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7.
표지만 봐도 유서 깊어 보이는 2장의 LP를 당근마켓에 올렸다. 며칠 동안 반응이 없으면 가격을 내릴 생각이었는데 올린 지 몇 시간 안 돼서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에서 밝음이 전해져 왔다. 이 음반을 구하게 돼 기분이 좋은가보다 생각했다. 상대방은 일괄 구매를 제안하며 네고를 요청해 왔다. 어려우면 괜찮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 역시 기분이 쿨해져서 약간의 네고를 해주고 기분 좋게 약속을 잡았다.
메시지를 나누며 나는 상대방이 60대 남자라고 생각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오래전에 좋아했는데 잊고 있었던 음반이 당근에 올라온 걸 보고 흥분한 반백의 남자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말투에서 뭔가 그런 추억과 반가움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거래 장소로 나가며 아내에게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아저씨 같은데 메시지가 귀엽다고. 아내는 아저씨가 아닐 수도 있을 거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말했다. 도착해 보니 거기에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됐을 것 같은 앳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판을 꺼내 확인하며 상대방은 "상태가 좋네요." 하고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이런 음악을 좋아하시나 봐요?" "네." 가벼운 미소를 띠며 그녀는 짧게 답했다. "그런데 제가 턴테이블이 없어서 테스트를 못해봤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저도 턴테이블이 없어서 할머니 댁에 가서 들어야 돼요. 일단 가지고 있으려고요." 하고 음반 상태를 체크했다.
나는 그녀가 그 LP들을 할머니 댁에 들고 가 조심스럽게 턴테이블에 올리고 홈에 바늘을 걸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그녀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쿠션을 안은 채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을 들으며 뿌듯하게 몸을 떨었다. 사람을 앞에 놓고 이렇게 맘대로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게 미안하기도 한데, 사실은 기분이 좋아서 그랬다. 새롭게 발견한 음악의 세계에 깊이 빠져, 오래전에 나온 음반을 발견할 때마다 구하는 열정을 보는 게. 그 날 것의 소리를 오리지널로 듣기 위해 할머니 댁에 일부러 가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열정을 눈앞에서 보는 게 좋았다. 새 CD를 사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스무 살 때 기분이 자연스럽게 기억났다. 그녀는 이미 저 앨범들을 유튜브로 다 들어봤을까? 아니면 오리지널로 듣고 싶어 꾹 참고 있을까? 궁금하지만 길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우리는 고작 당근하는 사이가 아니던가.
그녀와 헤어지고 돌아서며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시인했다. 아내는 우리가 나눈 메시지를 보더니, 어딜 보나 젊은 여자 같은 말툰데 무슨 60대 남자냐며 나의 촉을 비난했다. 메시지를 다시 보니 60대 남자보다는 20대 여자라고 해야 훨씬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귀여운 이모티콘도 중간에 있었고.
60대 남자도 얼마든지 귀여운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편견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남을 속일 순 있을 거다. 그러나 사실, 이런 장르의 LP 음반을 즐거운 마음으로 구하는 20대 여자를 상상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상상력 결핍은 꼰대의 지름길. 나는 명백하게 발랄한 메시지도 제대로 판별하지 못할 만큼 강한 선입관을 갖고 있는 꼰대라는 게 진실이다.
당근 시 주의사항 하나. 미리 판단하지 말 것. 더 많은 가능성을 상상할 것.
결혼 전 사용하던 싱글 침대를 당근에서 판매한 적이 있다. 직접 보고 싶다고 찾아온 여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내가 남자일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던 모양이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시네요? 하며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남자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확인하는 게 굉장히 불편하다는 티를 내기에,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편하게 보시라고 아예 거실에 나가 있었다. 나는 누가 봐도 남자처럼 '다, 나, 까'로 종결하고 마침표도 꼬박꼬박 찍었으며, 이모티콘 따위 흔적도 없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왜 자기 멋대로 여자라고 상상해 놓고는 마치 내가 속여서 집으로 꼬드긴 것처럼 이상하게 구는 거지? 싶어 상당히 불쾌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나였어도 당황했을 수 있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상상력 결핍에 사과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 번은 5천 원짜리 물건을 사러 벤츠를 끌고 온 사람이 있었다. 물건 값보다 기름값이 더 드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걱정은 오지랖. 그날 밤 아내와 나는 '이렇게 아껴서 벤츠를 끌게 된 건지, 벤츠를 끌만큼 여유 있는 사람들이 더 검소한 건지'에 대해 답도 없는 논의를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여름 페스티벌에서 신으려다가 비가 안 와서 완전히 새것으로 중고가 된 장화를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집 앞에서 거래하기로 해서 나가보니 연세가 팔십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난 괜히 무람해져서 어디 사시냐고 물었다. 이렇게 노인인 줄 알았으면 우리 집 앞까지 오라고는 못 했을 일이었다. 차라리 중간쯤에서 만나기로 했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할아버지는 옆 동네에 사는데 지하철 타면 금방이라며 걱정 말라고 하시고는, 좋은 물건을 싸게 팔아줘서 고맙다고 정중하게 인사하셨다. 차비를 빼드리겠다며 2천 원을 깎아드리겠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노인이라 차비도 안 받는데요."라며 연신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하셨다. 할아버지의 진심이 느껴져 나도 연신 고개를 숙이고 덕담을 나눈 후에 작별했다.
당근 시 주의사항 둘. 스스로 감동하지 말 것. 너무 깊이 관여하거나 아는 척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