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피버, 마지막 이야기
R과는 독일어 탄뎀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탄뎀이란 언어교환을 뜻하는 말로 주로 전문 교사가 아닌 일반인들끼리 만나 서로 배우고 싶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을 뜻한다. 독일에서는 탄뎀을 하는 케이스를 제법 자주 보았고, 나도 독일어 실력을 키우고 싶어서 탄뎀을 하게 되었다. R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독일 사람, 나는 독일어를 배우고 싶은 한국 사람이었다. 탄뎀을 하는 방식은 서로 정하기 나름인데 보통 1시간 동안 탄뎀을 한다고 하면 30분은 독일어, 30분은 한국어로 대화하고 혼자 공부하다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거나 하는 것 같다.
탄뎀은 페이스북 그룹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찾기도 하고, 탄뎀 어플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되기도 하며, 또는 지인의 소개로 소개받기도 한다. 내 경우 지인의 지인의 지인…의 다리를 건너 소개받게 되었다. 탄뎀이라는 것이 서로의 성향도 어느 정도 맞아야 하고 또 하다가 일상이 바빠지면 한쪽이 그만두게 되는 일도 잦다. 하지만 상대방은 계속하고 싶어 하는 경우 미안하기도 하니, 친구 중 다른 사람을 찾아 소개해 주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한 나의 첫 탄뎀은 처음에는 꽤 재미있었다. 종종 공부보다는 영어로 수다만 떨다 오는 날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내게는 외국어 공부였으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한국어 실력은 대화를 나눌 만큼 충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주로 영어로 한국어를 설명하며 가르쳐주는 입장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기대했던 ‘회화 방식의 공부’가 아니라 자꾸 내가 일방적으로 가르칠 것을 준비해와야 하는 상황에 지쳐 탄뎀 준비에 소홀해졌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공부는 수다로 흘러가고, 느슨해졌던 것 같다. 어쩌면 이래서 다른 사람들이 R과의 탄뎀을 빨리 그만두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나는 메인으로 독일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탄뎀은 학원 외 시간에도 독일어를 연습하고 싶은 하나의 대안이었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언어 교환이 안되더라도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어쩔 땐 이 주에 한 번 만남을 이어가던 R과의 탄뎀은 어느새 데이트가 되어있었다. R의 한국어 실력은 부족했지만, R은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해 꽤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종종 인생과 행복 등 삶의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고는 했는데, 그런 점에 있어서 R과 나의 성향이 제법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나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는 R에게 곁을 내주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독일 사람들은 썸을 오래 타기도 하고, 정식으로 사귀자는 말을 잘 안 한다는 이야기를 접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식으로 짧은 썸과 확실한 고백에 익숙하던 나는 아주 직진으로 찌르며 그의 마음을 확인한 뒤에야 안심을 하고 그와의 만남을 시작했다.
하지만 썸탈 때는 그렇게 다정하고 잘 챙겨주던 그였음에도 우리는 사귀기로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데이트를 할 때마다 자주 싸웠다. 순둥순둥 해 보이는 하얀 얼굴과는 달리 그는 고집이 매우 센 사람이었다. 늘 자신의 말이 맞았고, 싸울 때면 상대를 비꼬아 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스타일이었다. 주위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의 그런 고집에 다들 한 번씩 데어본 듯했다. 그래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조금 더 맞춰보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싶어 참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크게 실망하는 일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수였던 나에게 잠깐 번역 일거리가 들어왔다. 단기간 업무였기 때문에 며칠 정도 그와의 연락도 줄이고, 그를 만나지도 않고, 오직 업무에만 집중했다. 내가 연락을 늦게 해도, 그를 만나지 않아도 그가 서운해 할 수 없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리고 일을 하는 그 며칠 동안 나는 아주 아주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헤어져야겠다고.
개인적으로 그에게 많은 실망을 하기는 했지만 나와 맞지 않았을 뿐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가 특별히 엄청나게 나쁜 짓을 했다고 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좋게 헤어지려고 했다. 우리의 맞지 않는 부분을 설명하며 이별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런데 정작 헤어지고 나서 그는 내게 대반전 고백을 했다. 사실 나와 만나는 기간이 그리고 지금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라고, 나에게는 다 숨기고 괜찮은 척한 것이었노라고 말이다. 나는 황당하였다. 속은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나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왜냐면 그가 힘들었던 이유에는 X와의 남은 관계도 포함되어 있었고, 일과 관련된 부분도 있었다. 그 정도로 힘들었다면, 애초에 연애를 시작해서는 안되었다. 아니면 최소한 조금이라도 나에게 사귀기 전이나 사귄 후에 이야기를 해야 했다. 결국 그는 그의 삶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나에게 쏟아붓는 패턴을 반복했던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나 자주 싸운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힘든 시기가 아니라 더 좋은 시기에 나를 만났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거라며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가 힘든 시기를 보내는 이유를 모두 X의 탓으로 돌렸다. 내 눈에 비치는 그의 그릇이 점점 더 작아 보였다. 또 다음 여자에게 가서는 내 탓을 하겠구나 싶었다.
어쨌든 그의 뒤늦은 고해성사를 다 들어주고, 내 나름의 조언을 해주었다. 이별 후에 이게 무슨 고민 상담 시간인가 싶은 그런 시간이었다. 하지만 절대 이별의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는 불쌍한 척하며 나의 동정심을 유발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사귈 때에도 그는 종종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고는 했다. 나에게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법이 없다. 더 실망이었던 건, 지하철역 앞에서 헤어지기 직전, 그래도 가끔 만나 섹스라도 하는 사이가 되는 건 어떠냐는 그의 제안이었다. 그러자는 사람은 많지만, 아무 하고나 하지는 않는다고 깔끔하게 사이다를 날려주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 다시 한번 검증하게 되는 사건이 생겼다. R과 헤어지고 그 이름마저 헷갈려 갈 때쯤,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여자분을 우리 집에 잠깐 머물게 한 적이 있다. 그렇게 내 룸메가 된 그 분과 나는 가끔 식탁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는 했다. 그날은 어느 여자들이 그렇듯 남자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룸메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지만 자신은 이성으로서의 관심은 없어서 그저 친구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직업도 탄탄하고 돈도 잘 벌고, 성격도 좋고, 가치관도 좋은데 자신과 종교가 맞지 않는다고 했다. 룸메에게는 종교가 꽤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딱히 종교가 없었고, 당시 외로운 싱글이었기 때문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럼 나 소개해줘!”라고 했고, 그렇게 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듣게 됐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근데… 나 그 사람 아는 것 같은데? 혹시 이름이 R 아니야?”
“헉… 어떻게 알았어요?”
“헐 대박…”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 했던가. 룸메가 말해준 그의 프로필 중 절반은 과장해서 부풀려진 것이었다. 종종 지인의 지인들을 통해 알고 싶지 않아도 R의 근황을 전해 듣고는 했기에 그가 내 룸메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명백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사람이 내 X라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 내 얼굴이 빨개질 지경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R의 근황을 좀 더 적극적으로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진화한 옐로 피버라는 것을.
비록 R이 내게는 소리만 요란한 빈수레라는 이미지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 문화에 좀 관심이 있다는 것 말고는 특별히 사귀는 중에 ‘옐로 피버’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 행동은 없었다. 흔히 말하는 걸그룹을 좋아하는 아저씨 팬도 아니었고, 남녀평등에 대한 가치관은 나름 건강했다. 그래서 그의 X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는 사실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국계라고는 해도 미국에서 나고 자라 독일에 온 멀티 컬처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룸메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내가 아는 사람만 한국인 여자 세 명이었다. 나중에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R이 집적거렸다는 한국인이 두어 명 더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R이 한국으로 ‘살러’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말 소름이 쫙 돋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R이 노골적으로 한국 여자만을 ‘타깃’으로 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고집 센 그의 성격에 맞춰줄 지고지순한 사람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한국인 여자의 외모에 페티시를 가지고 있는 걸까?
내 머릿속에는 추측만 가득할 뿐 답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그가 누가 봐도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소름까지는 안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또 누군가가 나처럼, 나의 룸메처럼 그의 정체를 모른 채 순진해 보이는 그의 허풍에 속아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될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앞으로는 정말 옐로 피버를 파악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