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이의 유럽일기 Aug 30. 2019

내 이름을 기억해줬어




'어라? 카드가 어딨지?'




나는 무언가를 자주 깜빡하는 편이다. 특히 가장 자주 깜빡하는 건 헬스장 갈 때의 준비물이다. 헬스장에 간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준비물이 필요하다. 결국 락커를 하나 빌려서 굳이 자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보관을 하고, 수건도 헬스장에서 대여해서 쓸 수 있게 업그레이드를 했다. 이런 일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고, 살면서 뭔가를 깜빡하는 적은 아주 많았다. 그래도 바뀐 게 있다면 예전엔 뭐 하나라도 까먹으면 스스로를 매우 자책했다면, 이제는 그런 스스로를 보며 그냥 웃으며 넘어가게 되었다는 정도랄까. 그래도 한 번씩 어이없이 깜빡할 때가 있는데 그건 바로 내 헬스장 멤버십 카드를 잊어버릴 때다.




내가 다니는 독일의 헬스장에서는 회원이 되면 멤버십 카드를 준다. 이 카드는 체크인 및 락커의 열쇠 역할을 동시에 하기 때문에 꽤 중요한 카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운동을 할 때면 이 멤버십 카드와 아이폰, 그리고 수건을 늘 들고 다니면서 운동을 하는데 한 두 번 하는 일도 아닌데 헬스장 안에서 이동하면서 카드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예를 들면, A-B-C-D 코스로 운동을 했는데 카드를 A에 두고는 D 운동을 시작하기 직전에서야 카드가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C-B-A를 역주행하며 내 카드를 찾는 경우가 왕왕 있다. 며칠 전에도 운동을 하다 말고 카드가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내가 운동했던 기구들을 역주행했는데 그 날은 내 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누군가 이미 주인을 잃고 처량하게 놓여있는 내 카드를 가엾이 여기고 인포데스크에 맡긴 모양이었다. 



이미 몇 번의 셀프 분실(?)을 경험한 나라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담담히 인포데스크에 내려가 웃으며 카드를 잃어버렸노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이런 일이 이제는 오히려 반갑다. 지난 2년 간은 무조건 영어로만 대화를 터왔다면 이제는 아주 기초적인 내용은 독일어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숫기가 없어 헬스장 직원들에게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네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말을 걸 핑곗거리가 생기면 그게 모두 독일어 회화 실전 연습이 된다. 그래서 이 때도 카드를 못 찾으면 어쩌나 라는 불안감보다는 내 입에서 나오는 독일어 표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헬스장 직원의 행동에 나는 약간 감동을 받아버렸다. 





저, 헬스장에서 멤버십 카드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요. 제 이름은...
(Ich glaube, ich habe meine Mitgliedskarte im Fitnessstudio verloren. Mein Name ist...)





떠듬떠듬 머릿속으로 문법을 계산하며 카드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한 뒤에, 내 이름을 말하려고 하던 그 순간, 그 직원은 웃으며 바로 분실물 카드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리더니 망설임 없이 내 이름이 적힌 카드를 집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이름을 읊던 내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다가 사라져 버렸다. 






내 이름을 기억해줬어...







물론 이 헬스장으로 옮긴 지 시간이 제법 지나긴 했지만 나는 꼭 이 곳뿐만이 아니라 단골 가게를 가도 주인이나 직원과 대화를 잘 나누지 않는 아주 내성적인 손님인지라 누군가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건 아주 드문 일. 심지어 친숙하지도 않은 한국 이름이 수기로 적힌 내 멤버십 카드를 척하고 찾아내다니. 독일에서 외국인 친구들을 만날 때는 영어 이름을 쓰기 때문에 외국인이 한국 이름을 기억해주었다는 게 내겐 참 특별했다. 구두로는 명확히 전달이 안돼서 늘 내 이름을 종이에 써줘야 했었는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이름을 기억하고 찾아주다니. 물론 그 사람에게 의외로 한국인 친구가 많아서 내 이름은 어려울지라도 흔하디 흔한 내 성이 익숙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일하는 센스가 좋아서 손님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오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름을 기억해주고 이름을 자주 불러주라'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는 팁 중에 종종 나오는 이야기라, 머리로는 중요한지를 알고는 있다. 하지만 지금껏 마음으로는 몰랐던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내 이름을 기억해준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니, 약간 그 이상의 감동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말이다. 이 사람은 그저 돈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구나. 내가 만약 새로운 헬스장을 오픈할 계획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바로 이 사람을 스카우트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전 이름을 잘 못 외워요.'라는 핑계로 사람들의 이름도,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나 작품 제목들은 내 머릿속에 전혀 넣어두질 않았다. 하지만 외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나 자신을 반성하면서, 오늘부터는 나도 비록 친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주치게 되는 이들의 이름을 묻고 기억하려는 노력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글쓴이

필명 노이. 

30살이 되기 전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쓰려고 독일에 왔다가, 독일이 너무 좋아서 3년째 거주 중입니다.

탈회사원을 선언한 뒤 먹고살기 위해 독일에서 글 쓰고, 영상 찍고, 구매대행 일을 하고 있는... 사실상 백수입니다. :)


- 글: 노이

- 커버 이미지: Photo by Philippe AWOUTERS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이 갑자기 미국에 파견된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