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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Dec 07. 2018

인생의 보물

청춘,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을 위해③


10년 전 이 맘 때 쯤인 것 같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 차가운 바람이 폐부를 깊숙이 찌르던 늦은 가을날. 나에게 

평생 소중히 간직할 보물 하나가 생겼다.


몸담고 있던 동아리 회장 임기도 끝나고, 학생 운동에 대한 의지도 부족해던 당시.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해외봉사활동을 떠나버린 대학 3학년 여름이 지나갔다. 하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학생회를 해보겠다는 마음이 생겼고, 다시 돌아왔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우리 단과대학 학생회실은 말 그대로 쓰레기장이었다. 나는 청소를 시작했다.


"간부들 다 도망갔던데. 너 왜 갑자기 학생회실을 청소하냐? 너 혹시 학생회 출마 하냐?"


예전에 학생회 활동을 잠시 하다만, 지나가던 선배의 말이었다. 그렇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학생회장을 결심한 것이다. 우선 닥친 일은 가을 축제였다. 동아리들을 모으고, 설득하고, 얼러서 가을 축제는 나름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다.


어느 덧 총학생회 선거 공고가 곳곳에 붙고 선거철이 다가왔다. 우리 단과대에는 선거관리위원장도, 선거를 치를 사람도 없었다. 결국 나 혼자 선거공고를 만들어서 붙였다. 후보가 선거관리까지 하는 총체적 부실(?) 선거였다. 

선거관리까지는 혼자 할 수 있었지만 런닝메이트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희망 한 줄기 민중가요 노랫소리가 들렸다. 과거 노래패 활동을 하다 다시 대학에 들어온 선배였다. 


나는 정성스럽게 편지를 썼다. 우여곡절 끝에 8살 많은 부회장 후보와 단대 선거에 출마하게 됐다. 하얗게 눈부시던 대강당 후보 추대대회 무대 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창출하자!" 그렇게 내 보물이 탄생했다. 바로 학생회 정책공약집.


요즘 학생회 선거처럼 기획사에 맡긴 화려한 편집은 아니었지만 노란색 표지에 하나하나 꼭 지킬 수 있는 약속을 적어 넣은 공약집이었다. 한 명 한 명 만나가며 필요한 공약을 물어보고, 하루하후 쳐다보며 공약 완수를 다짐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공간 혹은 물건이 있기 마련이다. 300명 밖에 안되는 작은 단과대지만, 사람들을 책임지고 만나고 사랑하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책임졌던 보물이다. 


정책공약집에 담긴 가장 큰 고민은 학생회에 대한 인식부터 바꾸는 것이었다. 대다수 학생들은 몇 년 동안 학생회가 제대로 건설되지 않아 학생회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 스스로 학생회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게 모든 것을 새롭게 참신하게 접근해야 했다.


공약집 첫머리에 무엇을 담을까 고민하다가 생각한 것은 바로 체육대회였다. 그나마 학생들이 아는 학생회 행사는 체육대회이기 때문이다. 해년 마다 식상해 참여율도 저조한 상황이라 어떻게 하면 전체 학생들이 즐겁게 참여할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였다.


체육대회가 잘되기 위해서는 참가 의욕을 높이고 경쟁심을 유발하는 방식이 필요했다. 학년별 대항도, 상품 수여도 딱히 동기부여가 높지는 않았다. 그래서 찾아낸 방식은 라이벌 학교의 같은 전공 단과대학과 체육대회를 하는 것이었다. 연고전은 서울에서는 흔한일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드문일이었다. 


바로 다음날, 체육대회를 할 학생회장을 찾아갔다. 내 제안은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라 흔쾌히 동의를 얻었다. 의기투합을 한 우리는 학교를 설득하기로 했다. 우리 단과대는 당시 수업이 빡빡하기로 유명했다. 그전까지 체육대회도 수업이 없는 평일 반나절이나 토요일에 하는 행사였다. 교수님 사업이 꼭 필요했다. 교수 대항 배구대회도 제안하고, 단과대 학장님과 협의하여 수업을 빼고 결강사유서까지 받아내었다.


드디어 행사 당일, 학교 버스를 지원받아 거의 전체 단과대 학생들을 데리고 상대편 학교에 갔다. 체육대회 열기는 뜨거웠다. 거의 응원만 하던 여학생들도 2~3종목 씩 뛰었고, 남학생들은 서로 운동신경을 뽐내느라 사활을 걸었다. 교수님들까지 나서서 체육대회는 더욱 풍성해졌다. 


우리 학교의 승리로 끝난 체육대회는 두고두고 학생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체육대회를 시작으로 학생회에 대한 결속이 높아졌다. 체육대회는 그 다음에 있었던 단과대 자치공간 협상, 학생회 선거 등의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체육대회를 시작으로 나는 임기 마지막까지 20개 가량 되던 공약을 거의 다 마무리했다. 우리 단과대학에 대한 사랑이 생겼기 때문에 학생들과 약속을 지킬 수 있었고, 약속을 지키면서 사랑은 더욱 커졌다.


사랑이 충만해질 때 사랑은 공간을 넘어 번져나간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내 친구들과 주변인들, 모임, 동아리, 학생회까지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랑은 퍼져간다. 


동아리에 들어가 정겨운 얼굴들을 마주하면서 사람의 귀중함에 대해 배우고 단과대 학생들과 마주하면서 더 큰 사랑을 알 수 있었다. 사랑은 키우면 키울수록 커지는 것이며, 그럴수록 사랑은 깊어진다.


사랑은 책임감을 동반한다. 책임감은 작게는 사람들과 약속을 지켜나가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다. 크게는 국민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키워, 국민들의 삶을 진정으로 책임지는 일이다.


선거철 만 되면 공약이 난무하는 요즘, 임기 마지막까지 공약을 다 지키고자 했던 그 교훈이 생각난다. 그 공약집을 떠올릴 때마다 국민들에게한 약속의 무게가 크다는 것을 느낀다.


아직도 내 앨범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보물을 꺼내보며 사랑의 의미에 대해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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