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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ul 05. 2018

박수근 "서민화가의 아이러니"

누구나 오래된 절에 가서 석탑을 만져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우둘투둘한 거친 화강암의 질감. 평생 흙을 매만지며 살아간 할머니의 거친 손 같은 질감. 그 질감으로 한국적 정서와 삶을 표현한 화가. 그가 바로 박수근 화백이다. 얼마 전 그가 태어난 1914년을 기념해 <100주년 기념 박수근 전시회>가 열렸다. 


박수근 <빨래터> 1950년대 후반


그림 값이 가장 비싼 서민화가?


박수근 화백은 우리나라에서 그림 값이 가장 비싼 화가 중 한명이다. 박수근의 작품 <빨래터>는 2007년 45억 2000만원에 낙찰되어 국내 최고가를 찍었다. 그의 그림은 보통 1호(엽서크기1장)에 2억이 훨씬 뛰어넘는다. 소박함이라는 한국적 정서를 가장 잘 살렸다는 그의 그림. 하지만 옆에 가격을 붙여 놓는다면 어떨까. 평생 월급쟁이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엽서 1장 크기도 만만해보이지 않을 것 같다. 서민화가의 그림이라고 하지만 서민은 접근조차 힘든 돈 아닌가. 과연 그의 그림은 왜 이렇게 비쌀까. 물론 작품의 예술적 가치도 있지만 사실 돈이 그렇게 움직이지만은 않는다. 


한국 예술 작품의 가치는 보통 미국에서 인정받아야 올라간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도 미국에서 유명해진 후 한국에서도 천정부지로 뛰게 된다. 전쟁 후 형편이 궁핍해진 박수근 화백은 주한미군 부대 PX에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거기서 연을 맺은 미국인들은 가끔 집으로 찾아와 그림을 사가고 재료도 사다주었다. 그러다가 당시 미 대사관 문정장관의 부인인 그레고리 핸더슨이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갖고 그림상설 전시와 화랑을 주선해준다. 이후 그의 작품이 미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게 되고 주한미공군사령부가 주선한 박수근 특별 초대전이 열리게 되었다. 결국 그렇게 그는 사후에 미국에서부터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다. 


월남한 반공 화가


주한미군PX에 초상화를 그려줄 만큼 그에게 미국은 구원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해방이 된 후 3개월 만에 박수근 화백은 조선총독부 산하 평양도청 서기직을 그만두었다. 북한정권이 수립되고 토지개혁이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부유했던 그의 처가는 토지를 전부 몰수당했다. 그 후 박수근 화백은 1950년 금화군 대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군 대의원으로 당선됐다. 당시 우익인 민주당 대의원이었던 그는 전쟁이 터지자 반공에 나섰다. 국군이 북진을 한 후 그는 너무 기뻐 ‘국군환영’이라 쓴 포스터와 플랜카드를 그려 온 거리에 붙이고 다녔다. 그는 자발적으로 국군의 일을 도우며 국군 선전포스터 등을 맡아서 처리했다. 이런 연유로 북한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홀로 월남을 결심했고 2년 후 부인도 자녀들과 함께 월남했다.


당시 월남한 화가들과 월북한 화가들은 작품에서도 뚜렷한 색깔의 차이가 났다. 사회비판의식이 뚜렷하고 사실주의 화풍을 가진 화가들은 북으로, 순수예술을 추구하거나 관념적 허구세계를 그린 화가들은 남으로 향했다. 월남 작가는 대표적으로 박수근, 이중섭 등이 있다. 하지만 월북한 리쾌대, 한상익, 길진섭 등 저항 화가는 1988년 월북 예술가 해금조치 이후에나 관심을 받았다. 그들은 길진섭 화백(3.1 운동 민족대표 길선주의 아들)이 ‘목일회’ 같은 동인회를 통해 항일 그림을 그렸듯이 일제에 그림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은 한국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유럽에서는 나치 치하에서 저항 운동을 한 화가들이 전후 화단을 주도한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골목안> 1950년대

일제시절 그의 작품 활동


조선미술전람회. 약칭 선전(鮮展)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여 1922~1944년 총23회에 걸쳐 개최한 종합 미술전람회다. 선전은 조선의 미술을 일본미술의 아류로, 식민통치에 순응하는 식민지미술로 재편하는 제도적 장치의 역할을 하였다. 이는 현실의식을 지니지 못한 미술가들의 인식 수준과 맞물려 많은 일본식 동양화와 서양화의 아류 작품을 탄생시킨다. 당시 많은 문학가, 예술가들이 일제 식민통치에 맞서 싸우기 보다는 순응하며 살았던 것처럼 그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박수근 화백은 12살 되던 해 밀레의 <만종>을 보고 너무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한다. “혼자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그림 그리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라고 인터뷰 했을 정도다. 밀레의 <만종>. 밀레는 당시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던 화가다. 밀레의 그림이 비난 받았던 것은 당시 비참한 현실을 너무 잘 묘사해 ‘빈부의 갈등을 조장’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밀레를 좋아했다고 박수근 화백이 사회주의적 색체를 띈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농가에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3대 독자였다. 비록 가사가 기울어 중학교 입학을 포기했고 일본에 건너가 고학을 하려던 그의 꿈은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무너졌지만 재능이 있었던 그는 계속 붓을 놓지 않았다. 마침내 어린 박수근 화백은 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수채화 <봄이 오다>로 입선한다. 


일제말기 박수근 화백은 춘천 도청 사회과에서 일하던 일본인의 후원으로 개인전도 열고 조선총독부 산하 평양도청 사회과 서기로 취직도 했다. 당시 부인을 모델로 한 <맷돌질을 하는 여인>이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다시 입선을 했다. 당시 한국인이 선전의 등용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화강암 같은 독특한 회화기법


그래도 다행히 그는 그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박수근 화백의 대표작 <빨래터>에는 그가 홀로 독학해서 구축한 독특한 회화적 기법이 잘 표현되어있다. 그의 작품은 특히 돌과 같은 강렬한 질감이 인상적이다. 그는 그 질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 석불 같은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조형화에 도입코자 애쓰고 있다” 전문가들은 박수근 화백이 태어난 강원도 양구의 화강암 지대에서 영감을 받아 독특한 질감을 표현했다고 말한다. 그 기법에 대해 그의 아들 박성남씨는 “우선 캔버스 바탕에 기름을 섞지 않은 물감을 그대로 바르고 10번 이상 가로세로로 칠한다. 이런 십자작업을 통해 우둘투둘한 질감을 얻는다”고 설명했다.


<농악> 1960년대


그는 한국인의 일상적인 삶과 소박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흙냄새가 나는 독특한 표현양식이다. 그의 토속적 색체는 어려운 환경에서 스스로 우리의 들과 산을 바라봤기 때문에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 유학이나 서양 유학을 갔다 왔다면 형성되기 힘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농악><골목길>과 같은 한국 농가와 마을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어려운 시절 여인네들의 거리의 삶. 골목길은 이런 삶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작품의 배경이 거의 대부분 길이다. 가사노동의 힘든 삶과 그 속의 여유. 아기 업은 엄마와 아이들의 모습이 골목길 속에 잘 녹아있다.


그림의 소박함은 굵은 선을 중심으로 선을 단순화시키면서 더욱 잘 묘사된다. 그의 그림은 굵고 명확한 검은 윤곽선, 흰색과 갈색을 중심으로 한 평면적 색체를 띈다. 사람의 세부적인 표정은 묘사되지 않고 둔탁하게 처리된다. 굳이 그리지 않아도 표정을 읽을 수 있으며, 보는 방향에 따라서 질감과 색깔이 약간 변화한다. 이런 기법은 ‘한국적인 유화’라는 호평을 얻었다. 또한 그림의 구도는 안정적이다. <빨래터>는 화면의 운동감과 밀도감을 위아래 화면을 대각선으로 나누면서 꽉 찬 느낌을 준다.


그의 고단하고 가난한 삶


그의 고단하고 가난한 삶은 소박한 한국적 그림이 나올 수 있었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천대 받던 당시 더욱 그러했으리라. 일제시대, 삶은 참으로 가혹했다. 전쟁이 터지고 월남을 했지만 그렇다고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했다. 그는 생전에 미술계의 중심에 서 본 일이 없는 평범한 화가였고, 가난과 병마와 싸우다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전성기를 잠깐 누리지만 아주 잠시였다.


그는 물건을 살 때면 큰 상점에서보다는 노상이나 손수레, 광주리장사에서 샀으며, 광주리 장사하는 여인들을 늘 불쌍히 여겼고, 전후에 고생을 겪는 이웃들을 애처롭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평범한 삶, 단순한 인간상을 그렸다. 그는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렸다. 고향을 그리는 그의 마음과 가난했던 그의 삶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왔던 것이다.


박수근 화백의 이야기 ‘나목’을 쓴 박완서 작가는 이렇게 회고한다. “훗날 박수근 선생의 그림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난, 이 사실을 그가 작고한 지 몇 년 만에 열린 유작전을 보고야 알았다. 그가 대단한 화가로 평가받는 게 너무 기뻤다. 그러나 그의 생전의 가난이 억울했다. 또한 절박했던 한 예술가의 생애가 너무 슬펐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문득 DMZ에서 월남하던 도중 그의 아내가 묻었다는 항아리 속 수백억 대의 작품 행방을 찾는 기사에 쓴웃음이 나온다. 아무래도 순응하면 인정받고 저항하면 낙인찍히는 사회에 순수예술은 존재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 예술에서도 예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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