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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Sep 06. 2018

대중의 감정과 함께 호흡한 예술가, 정현웅

삽화가이자 편집자의 길을 걷다


회화는 전시회에 고상하게 걸린다. 반면 삽화는 보통 양념 취급 받는다. 신문지 한켠에 4컷짜리 만화는 어느집 냄비 받침으로 나뒹군다. 그 삽화에 몰두한 화가. 치열했던 식민시절 삽화계의 거장이라 불렸던 정현웅 화백을 소개한다.


"순수 회화와 삽화가 다른 것은 그림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위치에 있다. 삽화는 말하자면 쓰레기 속의 미술이요, 처음부터 미술인 체 내세우는 미술이 아니다. 벽에 걸 것을 목적하고 그리는 것도 아니고, 병풍을 목적하고 그리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신문 위에 실렸는가 하면, 저녁에는 거리에 굴러다니면서 행인의 발밑에 짓밟히거나, 반찬거리를 사러가는 아이의 싸게지가 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은, 항상 움직이고 있는 세상의 활발한 현역품으로서의 역할을 가진 곳에 그 가치가 있고 흥미가 있다."  정현웅 <삽화기> '인문평론' 6호 1940.3


정현웅, 소녀, 1928, 캔버스에 유채, 45×34cm, 유족소장

사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거의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을 할 정도로 훌륭한 재능을 가진 화가였다. 그럼에도 그는 1935년 동아일보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37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한 후로 그는 조선일보에 취직하여 수많은 소설과 신문에 삽화를 그렸다.


이무영의 소설 <먼동이 틀 때>, 장혁주 소설 <여명기>, 김말봉 소설 <밀림>, 함대훈의 장편소설 <무풍지대>, 구본웅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광수 소설 <사랑>, 이효석 단편집 <황제>, 이무영 창작집 <흙의 노예>, 박태원 <삼국지>등의 삽화가 모두 정현웅의 작품이었다.


그는 1945년 해방 직후부터는 서울신문사 시사교양지 <신천지>의 편집장을 맡았다. 그때부터 그는 거의 붓을 놓았다. 대신 조선미술건설본부 서기장으로 활동하면서 디자인과 편집의 개념이 없던 시기 많은 문인들의 책을 도맡아 출판했다. 당시 그의 그의 삽화나 표지 디자인은 일본의 수준을 뛰어넘었으며 최고로 인기가 높았다. 


아이들을 위한 만화를 그리는 화가


정현웅은 삽화 뿐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만화도 많이 그렸다. 그림 중에는 특히 위인전이나 동화가 많았다. 그는 1935년 4월 <소년중앙>에 실린 만화 <속았다>를 시작으로 <콩쥐팥쥐> <아리바바> <홍길동> <노지심> <베토벤> <뀌리부인> <걸리버 여행기> <꿈나라의 아리쓰> <로빈손 크루소> 등 여러 편의 만화를 그렸다. 


아래 <콩쥐팥쥐>는 해방기에 그린 작품이다. 아래 그림은 원님의 지시로 잔치집에 왔다가 신발을 잃어버리고 간 콩쥐를 찾는 장면이다. 귀엽고 단순화된 디자인으로 인물이 생동감있게 잘 묘사되어 있다. 일제 시기를 거쳐 한글을 잘 모르는 어린이들이 한글을 쉽게 배울 수 있게 도와주려는 의도도 보인다. 


정현웅, 콩쥐팥쥐

102. 사령들은 방아찟는 콩쥐를 보드니 "저 방아 찟는 색시 신켜보세!" "저런 색시가 신었을리 없지"  "그래두 신켜나봐!"

103. 허허 실수로 신켜보자고 불러냈읍니다. "여보! 맞을리는 없다만은" "이 신발 좀 신어보슈"

104. 그랬더니 "어렵쇼!" "이게? 대관절" 


<키대보기>는 1948년 아동문학가 윤석중의 동시집 <굴렁쇠>의 삽화를 1963년 정현웅이 다시 그린 작품이다. 유아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린 그림에서 아이들이 정말 뛰어노는 것 같다. 2002년 남북문화축전 때 남북교류를 통해 남쪽에 전시를 했을 때 원작자 시인 윤석중씨는 '예술의 환생'이라고 반겼다.


정현웅, 키대보기, 1963년, 평양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누구 키가 더 큰가
어디 한번 대보자
올라서면 안 된다
발을 들면 안된다
똑같구나 똑같애
내일 다시 대보자
윤석중 作, <키대보기> 



정현웅은 아이들에게 늘 쉬운 그림으로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그는 그의 예술관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이란 결코 고원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을 인민의 손이 다다를 수 없는 고원한 자리에 모셔놓고 고매한 이론으로 신비의 ‘베일’을 씌워놓은 것은 이념론자와 형식주의자의 소행이었다. 예술은 항상 인민의 생활 속에서 생활하고, 인민의 감정과 더불어 호흡해야 한다.” 정현웅 <주간서울> ‘틀을 돌파하는 미술’ 1948.12 


친일파에서 복권되다


정현웅은 생계를 위해 삽화를 그려준 혐의로 친일 혐의를 받는다. 하지만 차남인 정지석씨의 노력으로 식민시절 저항했던 그의 삶이 드러나며 복권을 받는다.


그의 대표적인 식민지 시설 회화 작품은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 <대합실의 한 구석>이다. 당시 이 작품은 ‘일제의 굴레에서 살길을 잃고 만주의 북간도 같은 데로 떠나게 된 한 빈민가족의 절망적인 현실을 주제로 한 작품’, ‘고뇌에 가득 찬 인물과 뒤통수를 째려보는 감시인을 그린 이 작품은 식민지시대 사회현실을 압축한 걸작’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정현웅, 대합실의 한 구석, 1940, 유채

결정적으로 정현웅의 <黑外套(흑외투)>는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사상적으로 불순하다는 이유로 철거된다. 이 사건을 겪고 정현웅은 붓을 꺾고 다시 서양화를 그리지 않겠다 결심한다.  


정현웅은 일본군에 입대한 한국인의 무용담에 대한 삽화를 요청 받았지만 거절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원로 만화가에게 “좀 있으면 세상이 바뀝니다. 좀 자중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라며 책망을 했다. 당시 원로만화가는 ‘일본 경찰의 사기가 이토록 등등한데 어쩌자고 저런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인가’라고 정현웅을 회고했다.


북으로 향한 화가의 꿈


해방 후 정현웅은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기장으로 활동하며 친일 미술인을 제외시키는 작업에 열성을 다한다. 하지만 그는 점차 남한의 혼탁한 미술계에 환멸을 느꼈다. 결국 이상으로 간직하던 민족적 사회주의 실현이 눈 앞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그리며 가족을 남겨두고 북으로 향했다.


정현웅은 북한에서 활동하며 국립미술제작소 미술부장으로 조선노동당 제3차전원회의 회의장 장식을 주도했다. 물질문화보존위원회 출반부장으로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모사하는 사업을 주도하며 황해도 안악 1~3호분 벽화를 모사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출판화분과 위원장으로 <누구 키가 더 큰가>, <미제의 남연군묘도굴>, 삽화 <토끼전>, <청개구리에 대한 이야기> 등을 그렸다.


정현웅, 청개구리이야기1, 1959, 36.3x27.8,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북한 <통일신보>는 2016년 정현웅 화백에 대한 기사에서 "우리나라 출판화 미술분야의 재능있는 화가들 중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 정현웅이다"이라며 "그는 유럽의 이름난 삽화화가들을 능가하는 재능있는 삽화화가이며 수채화, 유화에도 능숙한 미술가였다"고 평가했다.


그 중 수채화 <누구 키가 더 큰가>는 국가미술전람회 1등 작품으로 "어린이들의 행복한 모습, 동심세계를 생동하고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착상이 기발하고 구성이 간결하며 부드럽고 친근한 묘사는 어린아이들의 생활을 그렸으나 어른들도 너무 신통하고 재미있어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식민지 시대, 조선의 진보적인 화가는 정하보, 정현웅, 김주경 3명뿐”이라는 북한 조선미술가동맹에서 발간한 <조선미술사>의 평가처럼 그는 그의 이상을 북에서 마음껏 펼쳤다.


예술작품은 어려울 것 같다는 선입관이 있지 않은가? 작가만의 세계가 있어야할 것 같고 평론가가 그것을 해석해줘야할 것 같다. 회화는 특히 그렇다. 가끔은 이해하기 어려울수록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비싼 값을 주고 받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틀을 돌파하는 미술’을 추구한 정현웅 화백의 작품이 전하는 철학이 남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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