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국제 연애

by 노이의 유럽일기

지금이야 나는 제법 외국인 남자를 여러 번 만나본 사람이 되었지만, 사실 나는 첫 번째 국제 연애 이후에 다시는 외국 사람은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사람이었다.



나의 첫 번째 국제 연애는 미국에서 만난 미국인 남자 친구 A였다. 그때는 영어도 잘 못할 때였는데,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다. 아무튼 그때만 해도 내게 외국인 남자들이란 미지의 세계여서 내 머릿속 상상의 세계에는 외국인 남자 친구에 대한 로망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우선 훤칠한 키나 잘생긴 얼굴은 나의 로망 중 하나와 제법 맞아떨어졌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내 인생에서 그렇게 잘생긴 사람이 남자 친구가 된 건 처음이었다. 그는 나보다 두세 살 정도 연하였고, 내가 살던 곳 근처에 있던 백화점의 여성 패션 잡화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옷 입는 센스도 좋았고, 평소에 나를 대할 때도 상냥함이나 매너가 몸에 배어있었던 것 같다. 당시 내 영어는 어눌하기 그지없었고 그는 한국어는 전혀 못하는 사람이었음에도 어찌어찌 연애가 시작되었다 (언어 문제는 더 나중에 허들로 찾아왔다). 대부분의 연애가 그렇듯 처음에는 즐거웠다. 꽤 외향적이고 파티와 클럽을 좋아하는 그를 따라다니며 재미있는 파티도 이곳저곳 경험할 수 있었다. 미국이 처음이었던 나에게는 박물관, 식당, 번화가 어디를 가도 모든 게 첫 경험이라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특히 영어가 어설픈 나에게 현지인 남자 친구라는 존재는 내가 미국을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매우 든든한 존재였다.



1385681576238.jpg 2013년 LA에서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의 집착과 의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한 번은 친한 직장 동료에게 Good night이라는 메시지가 왔다. 당시 A는 운전 중이었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있었고, 내 핸드폰은 우리의 사이에 있었다. 알람이 울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고, 화면에 뜬 Good night이라는 메시지를 그가 본 것이었다. A는 그 남자 동료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며, 나에게 태도를 조심하라고 했다. 그 남자 동료가 싱글이기는 했으나, 모든 동료에게 친절한 사람일 뿐이었다. 상황을 설명해도 그는 미국에서 Good night이라는 인사를 하는 건 관심 있는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라며 내가 잘 모른다며 끝까지 자기 말이 맞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정말로 그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그 동료와 나 사이에는 1년 동안 아무런,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다짜고짜 날더러 자기랑 만나면서 다른 남자랑 잤냐고 묻는 A. 나는 너무도 당연히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라고 했지만, A는 그런 나의 말을 믿지 않고 몇 번이나 추궁을 했었다. 술집이나 클럽은 그와 함께 다녔고, 그 외에는 직장 동료 외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던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만무했다. (어쩌면 그는 또 나와 그 동료를 의심했던 걸까? 지금 이 글을 적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어쨌든 없는 사실을 있다고 할 수 없으니 계속 진실을 말했다. 그러자 며칠 뒤, 그가 자신의 추궁에 대해 사과를 했다. 사실 최근에 자신의 몸에 가려운 증상이 생겼는데 그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추궁했다는 것이다. 근데 내가 자꾸 아니라고 하자 병원에 갔고, 결국 그가 최근에 새로 산 비누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몸이 이상하면 병원부터 갈 것이지 그때 나를 잡을 때부터 알아보고 헤어졌어야 했는데, 나는 참고 더 만나다가 정말 짜증 나는 일을 겪게 되었다.



어떤 날은 우연히 노트북을 하고 있는 그의 옆에 앉아있다가 바탕화면에 저장된 스크린샷 하나를 보게 되었다. 작은 미리 보기 이미지인데도 딱 봐도 가슴골이 훤히 파인 끈나시를 입은 동양인 여자였다. 누구냐고 물으니 전 여자 친구와 스카이프로 영상통화를 하다 찍은 거라고 했다. 전 여자 친구가 일본인이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그래, 친구로는 지낼 수 있다고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왜 굳이 스크린샷을 찍어두었냐고 했더니 그 여자가 찍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일단 알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한 상황이었다.


그러고 며칠 뒤, 카페에 앉아있다가 그가 차에 두고 온 물건을 가지러 간다며 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그가 두고 간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며칠 전 봤던 전 여자 친구의 스크린샷이 떠오르면서 핸드폰을 확인해 보라는 악마의 외침과 그래도 몰래 핸드폰을 보는 건 안된다는 천사의 기도가 서로 싸웠다. 결국 악마가 이겼다. 핸드폰은 따로 비밀번호로 잠겨있지 않았고, 나는 손쉽게 왓츠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따로 전여친과의 대화를 찾을 필요도 없이, 바로 서로 하트를 남발하는 채팅 기록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불안함과 동시에 너무 놀란 마음에 나는 바로 화면을 끄고 폰을 제자리에 두었다. 소심한 나는 당장 그에게 따지지도 못하고 그날 저녁까지 모르는 척을 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의외로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자기 폰을 봤냐며, 어떻게 남의 폰을 마음대로 볼 수 있냐며 화를 냈다. 폰을 본 것은 맞지만, 며칠 전의 그 의심스러운 상황 때문에 잠깐 본 것이며, 왓츠앱의 그 하트 대화 말고 다른 건 아무 것도 못봤다고 했다. 그럼 그 하트 대화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했더니, 그건 예전에 전여친과 사귈 때 나눴던 대화들로 자기가 일부러 내가 A의 폰을 열고 왓츠앱을 눌렀을 때 그 때 그 대화가 바로 뜨도록 세팅을 해두었다고 했다. 즉, 그 대화는 옛날에 나를 만나기전 전여친과 사귈 때 나눈 대화이니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고, 자기 폰을 마음대로 본 내가 대역죄를 지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때 나는 정말로 내 영어가 부족한 것이 너무 분하고 원통했다. 정리해보면, 그는 내가 자기 폰을 몰래 보는지 안보는지 테스트하려고 모든 상황을 세팅했다는 말인데, 그게 진짜여도 기분이 너무나 나빴고, 그게 아니라면 그게 전여친과 나를 둘다 만나며 양다리를 걸친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진짜여도 화가 났다. 결국 그 날 나는 A와 대판 싸우고 헤어졌다. 집착에 의심에, 나를 테스트까지 하는 남친은 한국에서도 만난 적이 없었다. A에게 크게 실망한 후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외국인 남자친구에 대한 환상이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외국인을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더랬다.


몇년이 지나고 페이스북 메시지함에 고이 잠들어있는 그의 오래된 메시지를 발견했다. 나랑 헤어지고 1년 쯤 뒤에 보낸 메시지였는데 내가 페이스북을 잘 안했던지라 너무 늦게 발견한 것이다. 메시지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어젯밤 꿈에 니가 나왔다, 잘 지내냐 등등… 나는 1초의 망설임도 1g의 미련도 없이 바로 메시지를 지우고 그의 계정을 차단했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국제 연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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