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Ready to ready

2025.06.02.

by 이이름


아내에게 세계여행을 한다면 꼭 가보고 싶은 나라와 도시, 혹은 장소를 골라보라고 한 후에 나도 작업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술술 떠오르는 것 같았다. 죽기 전에 아이슬란드 가서 오로라는 한 번 봐야지. 훈자마을이 그렇게 좋다던데 꼭 가봐야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건축물들은 한 번 보고 죽어야지. 피라미드라든지 콜로세움이든지. 그렇게 몇 줄 적다 보니 생각보다 금방 막혔다. 스무 곳 서른 곳 줄줄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내 역시 나만큼 어려워했다.


살면서 접해왔던 ‘세계’는 의외로 단편적인 인상에 불과했고 거기에 나의 관심이 ‘깊게’ 있었던 건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같은 유의 여행 콘텐츠나 다른 나라의 문화나 자연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즐겨본 것도 아니었다. 인류 역사나 유물에 대한 관심 역시 일시적으로 돌출했다가 가라앉고는 했고 그 범위도 지엽적이었다. 가끔 메인 뉴스에서 다루는 정도의 거대한 이슈가 아니면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뉴스는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럼 나는 왜 세계 이곳 저곳으로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기 전에 많은 나라를 다녀보는 게 나 자신에게는 꽤 중요하다. 지구의 많은 곳에 족적을 남겨보리라. 세상에 신기하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리라.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 근원에 있다. 이야기를 많이 지닌 사람이 되기 위해, 소위 말해 나 자신을 ‘브랜딩’하고 싶다는 욕망도 있는 것 같다. 일종의 자기과시이기도 한 것이다.


억지로 가고 싶은 곳을 쥐어짜서 떠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애초에 왜 세계여행을 일생 최대의 미션이자 꿈으로 설정했던 것일까, 하는 원초적인 의문에 다다랐다. 결국 끝이 보이는 삶이라는 허무의 구렁텅이에서 의미를 찾는 건 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무한한 회의의 늪에 발을 들이려는 그때,


시끄럽고, 모르겠고, 그냥 해봐


내면에서인지 외부에서인지 정확히 모르겠는 곳에서, 소비사회의 아포리즘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브랜드 슬로건의 영향임을 부정할 수 없는, 일면 무책임하게 들리면서도 자신을 가장 무거운 책임감으로 일으켜 세우는, 그런 소리가 들렸다.


알 수 없는 근원에서 솟구쳐 오르는 욕망과 현실적인 조건(나이, 체력, 돈 등) 들을 최대한 조율해 가며 엑셀에 국가와 도시를 채워 넣는다. 해보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 느껴보고 싶은 것들을 별도로 작성해 보기도 한다. 한참을 뚝딱거린 후, 마침내 지도 위에 여행 경로(tripline.net)가 나타난다.


지구 표면 일부에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나타난 빨간 점과 선.


이 작고 보잘것없는 몸을 이끌고 거대한 허무와 무의미의 심연으로 한 발짝 들여놓아 보겠습니다, 대상도 없이 기도를 한다.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는지 모른 채 마음은 벌써 바빠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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