다!” 




내 나이 33세. 태어나서 처음으로 독일어 공인 시험을 보았다. 결과는 예상할 수 없지만, 시험을 끝내고 나니 마음이 너무너무너무너무 후련했다. 공부한 건 없으면서 마음만 급했던 게으른 학생이었던 나는 시험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책을 펼치고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시험 준비를 시작했던 한 달 전에는 의욕에 넘쳐서 하루에 10시간씩 들여다보다가, 점점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공부 시간을 8시간, 6시간으로 줄이는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마지막 주에는 교재를 들여다보는 게 ‘심리적으로’ 힘들어져서 1시간 조차 공부를 해내지 못했다. 내가 지금까지 해놓은 것, 시험까지 남은 시간, 모의고사의 난이도. 이 3가지를 비교하다 보면 머릿속에는 계속 시험장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버벅거리는 내 모습이 상상이 됐다. 끔찍했다. 평소에 상상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책을 잡으면 아무 대답도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을 미래의 시험장에서의 내 모습이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올 정도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만큼 잘보고 싶었다. 아무리 눈에 독일어를 담을 수 없게 되었더라도 감을 잃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독일어 드라마를 보거나 독일어 노래라도 들었다. 아니, 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더 불안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시험을 보면서는 머리를 죄다 쥐어뜯을 것 같았고 시험이 끝나면 엄청난 좌절감에 시달릴 줄 알았다. 누구보다 내 실력을 가장 잘 알았으니까. 보나 마나 한 결과에 또 혼자 자책하며 움츠러들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덤덤했다. 어느새 겨울이 되어버려 하루 종일 비가 와서 우중충했던 날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시험을 보는 내내 스마트폰도, 어떤 종이도 소지할 수가 없어서, 나중에 블로그에 어떤 팁들을 공유할까 잊지 않고 머릿속에 기억하느라 더 바빴던 것 같다. ‘표현 하나라도 더 생각해야지, 지금 블로그 생각을 할 때야?’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오히려 웃음이 났다. 코 앞에 닥친 스트레스를 외면하기 위한 방법이었는지, 정말 괜찮아서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불안에 떨지 않았다. 











처음 본 독일어 시험장 분위기는 깐깐했다. 시험장에서의 규정을 모두 읽었으며 이에 동의한다는 싸인까지 받아서 복사를 해두는 것을 보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본인 확인을 마치고 입실한 시험장에는 책상과 나, 볼펜 한 자루, 수험증, 신분증이 전부였고, 재킷도 벗게 했다. 펜도 나누어주는 펜을 써야 했다. 가방에서 마실 것이나 먹을 것을 꺼내고 싶을 때는 늘 감독관 감시하에 가방을 열 수 있었다. 수정 테이프도 쓸 수 없었다. 하이라이터로 쓰는 형광펜 정도는 허락이 되었다. 스마트 워치는 물론 일반 손목시계도 찰 수 없었다. 책상 위에는 내 수험번호와 바코드가 새겨진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답안지, 시험지에도 모두 이 스티커가 붙어있어서 일일이 내 이름을 쓸 필요는 없어서 편했다. 시험 응시 인원은 약 12명이었는데 감독관은 총 3명이었다. 처음엔 ‘인력 낭비가 심하군.’이라고 생각했지만, 규정을 생각해보니 이해가 갔다. 응시생들은 시험 전체가 다 끝날 때까지 시험장 앞 복도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는 그 경계에서 한 감독관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 또 다른 감독관은 응시생들이 가방을 열고 싶어 할 때마다 그것을 감시해야 했고,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함께 동행해야 했다. 





시험장에 도착해서 본인 확인, 시험 준비, 그리고 전체 시험을 다 끝내고 핸드폰을 돌려받기까지 약 6시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약 3시간 정도 걸리는 토익 시험의 2배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독일어 시험은 기본적으로 4가지 영역을 모두 한 번에 본다.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이렇게 4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토익처럼 영역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 (그만큼 응시료가 매우 비싸다.) 그래서 쉬는 시간도 2번이나 들어가고 쉬는 시간이 15~20분으로 긴 편이다. 정작 쉬는 시간에 책은 볼 수 없어서 아무 것도 못하긴 하지만. 정말 그냥 쉰다. 차라리 시험을 빨리 보고 싶을 정도. 





영어에서는 토익은 900점이 넘어도 말은 못 하는 영어 고수(?)가 독일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어 공인 시험을 중급 이상 패스했다면 그 사람은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모든 부분에서 그 언어를 정말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검증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내가 응시했던 테스트다프의 경우 전부 객관식 유형인 토익 듣기와 달리 듣기 시험 3가지 유형 중 2가지 유형이 주관식으로 답을 써야 한다. 단순한 받아쓰기 형식은 아니다. 들은 내용을 이해하고, 시험지에 적힌 질문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논리적인 답을 해야 한다. 즉, 정말로 '알아들어야' 쓸 수 있는 답인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토익 시험은 투자 대비 효율이 매우 낮은 시험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토익에 투자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회적 현상을 고려하면 ’사회적 낭비’라고도 볼 수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토익 점수가 높다는 것이 영어를 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는 반대로 나는 업무에 필요한 만큼은 영어로 일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데 토익 점수는 낮아서 인정받지 못해 학업, 업무 경력에 제약이 걸린다던가 하는 상황들 말이다. 기본적으로 외국어 능력 시험이라는 것은 ‘내가 이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토익은 가장 공인된 시험이면서도 그것을 가장 입증하지 ‘못하는’ 시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1차적으로 시험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토익 점수가 잘 나오면, ‘아 내 영어 실력이 늘었구나’라는 커다란 셀프 성취감이 들어야 하는데 그보다는 ‘아, 이제야 나도 겨우 남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섰구나.’라는 마치 당연한 것을 이제서야 해낸, 안도의 한숨 같은 거랄까. 

  한편으로는 그래도 토익이 나았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영어를 못해도 ‘토익 공부’를 해서 노력하면 어느 정도 점수는 받을 수 있고 어딘가에 서류를 들이밀 수 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독일어 시험처럼 말하기, 쓰기까지 필수는 아니니까.





그에 비해 독일어 공인 시험은 준비하는 입장에서 매우 매우 어렵긴 하지만, 시험을 준비하면서 비약적으로 상승한 내 독일어 실력을 생각하면 토익을 공부하던 때보다 훨씬 더 재미가 있고 보람찼다. 보람! 아,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던가. 비록 시험을 준비하는 이유는 토익을 준비하던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나는 시험 결과와 상관없이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이미 스스로 내 독일어 실력이 시험을 준비하기 전보다 훨씬 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달 전 시험 유형을 파악하기 위해 처음 모의고사를 풀었을 때는 문제에 답을 어떻게 할지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실제 시험에서는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서 못 푼 문제는 없었다. (본문과 보기를 다 이해하지 못한 것은 함정) 

시험관에게 무언가 질문을 해야 할 때도 평소와 달랐다. 평소에는 독일 사람에게 말을 걸 때에는 하고 싶은 말을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외우거나, 아니면 머릿속으로 한참을, 정말 한참을 이리저리 작문을 해서 정리를 하고 나서야 입을 뗄 수 있었다면, 그 준비 과정이 현저히 짧아졌다.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기본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달까. 말하기, 쓰기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긴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듣기와 읽기에서 드러났다. 나는 그저 시험장에서 감독관들이 독일어로 시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내가 알아듣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했다. (별거 아닌 거에 감동을 잘하는 타입) 하지만 실제로 독일어가 외계어처럼 들렸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대략적인 맥락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훨씬 좋아졌다. 





물론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독일어 공인 점수를 받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지금 내가 독일어를 공부하는 이 과정이 즐겁다면, 내가 바라는 결과도 짧은 시기에 곧 열매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처음 독일어를 공부하겠다고 주위에 이야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독일어는 어려운 언어다', '평생을 배워도 현지인처럼 못한다', '독일어는 말하는 것도 안 이쁜데 왜 배우냐' 등등. 하지만 내게 독일어는 어렵지만 논리적이라 추리소설을 읽는 것 같이 재밌고, 외국어는 원래 평생 공부하는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고, 독일어로 말하는 거 실제로 들으면 사실 꽤 멋있다. (인터넷에 웃기다고 올라오는 독일어 발음 영상들은 과장되었거나 일부 사람 한정임!)






영어를 공부하는 과정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었다면, 배우는 게 재미있고, 실제로 써먹을 수도 있고,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면 나는 지금쯤 영어를 더 잘하게 되었을까? 













덧. 예전에 개인적인 프로젝트로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한국 사회에서의 영어'를 주제로 대해 수다(?)를 떨고 영상으로 만든 적이 있습니다. 무작정 사회가 원해서 토익을 공부하기 보다는 한번쯤 토익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 싶은 분들, 취직 전 무조건 토익 공부만 하다가 지치신 분들, 정말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에 영어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시간나실 때 한 번 보시면 좋을 것 같아 링크를 공유합니다.








어떻게 살고 계세요? '우리 사회가 토익을 요구하는 진짜 이유'
























글, 영상: 노이

커버 이미지: Photo by Green Chamele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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