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3.
한가로운 평일 오후, 올림픽공원 한성백제 박물관 앞 넓은 잔디 마당은 태양빛을 반사하느라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잔디밭 한가운데에 거대한 돌덩어리 두 개가 길쭉하게 박혀 있다. 그것들은 정방향에서 보면 얼굴을 맞댄 사람을 형상화한 듯 보이지만 측방에서는 그저 돌을 가지런히 깎아 놓은 구조물로 보인다. 이 거대한 구조물은 1987년에 스페인 사람이 만든 작품으로 제목은 ‘하늘 기둥’이다. 작품 설명에 따르면, 태극기의 ‘음양’에서 영감을 얻고, 세 개의 입면체는 하늘을 상징하며, 한국의 전통을 횡단하는 음양사상을 하늘 한가운데 드러냈다고 한다. 영감이나 상징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저 길쭉한 돌덩어리로만 보는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저 거대한 것을 어떻게 가공해 저기에 박아 두었는지, 공사를 기획하고 실행한 예술가에게 경의를 느낀다.
잔디밭 한편에 가방을 멘 젊은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얼마 전에도 이곳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이 남자는 얼굴을 하얗게 칠한 채로 자신의 춤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게 일주일 전이었는지 그보다 오래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그때도 오늘 같은 평일 오후였다는 점이다. 해가 중천일 때 푸른 잔디밭에 나타나 춤을 추는 남자.
남자는 2리터 물병과 삼각대 두 개, 검은 두건을 꺼내 준비를 시작했다.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검은 두건을 쓴다. 상하의와 신발까지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마치 닌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얼굴에 칠한 하얀 분 때문에 닌자를 하기엔 너무 눈에 띈다, 고 생각한다. 두 개의 카메라는 ‘하늘 기둥’을 향하게 설치한 뒤 카메라에서 일이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자리를 잡는다. 쏟아지는 태양빛을 정수리에 맞으며 남자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의 키보다 훨씬 작은 그림자가 바닥에서 일렁인다.
웨이브를 주종으로 하고 약간의 스텝을 밟는 것 같긴 한데, 춤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굉장히 어려운 춤은 아니다. 춤은 팔과 상체의 웨이브 중심의 몇 가지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2분 정도 춤을 추고 나면 카메라 버튼을 누르고 물을 한 모금 마신 후에 제자리로 돌아가 똑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반복 촬영한 후에 가장 잘 나온 영상을 가지고 편집을 하려는 것 같다.
남자의 춤과 녹화는 오후 내내 이어졌다. ‘하늘 기둥’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까지도 남자는 같은 춤을 반복했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오후 반나절 동안 보기만 한 나도 그 춤이 지겨워질 지경이었다. 레퍼토리에 조금의 변화도 없이 남자는 2분 정도의 춤을 수백 번 반복하고 있었다. 두세 번인가 카메라를 옮겼는데, 옮긴 자리 역시 ‘하늘 기둥’이 나오도록 방향을 잡고 춤을 췄다. 다섯 시간 가까이 계속되는 지난한 작업. 뙤약볕 아래에 검은 옷을 입고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남자.
그 남자를 보고 있으니, 전설적인 뮤지션 리 메이버스(Lee Mavers)가 생각났다.
리 메이버스는 ‘There she goes’라는 노래로 유명한 The La’s의 프론트맨이었다. 이 사람의 완벽주의는 광기에 가까웠다고 전해지는데, The La's의 데뷔 앨범은 1987년부터 작업을 시작해 1990년에 발매되기까지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특정한 빈티지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해 녹음한 곡들을 끊임없이 부정하며 수차례 다시 녹음했고, 이 과정에서 제작자만 다섯 번이나 교체되었다. 결국 소속사는 메이버스가 만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앨범을 출시했으며, 메이버스는 앨범을 자신의 작품으로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The La’s는 한 장의 앨범만 남긴 채 전설이 되었고, 메이버스는 "잃어버린 록의 천재", 혹은 "집착의 순수주의자"로 불렸으나, 정작 자신은 그 말조차 부정했다.
이데아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좌절을 리 메이버스의 삶에서 볼 수 있다. 현실은 언제나 불완전한 모방에 불과하고, 예술가는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 이런 이야기가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가? ‘독 짓는 늙은이’라든가 '방망이 깎는 노인'에서도 그런 예술가를 본 듯하다. 집착에 가까운 끈기로 고독하게 전진하는 예술가들.
타인은 기준이 되지 못한다. 예술가에게는 이데아가 있을 뿐.
거대한 돌을 원하는 형태로 깎아 잔디밭에 박을 정도의 포부. 남들이 훌륭하다고 손뼉 쳐도 단호히 고개 젓고 독을 부숴버리는 결기. 범인들이 들으면 구분도 안 될 사운드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수천번 녹음하는 끈기.
남자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잡힐 때까지 멈추지 않고 춤을 춘다. 보고 있는 사람도 지겨울 만큼 똑같이 반복한다.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고 고개를 젓는 나 따위는 남자의 안중에 없다. 이번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이 잔디밭에 나올 것이다. 남자는 지금 뭔가를 만들고 있다. 하얗게 칠한 얼굴 가운데 형형한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