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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Sep 06. 2018

내가 왜 민족을 사랑하는 줄 아느냐? 근원 김용준

원숭이에 가깝다


근원(近猨)은 김용준의 아호다. ‘원숭이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 뜻이 재밌다. ‘평생 남의 흉내만 내다 겨우 죽어버릴 인간’이라며 스스로를 근원이라 낮춰 불렀다. 그래도 사람의 호에 원숭이 원자를 쓸 수는 없다고 해 결국 근원(近園)이 되었다.


김용준은 본업은 화가였지만 글솜씨도 탁월했다. 그가 1948년 수필집 <근원수필>을 내자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 수필은 김용준”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수필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이 작품은 1989년 문화공보부 추천도서로 지정되었고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다. 월북 작가의 작품 중 흔치 않은 경우다.


김용준의 수필집 <근원수필> 1948, 을유문화사


그에게 수필은 “다방면의 책을 읽고 인생으로서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글”이었다. 동시에 “마음속에 부글부글 괴고만 있는 울분을 어디 호소할 길이 없어 가다오다 등잔 밑에서, 혹은 친구들과 떠들고 이야기하던 끝에 공연히 붓대에 맡겨 한두 장씩 끄적거리다 보니 그게 그만 수필이었다”고 한다.


김니콜라이


김용준의 대표작 <근원수필> 中 ‘김니콜라이’를 한편 소개한다. “기미운동 직후였다. 우리들 젊은 학도에게는 자국어보다는 외국어 공부가 무조건 재미났다. 고리타분한 조선 소리보다는 양곡(洋曲)이 물론 듣기 좋았다. 떨며 넘어가는 바이올린의 멜로디가 하필 알아서 맛이 아니라 덮어놓고 신이 나고 그것을 듣는 것만 하여도 한 행세 거리인 것만 같았다.


어느 달 밝은 여름밤. 종로 청년회관 무대 위에는 김 니콜라이가 나타났다. 노령 해삼위 출생이라든가 아무튼 바이올린의 명수였다. 김 니콜라이는 등단하기도 전에 콩나물같이 박힌 관객석에서 쏟아지는 우뢰 같은 박수 소리에 목욕을 했다. "김 니콜라이!" 얼마나 아름다운 호화판으로 된 이름인가. 우리는 그 이름부터가 호화판으로 신식인 데 홀렸다.”


김용준은 수필을 통해 “신식이란 무조건하고 좋다는 것. 조상이니 예의니 윤리니 하는 따위는 헌신짝같이 내던져야 한다는 것. 이러한 새 세대의 진리를 확실히 파악하게 되었다.”며 자기를 잃어버린 시대상을 비판했다.


그가 요즘 세태를 보면 어떨까 싶다. 에드리안 성, 김 세레나 같은 영어 이름 짓기는 어느새 당연해지고 영어 브랜드가 아니면 집도 옷도 차도 촌스럽게 취급한다. 그 나라의 언어는 정체성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정체성은 곧 민족성이다. 민족성이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버린 요즘, 잔잔한 그림과 유려한 수필로 근원 김용준은 “당신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괭이 새끼라도 되리라


김용준은 민족성이 남다른 화가였다. 그의 민족성은 도쿄 유학시절 졸업작품 <자화상>에 잘 드러난다. 흰색 무명 저고리에 진녹색 조끼를 입은 자화상의 굳게 다문 입에서 그 마음이 느껴진다. 


김용준, 자화상

그는 1934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대항하여 일제 관치미술에 반대하는 ‘목일회’ 조직에 동참했다. 동시에 도쿄 미대에서 배운 서양화를 내려놓고 동양화로 전환했다. 단순히 기술적으로 화풍을 바꾼 것이 아니라 민족성을 지켜야한다는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결단이었다. 말이 쉽지 당시 중년인 36살 때 전공을 바꾼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수필 <서글픈 취미>에는 당시의 소회가 잘 담겨있다. “…간편한 먹과 종이 놀음으로 서른여섯에 길을 바꾸어서 앞으로 십 년, 넉넉잡아 오십까지면 설마 화호불성(畵虎不成)에 괭이 새끼라도 되리라” 서울중앙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 그는 그렇게 학생들에게 동양화를 가르치기 위해 유명 서예가를 찾아가 사군자를 배웠다.


조선미술대요


“미술이란 결코 사업도 아니요, 학문도 아니요, 자연의 모방도 아닙니다. 인생의 최고한 유희, 인생을 윤택하게 해주는 엄숙한 정신적 유희입니다. 유희이면서 경솔히 할 수 없고, 흔한듯 하면서 귀한 것이 미술입니다. 이렇듯 귀한 미술이기에 우리는 진정한 예술가의 출현을 바라고, 진정한 예술가를 존경할 교양을 또한 가져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 인류사회에서 미술을 뽑아버려 보십시오. 세계는 그날부터 사막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김용준, 미술, 조광(1938.8)>


김용준은 해방공간에서 대단한 예술계의 거물이었다. 화가이자 문인, 미술사학자이자 책편집인으로서 다방면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1946년 서울대 미대를 탄생시킨 주역이었고, 수묵채색화 분야 교육 체제를 성립킨 미술인이었다. 


그는 조선화의 표현기교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선미술역사를 연구에 몰두했다. 특히 재치가 넘치는 화조화와 산수풍경화에 깊은 관심을 돌렸다. 조선화에 대한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시작한 미술 평론은 한국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미술사학자 ‘최열’은 그를 “20세기 미술사상 가장 빼어난 문장력을 갖춘 미술인으로 미술계에 심미주의 및 상고주의를 확립시켰으며, 미술사론과 비평, 수필을 아울러 엮은 5권의 『근원 김용준 전집』이란 불후의 노작을 남기고 간 20세기 미술계의 거목”이라 평가했다.


김용준 전집은 제1권 근원수필, 제2권 조선미술대요, 제3권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 제4권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제5권 민족미술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월북화가 김용준


김용준의 월북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해방 후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는 길은 민족주의 노선인 애국애족심에 있다’는 그의 신념 뿐이다. 그는 특히 소련, 미국과는 다른 우리 민족의 길, 통일을 주장하며 예술에서 역시 민족성을 바탕으로 한 ‘조선의 개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1950년 9월 28일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UN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전 부인, 딸과 함께 평양으로 월북했다. 월북한 김용준은 바로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1951년에는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 위원장, 조선건축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김일성 주석의 표창장을 수여받고, 1967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4년 12월 13일 북한 ‘통일신보’는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았다'는 기사로 김용준을 소개하며 ‘조선화의 과학이론적 기초와 실기연습을 원리화 하는데 기여했다’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의 대표작은 북한에 있는 <춤, 1957>이다. 우리 전통 미술의 고유한 표현 기교가 남김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춤>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천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이 작품에 대해 잡지 ‘소비에트문화’는 “구속됨이 없이 흥에 겨워 춤을 추며 돌아가는 꽃다운 무희의 극히 시적인 형상이 우리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김용준, 춤, 1957, 171 x 86cm, 원작은 1957년 단오지난지 3일날 제작하였으나 망실, 1958년 재제작

이 작품은 조선화 특유의 여백의 미가 잘 살아있다. 사선을 응시하는 그윽한 눈빛, 휘날리는 하얀 춤사위, 절제되면서 기품이 있는 동작, 버선코가 비치게 살짝 올라간 무릎을 표현한 그 기법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작품이다.


다음 작품은 한국에서 소장하고 있는 <매화, 1948>다. <근원수필> 중 ‘매화’를 읽다보면 저절로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 “고동(古銅)의 빛이 제아무리 곱다 한들, 용천요(龍泉窯)의 품이 제아무리 높다 한들 이렇게도 적막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핀 그 앞에서 나의 환상은 한없이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나는 매화와 석불과 백사기의 존재를 모조리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잔잔한 물결처럼 내 마음은 다시 고요해집니다.”


김용준, 매화, 1948, 종이에 수묵, 26.5x18cm, 개인소장

그의 작품을 보다보면 민족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민족의 흥망성쇄와 함께 빛나는 민족의 고유한 성질. 그 민족성이 꽃필 판문점 선언 시대, 민족의 전성기를 흐뭇하게 바라볼 근원 김용준 선생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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