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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근 Aug 21. 2024

좋아한다는 것

좋아하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의 시작

 얼마 전에 친구가 유튜브 영상을 하나 보냈다. 골목그림이라는 시리즈의 유튜브 영상으로 백종원의 골목식당처럼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컨설팅을 해주는 시리즈였다. 그중에서 친구가 보낸 영상의 주인공은 정말 안쓰러웠다. 5년간 고시원에서 혼자 그림을 그렸는데 이 정도 실력이라면 취업은 고사하고 그림을 안 하는 게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해주는 유튜버가 위플래시에 나오는 선생 같은 느낌이라면 차라리 안쓰럽지라도 않은데, 너무나도 욕설 하나 없이 담담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조언해 주어 안쓰러웠다.


 친구는 이를 보고 ‘회생할 수 없는 지옥’이라고 평했다. 이쯤 되면 그만둬야 하는데, 돌아가기엔 비참하고, 혼자서 생활하다 보니 사회성은 떨어지면서 도움 받기는 점점 싫어지고, 낮아진 자존감과 사회성이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드는 악순환의 굴레라고 말했다. 차라리 현재 상황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덜 고통스럽겠지만, 이미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더 비참함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왜 영상의 주인공은 왜 그만두지 못한 걸까? 영상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대안이란 게 없으니까….”
“처음이더라고요… 이렇게까지 뭐 하고 싶었던 것이.”
”옛날에는 뭔가를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고…”


그림 외에는 좋아하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유일하게 좋아하는 그림도 다른 사람들보다 현저하게 떨어지는 걸까? 사람들은 대체로 좋아하는 것을 잘하지 않나?’



좋아함의 판별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사람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 스스로 무언가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는 어렴풋이, 느낌적으로, 그동안 살아오면서 좋아하는 것을 봤을 때의 공통적인 감각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헷갈릴 때도 있다. 내가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는 걸까?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고 나중에야 깨달았다. 사람이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자 하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그걸 뒷받침하듯 ‘어떤 펜으로 그리면 더 잘 그릴 수 있을까’, ‘어떻게 묘사를 하면 좀 더 감각적일 수 있을까’, ‘귀엽게 그리는 것은 무엇일까’와 같은 그림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림 다음으로 좋아하는 프로그래밍에 대해서는 ‘어떤 구조로 짜면 효율적일까’, ‘이 프레임워크는 어떤 면에서 다른 프레임워크들보다 좋을까’, ‘내가 이걸로 뭘 만들 수 있을까’와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던진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계속해서 알고 싶어 지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게 love든 like든, 호감이 생기면 더 알아가고 싶어 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분야와 사람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지도 않은데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반론이 있겠지만, 일단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좋아하는 걸까

 이렇듯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것을 탐구하고 싶게 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게 된다. 하지만 해당 분야의 탑이 되는 것과는 별개다. 그것은 재능의 영역이다. 단순히 좋아한다고 최고가 된다면 사회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좋아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매일 그것에 대해 떠올리고 생각하고 수행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위의 영상에서 소개된 주인공은 그림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갔다. 그린 그림들에 대한 이해도도 전혀 없고, 동양풍 옷을 그렸다고 했지만 동양의 옷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좋아했다면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옷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인체에 대해 더 많이 조사를 하고, 그리고 싶은 자세를 더 많이 찾아봤을 것이다. 좋아한다고 말 한 사람치고는 좋아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걸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모습만 보였다. 왜 좋아하지도 않은 걸 좋아한다고 한 걸까? 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이 사람이 전에 말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옛날에는 뭔가를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고…”



억제

 흥미가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그림이라는 흥미 유발 소재가 들어오면서 오랜만에 느껴본 ‘흥미’를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질문을 바꿀 차례다. 왜 흥미를 느끼는 것이 이제껏 없었을까? 나는 이 좋아함과 흥미의 결핍이 억제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억제는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감정을 억누르고, 하기 싫은 것들을 하는 그런 상황이 억압받는 상황이다. 살다 보면 좋아하지 않는 일도 해야 할 때가 온다. 학창 시절에는 아무래도 지루한 공부가 될 것이고, 성인이 되고서는 생활비를 위한 아르바이트가 될 것이며, 그 이후로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한 출퇴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자의적으로 수행이 된다. 지루한 공부는 결국에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해 하게 되고, 생계를 위한 일은 돈이 없으면 생활을 할 수 없으니 하게 된다. 조금은 사회라는 타의가 섞이긴 했지만 선택은 본인이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일에서는 억제라는 것이 오진 않는다. 억제는 완전히 타의에 의해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때 온다.


 나 역시도 스스로를 많이 억제하곤 했고, 어쩌면 지금도 억제 중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못하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바라는 일들을 하고, 감정을 표출하고 싶지만 전혀 표출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이런 시기에는 그림을 그리려고 해도 뭘 그려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혔다. 뭘 그려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전혀 실력이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개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프로젝트도 완성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고 망하기 마련이었다. 그 이후로는 사회성도 떨어지고 방에만 틀어박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그리고 생산성도 떨어지는 작업만 했다. 정확히 영상의 주인공의 수순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스스로를 억압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안으로 파고들게 된다. 사회성이 떨어지면서 우울을 겪게 되고, 우울의 원인을 없애기 위해 계속해서 찾다 보면 돌고 돌아 스스로에게 화살이 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어떤 것도 좋아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욕구로 생각해 보자. 인간의 가장 첫 번째 욕구는 의식주에 대한 욕구고, 두 번째 욕구는 안전의 욕구다. 의식주에 대한 욕구가 충족이 되어야 그다음 욕구인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고, 안전의 욕구가 충족이 되어야 그 위의 사회적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실현이 된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비유적 표현이든 직설적 표현이든,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까? 나 스스로를 안전의 욕구의 충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내가 사회적이고 싶을까? 존경을 받고 싶을까? 자아실현을 하고 싶을까?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스스로의 생존이 가장 먼저가 될 것이다. 억제라는 것은 결국에는 살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인 것이다.


 이 억제에 대해 겪어보았기 때문에 더 공감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시기가 있었기에 더 이해가 갔다. 저 사람은 지금 내적이든 외적이든 스스로를 굉장히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좋아하는 법

 그렇다면 어떻게 억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된다. 좋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어떻게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지 정말 아이러니 한 방법이다. 하지만 억제에서 벗어나고 무언가를 좋아해야지라는 발상 역시나 아이러니하다. 억제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나왔다고 해도, 좋아하는 게 없으면 다시 끝없는 자기 비난과 함께 억제 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좋아하는 법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좋아할 때 느낀 그 감각, 감정, 그때의 생각이 몸에 체화되어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법이 체화된 몸은 항상 무언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내가 느낀 그 감각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좋아함을 잊은 사람은 그게 불가능하다. 성공한 사람이 계속 성공한다는 말과 같이, 좋아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계속 좋아하는 것을 잘 찾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좋아함을 잊은 사람은 어떻게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첫 발자국은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이다. 억제가 체화된 사람은 끝없이 스스로를 비난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혐오한다. 나라는 존재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다른 더 멋진 껍질을 뒤집어쓰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이런 공상과 광기에서 만족하는 것이 멈추면 끝없이 부끄러워지게 되고, 이를 체화하면서 끝없는 광기에 스스로를 맡기게 된다. 그렇기에 더욱이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 나라는 사람은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고, 나라는 사람은 더 성장할 수 있고, 나라는 사람은 행복해도 된다는 것을 통해 말이다. 말이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이지, 사실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에게 겨눈 화살을 치울 수 있게 된다.


 스스로를 겨누고 있는 화살만 없어져도 많은 것이 바뀐다. 날카로운 끝점에 초점이 가있지 않고 더 넓은 곳을 향해 초점이 바뀌게 된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흥미로운 것들도 많이 보이게 된다. 이렇게 못 보던 것들을 보면서 흥미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런 흥미로운 것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보이게 되면서 좋아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좋아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무언가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것은 삶의 동력이 된다. 세상 모든 것을 좋아하고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많은 것을 이해하고 좋아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혐오는 적대를 낳을 뿐이고, 스스로에 대한 혐오는 자기 자신에 갇혀있는 게 아니라 결국에는 퍼지게 된다. 영상의 주인공에 대해 그저 20분짜리 동영상으로 잠시 봤을 뿐인데 정말 많은 생각이 들은 거 같고, 영상의 주인공이 스스로를 조금은 놓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놓아준 다음에는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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