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 피버를 만났던 이야기 2
이번 글에서는 지난 이야기에 이어 옐로 피버에 대한 에피소드를 좀 더 공유해보려 한다. S를 만난 이후로도 옐로 피버 같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또 만났었다. Y라고 하겠다. 이 이야기는 사실 개인적으로 털어놓기에 많이 부끄러운 일화지만, 이런 사람도 있더라 하는 의미로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Y와는 데이팅 앱을 통해서 만났었다. 그래서 직접 만나기 전에 먼저 온라인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Y는 이하이의 노래를 좋아한다며, 종종 뮤직비디오 링크를 왓츠앱으로 보내고는 했다. 받았을 때는 뜬금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는 그냥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보다 했다. Y가 공유해준 노래 가사에 괜히 더 마음이 쓰이며, 혹시나 달달해질지도 모르는 Y와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의 직업은 컨설팅 회사를 다니는 꽤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는 회사원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지낸 사람들과는 다르게 일을 할 때 양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었고, 일이 끝나는 시간도 늦을 때가 제법 많았다. 그때는 나도 여러 가지 일로 바쁠 때라 아직 확신이 없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기가 여유롭지는 않았다. 만나기 전에 상대를 먼저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만남을 계속 미루었었다. 그러다 바쁜 스케줄에 지쳐가던 어느 오후, 그는 꽤 적절한 타이밍에 나를 찾아왔다. 몸과 마음을 쉴 겸, 산책이나 가자는 제안이었다.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기에는 아직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던 단계라 산책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가볍게라도 직접 만나보면 Y를 좀 더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더 연락을 할지 말지를 정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잠깐 산책하는 건데 힘주어 꾸미기는 싫었다. 적당히 메이크업을 하고 편안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때는 그저 내가 바쁜 일정에 치여 꾸밀 기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이미 그때부터 상대에게 그다지 호감이 없어서 잘 보일 생각 자체가 안 들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보들보들한 소재의 외투를 걸치고 한참을 걸어 그를 만났다. 반대로 그는 제법 힘을 주고 나온 모습이었다. 청바지에 벨트, 위에는 약간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셔츠를 입고 재킷을 걸쳤다. 내 기준에서는 저 화려한 셔츠가 조금 과한 면도 있었지만, 늘어진 티셔츠에 고무줄 반바지보다야 낫지 생각하며 괜한 부정적인 생각은 훌훌 넘겼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알아채고 도망갔어야 했다.
그를 만나서 길을 걷는 내내 주위의 공기는 완벽하게 바뀌었다. 참 희한하다 싶을 만큼 그랬다. 아마도 그가 존재감이 꽤 어마어마한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키도 크고, 덩치가 큰 점도 그랬지만, 목소리도 커서 무슨 말과 행동을 하든 눈에 띄었다. 인사를 할 때부터 그는 나를 놀라게 했다. 볼 키스를 양쪽에 하고 나서 갑자기 그 입술이 내 입술 쪽으로 다가왔다. 너무 놀래서 얼굴을 돌려 피했다. 그는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인사인 것 마냥 말하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살면서 초면인 사람과 그런 인사는 해본 적도 없지만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경험상 함부르크에서는 볼 키스보다 허그를 하는 문화고 허그조차도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는 잘하지 않는다. 특히 내가 이 나라 문화권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허그나 볼 키스를 하고 싶어도 먼저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졌더니 그의 말은 이랬다. 자신은 그동안 나와 메시지로 대화를 나누면서 친분을 많이 쌓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에 그랬다는 것이다. 황당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찝찝했지만 어쨌든 내가 No를 했을 때 멈췄기 때문에 일단은 계획한 산책을 하러 공원 안쪽으로 향했다. 가면서 그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장미 한 송이를 내게 주었다. 어디서 꺾어왔다고 해도 믿을만한, 아무 포장도 되지 않은, 야생미 가득하게 가시 돋친 장미 한 송이를 그에게서 받아 쥐고 공원을 걷는 내내 나는 살면서 처음 겪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누가 봐도 ‘나 데이트하러 나왔소 하는 그의 옷차림’에, 장미 한 송이(장미가 무슨 죄냐 싶지만), 나를 배려한답시고 반복하는 과장된 제스처와 큰 목소리. 당장이라도 장미를 돌려주고 집으로 뛰어가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았다.
타인의 시선을 외면하려 애쓰며 삐걱삐걱 거리며 그와의 대화와 공원 산책을 이어갔다. 이렇게 불편했음에도 내가 꾹 참고 계속 산책을 이어갔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문화 차이겠지. 자기는 이탈리아 문화가 섞였다잖아.’ 처음 그의 입술 박치기를 거부한 직후, 그가 추가했던 또 다른 변명이 있었는데 바로 자기는 이탈리아의 피가 섞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절반이 이탈리아 사람이라 자신은 4분의 1이 이탈리안 피라며,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이탈리아 문화 때문이라고 했다 (이탈리아에는 딱 1년 살고 왔다고).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탈리아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꼭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일단 그 순간은 매너 있는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해 이를 꽉 물고 참은 것이다. (이 남자의 사례가 모든 이탈리아 남자를 일반화하지 않는다. 말했다시피 이탈리아에는 1년 살았던 독일 출생이다.)
그는 심지어 산책을 하다가도 멈춰 서서 키스할 분위기를 잡으려고 했다. 그렇게 걷다가 키스 시도, 거부. 걷다가 키스 시도, 거부. 이 패턴이 몇 번인가 반복되었다. 내가 거부를 하면 안 하는 건 다행이었지만, 정말 지독하다 생각한 건 이런 사람들은 될 때까지 다시 도전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제와 돌아보니 Y만 이랬던 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힘은 쓰지 않지만 특유의 고집과 집념으로 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다시 도전한다. 그중에 매너와 화술이라도 좋으면 기분은 덜 나쁘다. Y는 너무 노골적이었다. 나는 이들을 앞으로 ‘바퀴맨’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바퀴벌레처럼 끈질겨서 붙인 별명이다.
이것만으로도 Y와의 연락을 그만둘 이유는 충분했지만, 본인은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다. 산책 데이트가 끝나고 끝을 말하기 전, 그 사이 어드매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어김없이 K걸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날은 나더러 자기가 좋아하는 걸그룹의 춤을 춰줄 수 있냐고 했다. 걸그룹을 좋아하는 백인 남성이 옐로 피버일 가능성이 높으니 조심하라는 말이 떠도는 것은 알고 있고, 그것이 100% 모두 맞는 경우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나지만, 분명한 건 Y의 경우, 근거로 사용하기 충분했다. 노래를 좋아하는 건 네 마음이지만, 내가 한국 여자라는 이유로 걸그룹 춤을 춰달라니 선을 넘어도 제대로 넘었다. Y와 연락을 끊을 이유는 차고 넘쳤지만, 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나는 가능하면 최대한 좋게 끝을 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앞의 모든 이야기는 덮어두고, 그냥 라이프스타일이나(앞에 말했듯 야근이 많았던 사람) 성향 등이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로 앞으로 연락을 그만하자고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의 반응이 더 가관이었다. 몇 번인가 더 나를 설득해보다가 그래도 내가 한사코 거절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십대도 아니고, 이런 걸 한 번 만나보고 결정하냐. 세 번 네 번은 더 만나봐야지.”
십 대가 아니라서, 삼십대라서 한 번만 만나도 너의 그릇 정도는 다 파악이 된다는 말을 해줬어야 사이다 결말이었겠지만, 웃기게도 그 당시에는 기분은 나빴지만 그 말이 왜 기분 나쁜지는 모른 채 넘어갔다. 어쨌든 거절의 의사를 거듭 밝혔다. 내가 안 만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렇게 Y와의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저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스라이팅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십대도 아니고’라는 말은 곧 본인과 만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 나를 ‘미성숙한’ 인격으로 비하한 것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평소 저런 말을 하지도 듣지도 않으니 막상 들었을 때는 진짜 의미가 해석이 되지도 않더라. 내 결정을 비하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들려는 바퀴의 필사적인 발구르기였구나 싶었다.
이렇게 내가 만난 두 번째 옐로 피버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공통점은 ‘다정하고 나에게 잘해주는 것 같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한국 여자라서 좋아한 점,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내가 필요한 점 등이 있었던 것 같다. Y와의 단 한 번의 데이트는 내가 두고두고 제일 후회하는 데이트 중 하나이다. 그 때의 그 부끄러움과 부담스러움을 잊을 수가 없다. 어쨌든 옐로피버를 겪을수록 경험은 지식이 되어 아마도 앞으로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나는 또 만나버린 것이었다. 또 한 명의 옐로 피버를…
글, 본문 사진: 노이
커버 이미지: Photo by Hailey Kea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