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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본질적 가치
by 삽질 Jul 05. 2018

금지된 피카소의 그림, 계속되는 그들의 학살

우리는 피카소하면 괴이한 추상적 형상을 떠올린다. 입체파. 2차원에 3차원을 담는 그의 시도는 가히 파격적이다. 한국에서는 보통 피카소의 연인들을 소개하며 그에 따라 변화하는 쾌락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그림들을 전시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절대 잘 알려주지 않은 사실이 하나있다. 바로 피카소가 ‘프랑스공산당원’ 이라는 사실이다. 의식 깊숙이 박혀있는 ‘공산당’이라는 적, 그가 만약 지금 한국에 살고 있다면 피카소는 어떻게 평가되었을까.


평화의 상징 비둘기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 삽화


비둘기가 물고 온 평화의 나뭇가지.

비둘기에 투영된 얼굴.

갈망하는 눈동자.

무엇을 투시하고 있는가.

어둡지만 응시한다.

두렵지만 바라본다.

평화의 상징.

비둘기에 담아 날려 보낸다.


비둘기는 어린 피카소의 첫 친구였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스페인 말라가에는 비둘기가 많았다. 그에게 비둘기는 고향이었던 것이다. 비둘기를 통해 그려진 평화는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을 의미한다. 피카소는 비둘기를 사랑하여 딸 이름을 스페인어로 비둘기를 뜻하는 팔로마(Paloma)라고 짖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 속에 프랑스 공산당은 당원이었던 피카소에게 파리 세계평화주의회의 포스터를 의뢰한다. 피카소가 1949년 파리 세계평화주의회의 포스터를 그린 후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조선에서의 학살


피카소의 작품 중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대표작은 ‘게르니카’ 다. 그와 함께 대표적인 반전 작품으로 ‘조선에서의 학살’을 꼽을 수 있다. 조선에서의 학살은 현재 북한지역인 신천군에서 벌어진 한국전쟁 양민학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프랑스공산당 기관지 ‘뤼마니떼(L'Hmanite)’의 특파원은 1951년 5월 당시 신천군 양민학살을 현장 취재했다. 피카소가 그 현장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접한 충격으로 그린 작품이 1951년 완성한 ‘조선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다.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 1951


이 작품은 프랑스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그림에서는 4명의 벌거벗은 여인들이 나온다. 팔이 잘린 아이는 공포에 질려 엄마 품에 안겨있고 임신한 듯 보이는 이 여인은 슬픔에 잠겨있다. 갓난아이를 살리려는 어머니의 공포에 질려있다. 체념한 여인들의 모습들도 보인다. 미군에 총부리에 공포에 질린 아이는 여인들 곁으로 도망가고 있다. 아래 천진한 아이는 상황을 모른 채 흙장난을 한다. 무너진 집들과 폐허가 된 산하가 침통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군인은 온갖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그들은 표정을 감추고 무기만을 들이밀고 있다. 집중사격 자세를 취한 인간성을 상실한 살육을 탐하는 중세 철갑병사. 피카소는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역사적 진실 


신천군 양민학살을 자행한 사실에 대해 미국과 한국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의 1952년 3월 31일 ‘코리아에서의 미군 범죄에 관한 보고서’에서는 신천양민학살 가해자가 미군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국제 사법단체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조사위원회는 1952년 한반도 북부의 황해도 등 여러 지역을 방문해 미군의 학살에 대한 조사 작업을 진행했다. 증거수집에 기초하여 작성된 보고서 중 ‘제4장 대량학살, 살해 및 기타 잔혹행위’는 신천양민학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50년 12월 7일, 미군이 철수하기 직전, 해리슨 신천군 미 점령군사령관은 그의 휘하에 있던 미군 부대와 이승만의 원군 장교들에게 ‘철수는 일시적이며 전략적 이유에 따른 것’이라 말하고 ‘주민들에게 미군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지시하라고 명령했다. “남아 있는 자는 모두 실질적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원자폭탄이 투하될 것이다.” 그는 모든 ‘빨갱이’ 지지자들을 섬멸할 것을 지시했다. 모든 인민군 병사의 가족들과 부역자 가족들은 빨갱이로 간주되었다. 그의 명령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날 신천군 원암리의 창고 두 군데에서 900명의 남녀 학살이 발생했다. 건물 안에는 어린아이들도 200여 명 있었다. 미군들은 이들의 옷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창문 안으로 수류탄을 집어던졌다. 건물 안에 있던 한 여성이 자신의 두 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냈다. 한 아이는 총에 맞았지만 한 아이는 도망쳤다. 어머니는 불에 타 죽었다. 해리슨과 다른 장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금지된 그림 


미국은 자신의 실체에 대해 폭로한 피카소를 증오했고 피카소는 입국금지조치 당했다. 당연히 미군이 저지른 신천양민학살을 고발했던 ‘조선에서의 학살’도 미국에서 전시되지 못했다. 미국은 모순적으로 독일군의 만행을 폭로한 ‘게르니카’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하였다.


세상에는 제 눈에 띠끌은 못보고 남의 허물이나 찾는 자들이 너무 많다. ‘조선에서의 학살’이 미국에서 금지조치가 풀려 처음 전시되었을 때는 1980년이었다. 주한미국군사령관 존 위컴(John Wickham)의 작전지휘 아래 전두환이 광주에서 민중들을 학살한 5.18이 일어난 바로 그 때가 1980년이다.


1969년 6월 9일(일요일) 경향신문 기사

이 그림은 한국 내는 당연히 금기시되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은 그림의 원작 뿐 아니라 화집의 도록으로도 이 그림을 소개하지 못하게 금지시켰다. 1960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피카소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피카소’라는 상표의 크레용의 이름을 ‘피닉스’로 강압적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진실을 규명하지 않고, 사회를 바꾸지 않는 이상 직간접적인 학살은 주기적으로 계속된다. 50년에는 양민학살로, 80년에는 광주학살로, 2014년에는 바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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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친 인생, 노가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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