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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Oct 05. 2018

식민지 문화정책을 거부하고 사실을 탐구한 길진섭

데스 마스크를 만든 남자


천재시인 ‘이상’이 27살의 나이로 도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도쿄 유학생 예술가 20명이 비보를 듣고 모여들었다. 화가 길진섭은 거기서 ‘이상’의 데스마스크를 떴다. 데스마스크는 사람이 죽은 직후에 석고로 얼굴 본을 떠 만든 안면상이다.


길진섭 자화상 1932 유화 도쿄미술학교졸업작품

시인이자 번역가 김소운은 “굳은 뒤에 석고를 벗겼더니 얼굴에 바른 기름이 모자랐던지 깎은 지 4, 5일 지난 양쪽 수염이 석고에 묻어서 여남은 개나 뽑혀 나왔다. 그제야 ‘정녕 이상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한세기를 그리다-101살 현역 김병기 화백의 증언, 한겨레>


당시는 사람 얼굴 윤곽을 데스마스크로 남겼다. 백범 김구 선생이 저격을 당한 당시에도 주치의가 김구의 데스마스크를 뜨게 했다. 사진과 영상이 잘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더 그랬다.


사실주의 화풍


길진섭은 본질을 추구하는 사실주의 화풍을 추구했다. 길진섭은 간결한 기법으로 세밀함에 구애 받지 않으며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지점을 예리하게 잡아내어 인상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을 많이 그렸다. <북녘작가의 그림여행 16 中 간결한 필치로 심리적 충돌을 예리하게 일반화한 길진섭 화백>


길진섭은 1930년 도쿄에서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고 김환기와 함께 1936년~37년 백만전(白蠻展)이라는 그룹 전시회를 개최한다. 


길진섭 어선 1936 도쿄국립신미술관


당시 함께했던 김병기 화백은 “백만(白蠻)은 ‘하얀 오랑캐’라는 뜻이다. 우리 민족을 염두에 둔 작명이라고 생각한다.. (길진섭의) 선에 속도감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 기질의 표현이라고 본다”고 분석했다.


또한 “길진섭의 <어선, 1936>이나 <선인장과 소녀, 1937> 같은 작품을 보면 있을 것은 다 있으면서 대상으로 본질만 표현하려 했음을 알게 한다.”고 평가했다.


정지용과의 우정


길진섭은 향수로 유명한 정지용 시인과도 각별한 사이였다. 1930년대 길진섭과 정지용은 문학 단체인 구인회와 미술 단체인 목일회의 교류 시절 부터 알고 지낸다. 둘은 화가 김환기의 결혼식에서 함께 사회를 볼 정도로 각별했다.


1940년 정지용은 길진섭과 함께 산문집 <화문행각 畵文行脚 >을 발표한다. 둘은 평안도와 단둥을 여행하며 한 사람은 글을, 한 사람은 그림을 그리며 각별한 우정을 과시한다.


“평양에 나린 이후로는 내가 완전히 길吉을 따른다. 따른다기 보담은 나를 일임해 버린다. 잘도 끌리어 돌아다닌다. 무슨 골목인지 무슨 동네인지 채 알아볼 여유도 없이 걷는다. 수태 만난 사람과 소개인사도 하나 거르지 않었지마는 결국은 모두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만다.「화문행각 畵文行脚 7-평양 1」


길진섭과 정지용은 『문장 文章』이라는 문학잡지를 출간하며 일제 식민지 최후의 문학적 보루 역할을 함께 담당했다. 


식민지 문학의 보루 『문장 文章』


『문장 文章』의 기획 디자인을 총괄한 길진섭은 표지에 민족적 미감에 맞는 미술적인 장식과 의장을 새로 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그는 고심 끝에 굵은 느낌의 행서체의 추사 김정희의 서체를 창간호(1939.2)의 표지로 선택했다.


문장 제2호

길진섭은 문장 창간 호 편집 후기에서 "우리의 명보(名寶) 추사의 수선이 그만 인쇄기술에서 그 청렴한 맛을 잃게 된 것은 미안한 일이다. 앞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느껴온 상업 미술의 의미에서의 표지가 아니고 한 개의 작품으로 표지를 살려 나갈 작정이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문장 제2호(1939.3) 표지를 그리고, ‘사생과 감정’ 이라는 글도 섰다. 이 글에는 길진섭이 가진 전통과 새로운 미술에 대한 고민이 잘 담겨있다. 


“산수山水를 그리여 내 맘이 만족滿足할 수도 없고 화초花草를 임미테- 하는데 나의 사상思想이 없는듯하다. 차라리 콩크리트 우에 떨어지는 철사의 음향音響이 내 귀의 감촉感觸으로부타 화필畵筆에 흐를 상 싶다. 모든 과거의 고전古典이 다시 우리들의 머리에서 돌아 나오나 그러나 새 시대時代와 새 미의식美意識에서 진전進展한다.” <길진섭, 「사생寫生과 감정感情」, 『문장』, 1939. 3.>


실제 길진섭은 서양화를 그리면서 조선색과 선에 대한 고려는 물론, 『문장』의 표지를 담당하면서 조선 고전의 색감과 정조를 탐구하려 노력했다. <길진섭, 「여묵」, 『문장』, 1939. 4.>


3.1 운동 민족대표 길선주 목사


길진섭의 민족의식은 집안 환경의 영향도 컸다. 그는 평양에서 개화사상과 민족독립 의식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길진섭의 아버지 길선주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양 장대현 교회의 목사였다. 어머니는 신선행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길진섭 어머니의 초상 18X34 1955 유화

이러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길진섭은 초기 미술을 배우던 당시는 몇 차례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도 하지만 본격적인 화가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선전을 거부하게 된다. 조선미술전람회 즉 선전은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그 시절 화가의 등용문 같은 곳이었다. 


선전 출품을 거부하고 길진섭은 화가 김용준, 구본웅, 김응진, 황술조 등과 함께 목일회(牧日會)를 결성했다. 조선총독부는 목일회의 이름에서 반일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이유로 불온하게 여겼다. 재야미술의 성격을 띈 목일회는 서양화가 단체였지만 전통미술에 대한 탐구를 통해 서양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해방 후 걸은 길


길진섭은 해방 공간에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선전미술대 대장, 서울대학교 미술과 서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맹렬히 활동했다. 당시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를 둘러싸고 미술계 최대 단체인 조선미술가 협회 내부는 시끄러웠다. 조선미술가협회 대표 고희동이 이승만의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발한 길진섭, 정현웅, 김기창, 이쾌대 등 32명은 조선미술가협회를 집단 탈퇴했다.


길진섭 심령목장에서 1954

이들은 1946년 조선조형예술동맹을 결성하고 길진섭은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조선조형예술동맹은 일제시대 활동했던 중진급 미술가들이 대거 가입하면서 회원이 89명에 달했다. 그만큼 많은 미술가를 포용할 정도의 대중적 단체였다. 이후 조선조형예술동맹은 진보적 색체를 띄는 조선미술가동맹과 통합하여 조선미술동맹으로 재출범한다.


길진섭은 1947년 4월 서울대에서 과감히 퇴직한다. 이후 월북을 단행한 길진섭은 해주에서 열린 1948년 8월 북한 정부 수립의 토대가 되는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한다. 


당시는 이승만 정권이 선포된 조건에서 남측에서 공개선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남쪽 조선미술동맹 대표로 참가하여 최고인민회의 제1기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북한에서 평가


북한의 통일신보는 길진섭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통일신보는 2014년 12월 6일 길진섭을 '사실주의 유화발전에 기여한 화가'라며 "미술행정사업과 창작지도사업을 맡아 하면서 전쟁승리를 위해 자신의 지혜와 열정을 다 바치었다"고 회고했다.


대표작 '전쟁이 끝난 강선땅에서(1961)'는 1960년대 북한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통일신보는 "인민을 믿고 그 힘에 의거하여 전후복구건설도, 사회주의건설도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위대성과 한없이 소박하고 겸허하신 품성을 사실주의적으로 생동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길진섭은 북한에서 국립미술제작소 소장,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 조선미술가동맹 상무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동시에 북한 미술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론적 토대를 쌓기도 했다. 


끊임없이 사실과 본질을 추구한 길진섭의 작품은 과연 나중에 한국에서 어떻게 평가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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