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아파. 하지만 거기서 도망치느냐 배우느냐는 네 몫이야.'
해외 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지내는 곳으로 한국에 있는 지인들이 오게 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상대가 원하기도 하고, 내가 원하기도 해서 가끔씩 이야기는 나오게 되지만, 막상 그 비용과 시간을 실제로 투입해야 되는 시점이 오면 흐지부지되기가 더 쉽다. 한국에서 오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유럽까지 오는 비용과 시간을 빼기가 쉽지 않은 일이고, 해외에서 지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먹고사는 일이 바쁜 건 한국이나 여기나 매한가지인 상황에서 장기간 손님을 들인다는 게 사실 신경이 꽤 쓰이는 일이다. 그래서 보통 누군가가 내가 있는 곳에 온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비행기표를 끊기 전까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전 회사 거래처 인연: ㅋㅋ제가 막 독일로 가면 만나주는 겁니까?
아직도 존대를 쓰는 나: 당연하죠 웰컴ㅋㅋㅋ
가볍게 한마디를 던진 그녀: ㅋㅋㅋㅋㅋㅋㅋ가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진짜 올 줄 몰랐던 나: 네 ㅋㅋ 일단 비행기표 끊고 ㅋㅋㅋㅋ
이야기가 나왔던 건 올해 4월. 몇 달이 지나 그녀는 결국 오고야 말았다.
한국에서 꽤 장기간 다니던 회사를 큰 맘먹고 그만두고 유럽 여행을 감행한 또 다른 서른 살 동갑내기 친구, J.
생애 처음으로 혈혈단신 유럽 여행을 결심한 그녀는, 나만 믿고 유럽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가 독일에서 머문 시간은 그녀의 전체 유럽 여행 기간의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유럽 땅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나 어쨌다나. (웃음)
5월 초에는 친동생이 놀러 왔었고, 이 친구가 두 번째 한국 지인의 방문이었는데, 내 업무량이 5월에 비해서 훨씬 늘어난 상태라 모든 시간을 함께 하기는 좀 어려웠다. 도착한 첫 날밤은 다른 국가들을 여행하느라 지친 심신을 위로하고, 본격적인 두 번째 날 밤 무엇을 할지 의논하던 중 신기하게도 서로 하고 싶었던 게 일치했다.
우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라이언킹 뮤지컬을 보러 가기로 했다. 마침 다음 날이 표도 가장 저렴한 날이었다. 저렴해서 고른 날이었지만, 막상 자리를 지정하려고 들어가니 너무 공연 전날이라 그런지 안 좋은 자리만 남아있었다. 다행히 둘 다 센터에서 보는 것을 선호하는 성향이라 의견은 쉽게 일치했다. 조금 비싸도 기왕 보는 거 좋은 데서 보자며 꽤 비싼 자리를 골랐다. (이건 마치 햄버거를 주문하면서, 다이어트 중이니까 제로 콜라 주세요 하는 건가...)
집에서 온라인 예매를 했는데 이것도 한 번에 끝나지는 않았다. 일단은 표 구매 대행 사이트인지 공식 사이트인지 잘 구분해서 구매해야 했다. 처음에 대행 사이트에서 구매를 하고 있었는데, 혹시나 해서 공식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수수료가 없어서 가격이 더 저렴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티켓 배송비라는 명목으로 얼마 정도 추가 비용이 청구되는데, 여기서 많이 헤맸다.
모바일 티켓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나오는데 막상 고를 수는 없었고, 나는 당장 내일 공연이라 우편으로 티켓을 받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된다는 가이드가 안보였다. 내가 못 찾은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비싼 공연인만큼 확실히 하고 가고 싶었다. 홈페이지에 나온 번호로 전화를 했다. 영어로 문의를 해도 되냐고 물으니 영어 응대 서비스는 번호가 따로 있다며 번호를 알려준다. 그쪽으로 전화했는데 다시 독일어로 받는다. 같은 말을 반복한다. 계속 뱅뱅 돌았다. (알고 보니 영어 담당자가 그 날 부재중이라 자기들끼리 서로 떠넘기고 있었다...) 상황이 너무 웃겨서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수화기 너머의 짧은 영어와 내 짧은 독일어로 어떻게 문의는 마무리됐다. 티켓은 공연장에 가서 찾으면 되고, 티켓 배송비로 청구된 금액은 티켓을 우편으로 받든, 공연장에 가서 찾든,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라고 했다. 현장에서 티켓을 배부해주는 사람들의 인건비인가. 또다시 한국과 다른 문화에 생소해지는 대목이었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중앙역에 가면 함부르크에서 하는 대표적인 공연들의 티켓을 살 수 있는 티켓 부스가 있다. 잘 모를 때는 역시 직접 얼굴 보고 사는 게 제일. 누군가는 나와 같은 고생을 하지 않길.
함부르크에서 고정적으로 상시 공연을 하는 뮤지컬은 대표적으로 알라딘과 라이언킹이 있다. 그중에서도 라이언킹은 디즈니가 직접 스토리를 만들어낸 디즈니의 첫 번째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다. (예를 들어 인어공주는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라이언킹은 디즈니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스토리) 라이언킹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일단은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고, 함부르크 항구에 갈 때마다 엘베강 위로 늘 라이언킹 배가 떠다니고 저 멀리에는 라이언킹 공연장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케팅의 일종인가...)
그리고 트립어드바이저를 통해서 유럽 사람들의 리뷰도 꼼꼼히 봤는데 생각보다 평들이 아주 괜찮았다. 그리고...
라이언킹 심벌이 그려진
라이언킹 전용배를 타고
출렁이는 엘베강을 건너서
라이언킹 심벌이 엄청 크게 붙어있는
라이언킹 전용 공연장으로
라이언킹을 보러 가다니 너무 낭만적이야!
이런 생각을 늘 해왔던 터였다. 이런 류의 '엔터테인먼트'는 공연 외의 시간과 공간, 즉 내가 그 경험을 하는 오프라인 시공간에서의 UX(사용자 경험)에서 그 퀄리티가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디즈니랜드와 에버랜드의 차이가 여기서 난다고 늘 생각한다.)
냉정하게 봤을 때 라이언킹의 공연장은 다른 공연장에 비해서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곳에 위치해 있다. 무조건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한다. 반면, 알라딘의 공연장은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접근하기 용이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런 지리적 불리함을, - 라이언킹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 - 특별한 경험으로 변신시킨 아이디어가 참 기발했다.
낮 시간 동안 서둘러 일을 끝내고 라이언킹 공연장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Landungsbrücken이라는 역으로 갔다. 다행히도 날씨는 좋았고, 사람들도 적당히 북적거렸다. 티켓 표시가 있는 인포센터가 있길래 가서 물어봤더니, 배를 타고 건너가서 공연장에서 표를 찾으라고 했다. 배를 타는 곳이 어디인가요, 하고 물으니 아주 친절하게 느린 영어로 설명해줬다.
배를 타는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라이언킹이 그려진 배가 서있는 게 보였고, 그 앞에 깃발로 나풀거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배를 타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도착하면 바로 공연장으로 입장해야 할 시간이라 저녁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배를 타는 선착장 바로 맞은편에 있는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 입구에서는 함부르크에서 꽤 유명세가 있는 피쉬 버거를 팔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토종 한국인 입맛인 우리는 무미건조한 빵에 날생선이 들어간 피쉬 버거의 참맛을 이해하지 못하겠기에,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주문했다.
음식을 맛있게 해치우고 배를 타러 갔다. 앞에 먼저 타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모두 티켓을 보여주고 탑승을 했다. 아직 티켓을 받지 못한 우리는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예약번호를 보여주며 공연장에 건너가서 티켓을 받을 거라고 하니 흔쾌히 들여보내 주었다. 다행이었다.
몇몇은 배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고, 배를 타면서 느끼는 바람을 좋아하는 나는 바깥에 머물렀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선장이 중후한 목소리로 배의 출발을 알렸다.
그러고 보니 엘베강을 배를 타고 건너는 것도 처음이었다. 배를 타면 일단 설레는 취향인지라 기분이 한껏 들떴다. 배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적당한 시간이었다. 줄을 지어 내려서 공연장으로 향한다.
곳곳에 세워진 동상들과 잔디밭, 공연장의 웅장함에 사로잡혀 모두 사진을 찍기 바빴다. 특히 라이언킹 디자인의 해변용 의자가 눈길을 끈다. 집에 하나쯤 가져다 두고 싶은 앙증맞은 디자인.
그렇게 사진 찍기에 취해있다 뒤를 돌아보고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 함부르크의 진풍경은 여기 있었구나. 함부르크 하버(Harbor)가 유명한 장소이긴 하지만, 사실 썩 내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오고 있었는데 그 생각을 완전히 깨트리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함부르크 하버의 진짜 풍경은 엘베강을 건너서 바라봐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함부르크 하버에 왔으면서도 이 풍경을 몰랐다니! 비싼 돈을 주고 보러 온 길이 아깝지 않았다.
더 둘러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표를 받기 위해 매표소로 갔다. 그런데 역시 한 번에 되는 일이 없다. 우리가 예약한 번호로 티켓을 조회할 수 없다고 했다. 어디서 어떻게 예매를 했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못 보면 어쩐다. 결제한 카드도 보여주고, 신분증도 보여주고, 줄 수 있는 건 다 주면서 두 번 세 번 확인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매표소 직원이 표를 찾았다고 했다. 직원 말로는 내 티켓은 내가 직접 뽑아서 와야 하는 티켓이라고 했다. 전화로 문의했을 때는 여기서 찾으면 된다고 했다고 했는데... 그런데 독일에서 종종 있는 일이다. 같은 곳이라도 직원마다 대답이 다를 때가 있다. (이 경우는 보통 내가 만난 직원이 새로 온 사람이라 일을 잘 모르거나 최악의 경우엔 일을 잘 못하는 경우인 것 같다.)
어쨌든 다행히 수기로 적어서 표를 만들어 주었다. 다행히 공연 시간에는 맞출 수 있었다. 가방 검사를 하고 표를 보여주고 드디어 자리에 착석했다. 공연 시간이 되어 불이 꺼지고 익숙한 전주가 울려 퍼졌다. 영어 뮤지컬도 알아듣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독일어인지라 나는 오기 전에 넷플릭스로 라이언킹을 복습하고 왔다. 복습을 하고 가는 건 장단점이 있었다. 장점은 바로 최근에 봤기 때문에 독일어로 공연이 진행되어도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단점은 봤던 이야기를 또 보는 거라 다음 장면이 예상이 돼서 재미가 살짝 떨어진다. (좋아하는 영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볼 수 있는 분들에겐 단점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라이언킹은 이미 모두 스토리를 아는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스토리를 알고 모르고는 큰 관전 포인트가 아니다. 바로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고 모든 주인공이 동물인 '라이언킹'을 무대에서 어떻게 재현해내었는가. 그것이 가장 재밌는 부분이었다. 나는 원래 인간이 아닌 형상을 인간이 분장을 하는 것이 인위적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언킹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분명 사람이 분장을 하고 있는 것이 훤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관중을 압도하는 흡입력이 엄청났다. 공연의 도입부부터 관객석 뒤쪽으로부터 동물들이 무대로 행진을 하면서 들어오고, 동물 하나하나를 표현하는 이들의 분장력과 (나래님 한 수 배우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동물의 움직임 한 마디마디를 세세하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가 말 그대로 예술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무파사의 충실한 심복인 앵무새, '자주'의 연기력!
캐릭터가 작은 앵무새이기에 대놓고 사람이 서서 새 인형을 들고 연기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자주가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더빙 능력과 표현력. 심지어 이 날의 유머 코드를 모두 책임지고 있는 것처럼 빵빵 터뜨리는 위트까지 겸비. (물론 독일어를 모르는 우리는 웃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런 대사가 없었음에도 엄청나게 인상 깊었던 치타!
초반부와 중반부 중간중간에 다른 동물들과 함께 나타나는 조연 중 하나였고, 대사도 한 마디도 없었지만 나무로 된 치타 모형을 다리에 끼우고 그 부드러운 걸음새를 표현하는 능력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의 내용과 진행은 원작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애니메이션에서 심바가 태어난 날 심바를 양팔로 번쩍 높이 들어 올리던 조금은 똘끼 있어 보이는 원숭이 역할이다. 애니메이션에선 바짝 마른 할아버지 원숭이지만, 뮤지컬에서는 여배우가 대신했다. 원작과 다른 설정임에도 강한 카리스마와 독특한 설정으로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녹아들어 있었다.
위 감상을 보다 보면 느끼시겠지만, 라이언킹의 심벌인 '심바'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 사실 심바는 조금 실망이었다. 심바는 나이가 어린 소년 배우가 연기했는데, 아무래도 나이 때문인지 연기가 조금 어색하고 분장도 귀와 꼬리를 다는 정도였다. (심바가 독일에서는 인기가 없나?) 심바의 여자 친구인 날라도 비슷했다.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다른 건 대부분 만족스러웠다.
긴 공연 시간이 끝나고 공연장 밖으로 나왔을 때 그 풍경이 또 친구와 나의 발걸음을 사로잡았다. 배를 타러 길게 늘어지는 행렬을 피해 우리는 구석으로 가서 앉아 해지는 노을을 감상했다. 그 날의 하늘색과 엘프 필하모니 건물의 모습은 잊지 못할 것이다.
함부르크 라이언킹 뮤지컬의 가격은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비싸다는 인식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만한 가치는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감상했을 영화나 뮤지컬 등이 이제는 정말 다르게 보인다.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연습해서 완성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을지 생각하면 말이다.
그리고 한 편의 작품에서 탄생하는 많은 명언들이 또 우리 각각의 인생에 남아서 우리가 힘들 때마다 힘이 되어주고는 하지 않나. 맨 처음 라이언킹을 애니메이션으로 봤을 때도 지금도 나는 '하쿠나 마타타'를 가장 좋아한다. 하지만 이번에 라이언킹 뮤지컬을 보고 나서는 아래 글귀가 가장 와 닿았기에 공유하면서 글을 마치려고 한다.
그래, 맞아. 과거는 널 아프게 할 수 있어.
하지만 내 생각엔 말이야... 넌 거기서 도망칠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