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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ul 21. 2018

영화 같은 삶으로 찾아온 판화가 배운성

극적으로 돌아온 46점의 그림들


순수한. 어린아이. 개구쟁이 같은 화가 배운성의 삶은 참 극적이었다. 현실에서 잘 일어나기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그 중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그의 작품이 낯선 한국에 소개된 일이다. 1999년, 프랑스의 벼룩시장. 유학생 전창곤은 벼룩시장 구석에 거기 먼지 때 묻은 익숙한 그림들을 수십 점이 발견했다. 호기심이 생긴 그는 혹시나 해서 서울의 미술 잡지사에 사진을 보냈다.


팽이 돌리는 아이들 1930년대

알고 보니 이건 진정한 로또였다! 그 그림들은 전설 속에 도판으로 만 남아있던 배운성의 작품이었다. 그림을 알아본 한국인 컬렉터는 서둘러 한국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유학생과 컬렉터는 콩닥콩닥 가슴을 졸이며 모든 그림에 풀 배팅. 그렇게 배운성의 그림 46점은 극적으로 한국으로 귀환했다. 이 46점의 그림은 배운성이 1940년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앞두고 프랑스에서 도피하다시피 나올 때 두고 온 167점 중 일부였다. 


월북화가 배운성, 원래 그는 1988년 월북화가의 작품들이 해금되기 전까지 우리에게 없어진 존재였다. 최초의 한국 미술 유럽 유학생. 최초로 김일성 주석의 초상을 판화로 형상했던 화가. 그의 작품이 이렇게 극적으로 돌아올 줄이야.


우연히 예술에 눈을 뜬 소년


배운성은 1901년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아 수공업을 했다. 불행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고 고아가 된 그는 만석꾼 백인기의 머슴이 된다. 생애 최초 인생극장은 여기서 시작된다. 운 좋게도 배운성이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과 함께 말동무 겸 몸종으로 유학길에 따라가게 된 것이다.


배운성과 백명곤은 처음에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백명곤은 다시 독일로 유학행을 떠났고 배운성도 동행했다. 그들은 긴 항해를 마치고 프랑스 남부 마르세이유를 거쳐 1922년 3월 독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런데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배운성 인생의 반전이 일어난다. 기나긴 여정 중 우연히 들린 프랑스 마르세이유 박물관에서 예술에 눈을 뜬 것이다. 배운성은 그 때 인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마르세이유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본 레오나르도의 나체화 같은 것은 특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아담한 박물관의 분위기가 나의 본능 속에 깊이 잠복하고 있던 예술 의욕을 자극하여 처음으로 나의 예술에 대한 야심이라고 할는지 본능이라고 할는지 그런 것을 일으켜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까지도 경제학 전공을 목적하였던 나는 급거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화가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나는 내 일생에 있어서 마르세이유의 하루를 잊지 못할 것이다." <배운성, 벙어리 화백과 부르노 고성 <문화일보> 1947.3.19>


팔레트를 든 자화상 유화 1933년


배운성은 전공을 바꿔 경제학이 아니라 미술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22년 베를린에서 데생과 유화 공부를 시작해 벙어리 노화가에게 개인지도를 받으며 결국 1925년 베를린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도중에 주인집 아들 백명곤은 병이나 귀국했지만 그는 홀로 미술공부를 계속했다.


배운성의 미술활동은 1927년 파리의 살롱 도톤 공모전에 목판화 <자화상>이 입선한 사실이 소개되며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3년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미전에서 출품한 ‘밀림’ ‘여인의 초상’ ‘자화상’은 1등상에 올랐다. 배운성은 이후 파리에게 개인전을 열며 유럽화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민족을 사랑한 화가


배운성은 우리의 풍습과 민속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네뛰기, 널뛰기, 팽이치기 같은 전통놀이부터 무희, 고수, 박수 모자를 쓴 자화상, 정겹고 고즈넉한 조선 풍경화까지 그의 작품에는 민족에 대한 사랑, 고향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유학 중에도 우리 것을 많이 생각했다.


"양화를 배운다고 해서 꼭 서양 고전만 공부해야 된다는 법은 없겠지요. 양화를 완전히 우리 것으로 하려면, 서양 고전만으로도 안 되겠지요. 회화의 본질에 있어서 동서 양쪽 것 중에서 서로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친구 쿠르트 룽애는 그가 그리고자 했던 작품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배운성은 유럽이 자기가 꿈꾸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의 조국 한국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심지어 한국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유럽인들에게 자기 조국의 미를 우선 그림으로 보여줄 것을 사명으로 그렸다” <쿠르트 룽애, 배운성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다, 문화서적출판사, 다름슈타트, 1950, 김복기>


가족도 유화 140x200cm 1931~35년 개인 소장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대표작은 <가족도>다. 가족도는 근대 문화유산 중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제인 등록문화제 제534호다. 가족도에 등장하는 17명은 배운성이 머슴으로 살던 백인기의 식솔들이다. 색동옷을 입은 귀여운 아이, 왠지 어색한 서양 품종의 개, 정면을 무뚝뚝하게 바라보는 가족들, 왼쪽 구석에서 홀로 다른 곳을 응시하는 배운성 등 당시 양반가의 근대적 풍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인 이름으로 국제미술전을 참가하고 민족 정서를 노래하는 그를 일본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더욱이 그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났던 베를린 올림픽 때 동아일보 현지 특파원이었다. 결국 배운성은 일본 첩보원의 협박과 권유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안타깝게도 일제 말기 친일 부역행위를 하게 된다.


북한의 국보급 판화가


다행히 배운성의 인생은 해방을 맞아 다시 반전한다. 배운성은 일제 잔재 철폐와 민족 미술 건립을 중점에 두고 미술 교육에 매진했다. 최근 미국에서 발견된 미군정 시절 문서, 조선종합예술학교 설립 계획안(Plan of Establishing Chosun Arts Academy. 1947.01)은 당시 배운성이 미술, 음악, 연극, 드라마, 무용 등 예술 분야에서 우리 문화를 더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비록 미군정이 예산을 지원하지 않아 조선종합예술학교 설립은 무산되었지만 그 토대로 1949년 홍익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배운성은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초대학과장을 역임한다.


동시에 배운성은 해방 직후 좌익 활동을 본격화한다. 그는 이쾌대, 정종녀, 정현웅 등 월북했던 다수의 미술과 들과 함께 보도연맹 성원이었다. 초창기 좌익 활동으로 체포되었지만 이승만과 절친했던 윤을수 신부의 도움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북측 자료에 따르면 배운성은 1947년부터 자신의 회화연구실을 좌익 활동의 비밀 아지트로 제공했으며, 개인 전람회를 열어 번 돈과 집을 담보로 50여만 원을 후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 이정수도 유명한 여성 사회주의자로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이정수는 국문학자이자 남로당 중앙위원 및 문화부장을 역임했던 김태준의 비서였다. 이들은 김태준이 한 때 배운성의 집에 기거할 정도로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 배운성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후 북측 조선미술가동맹에서 활동하다 서울이 수복되자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북으로 올라간 후 배운성은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북한 판화 예술의 이론과 실천에서 독보적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러한 눈부신 활약으로 배운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현재 그의 맏아들 배경운도 대를 이어 평양미술대학 졸업 후 판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북한은 배운성의 작품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배운성의 작품 형식은 간명하고 회화적 언어 구사에 통속성이 충분히 보장되어 있었다. 구성이 복잡하지 않고 중심이 또렷하며 불필요한 세부를 생략하고 여백을 잘 살려나간 것은 그의 작품의 간명한 형상을 조건 짓는 기본 요인이다. 배운성 판화들의 간명성은 장식적 요소를 내포한 듯한 함축된 형상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선으로 화면 전체를 통일시킨 판화에서 색은 보조적인 표현수단이 되었지만 선에 못지않게 주제 내용을 직관적으로 선명하게 밝혀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 평양 문학예술출판사 1999>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는 민족의 정겨운 풍경를 그린 배운성의 작품을 다 볼 수 없다. 행복한 표정으로 친정집을 찾아가는 젊은 여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목판화 <나들이> 등 북한의 국보급 작품이 우리를 아직 기다리고 있다. 그의 생애처럼 극적으로 다가온 평화와 통일의 시대, 하루빨리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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