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근 Aug 24. 2024

일관성과 애매함

애매함이 주는 스트레스

 일관성. 하나의 방법이나 태도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성질을 말한다. 사람들의 일관성에 대한 생각은 대체로 긍정적이다.(물론 부정적인 것에 대한 일관성은 좋게 보지 않으므로 이번 글에서는 논하지 않겠다.) ‘변함없는 사람’,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사람’ 과 같은 느낌으로 대체로 일관적인 것을 좋게 생각한다. 하지만 일관적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왜냐면 일관성을 깨고 모순적인 합리를 채택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모순을 채택하는 것은 일관성을 채택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한다고 볼 수도 있다. 각 상황들에 대해 최적으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최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은 우리가 생존하기 더 쉽게 만들어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신적 대처다. 길에 큰 금액의 현찰이 떨어져있다고 했을 때, 스스로의 사상은 남의 돈을 함부로 취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그 순간만 그 사상을 지우고 돈을 줍는다면 삶이 조금 더 풍족해질 수 있다. 스스로의 사상을 어겼다는 것에 조금 자책을 하겠지만, 그 상황에서는 다들 어쩔 수 없었을거라는 스스로의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정신적 고통을 제거하고 물질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
 
 아마 떨어진 현찰이 적은 금액이었다면, 일관성을 채택했을 것이다. 현찰을 줍는 것 보다 스스로의 사상을 지키는 것으로 조금 더 높은 도덕 의식과 자신은 일관적인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일관성을 채택하고 안하고를 고르는 시점에서 사람은 이미 모순을 채택하고 있음이 보인다.
 



 그렇다면 모순이 생산적이지만 왜 사람들은 생산적이지 못한 일관성을 더 좋게 볼까? 세상이 단순히 생산성으로만 돌아가지 않기 때문일까? 여기서 내가 생각한 이유는 신뢰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신뢰는 앞에서 봤듯이 적절한 자기 합리를 통해 무시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를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절하여 일말의 죄책감 조차도 지울 수 있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신뢰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전부 타인에서 나온다. 타인의 행동을 보고 이를 내가 적절히 해석한게 타인에 대한 신뢰감이다. 어찌보면 신뢰는 예측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높다는 것은 타인이 내가 생각하는 범주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어떻게 행동할 지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동을 예측하기 쉬운 상황은 언제일까? 글의 흐름상 당연하게도 행동이 일관적일 때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일관적인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좋게 보는 것이다. 최소한 내 생각 범위에서는 행동이 예측되고, 내가 이 사람에게 어느정도의 호의를 베풀면 그 호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이상은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기 때문이다. 럭비공처럼 튀는 사람이 아니라 농구공 처럼 튀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신뢰를 주는 것은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상대도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서로간의 신뢰라는 하나의 계약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모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일관적으로 행동하게 되면 상대가 나의 행동에 대해 모두 예측할 수 있고, 자칫 잘못하면 이용만 당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순적으로 행동하게 되면 상대에게 신뢰를 줄 수 없고, 서로간의 신뢰라는 계약은 파기된다. 그래서 보통은 애매하게 행동하는 것을 택한다. 마치 모순적이면서,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하나의 방어기제라고 볼 수 있다. 신뢰를 주는 행위 자체가 상대가 내게 신뢰를 줄 것을 기대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신뢰를 줬다가, 그에 대한 대답을 받지 못하면 상당한 좌절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최대한 상처를 받지 않고자 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애매하게 행동하는 것은 나의 상처를 상대에게 옮기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애매한 것에 스트레스를 느낀다. 애매한 것은 정해지지 않은 불분명한 것이며, 우리는 이런 감정을 추상적인 무언가를 볼 때도 느낀다. 하지만 모든 추상적인 것에서 느끼는 것은 아니다.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는 추상에 스트레스를 느낀다.
 
 추상적인 것으로는 우리의 감정들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사랑, 행복, 우울,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추상적이다. 외관적인 실체가 없고 정확하게 정해진 것이 없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에 대해서 말하면 모두가 안다. 실체는 없지만 다들 그 감정이 드는 현상을 알기 때문이다. 현상뿐만이 아니다. 그 감정들과 관련된 문학, 그림, 문서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에 대한 노래, 하트모양 그림, 분홍색, 그리고 사랑을 느끼는 상황과 같이 많은 자료들이 우리 머리속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만의 자료가 존재하고, 불분명한 것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본 것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우리가 현대 미술을 거부하는 이유와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현대 미술은 구체적인 부분들을 최대한 지우고 지워서 핵심적인 부분만 담는다. 말 그림을 예시로 들면, 우리가 말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긴 다리, 멋지게 휘날리는 갈기, 발굽 등등… 여러가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게 되면 외관적인 모습이 아니라 속성만 남게 된다. 빠름, 강인함과 같은 속성이 남게 되고, 이를 표현한게 추상적인 현대미술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속성만 보고 이를 말이라고 맞출 수 있을까? 전혀 아닐 것이다. 빠름과 강인함이라는 속성을 가진 것들은 세상에 너무나도 많다. 그렇게 추측되는 것들이 많아지고, 하나를 정할 수 없게 되면 우리는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다.
 



 이렇듯 사람은 애매한 것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느끼는데,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애매하게 행동을 하게 되면 스스로가 불신에서 오는 압박과 상처를 상대에게 전가하게 된다. 상대가 어느정도 눈치가 빠르고, 스스로에게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상대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면 그런 행동들 속에서도 공통점을 찾아 확정을 짓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스트레스를 오롯이 떠맡게 된다. 하지만 애매하다고 판단한 이상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게 애매하게 행동하는 상대의 마음을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상대가 스스로에게서 느낄 불신에 대한 두려움을 적절한 합리로 지운 것 처럼 상대가 내게 전가한 애매함에 대해서 나만의 합리로 제거를 해야한다.
 
 때로는 일관적이지 못하고 애매하게 태도를 취하는 것은 상당히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이 든다. 상대를 생각했다면, 상대가 스스로가 준 애매함에 대해 해석하면서 느낄 고통에 대해 생각을 했다면, 그렇게 행동하기란 쉽지 않을거 같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는 어느정도는 이해한다. 스스로도 불분명한 신뢰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그 고민을 지우지 못해 전가를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내가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신뢰에 부담을 느껴 상황을 회피하고자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관계란 추상적인 것이니 옳고 그름도, 정답도 없다. 각자 구체화한 방법도 다를 것이고, 어떻게 구체화를 하는 지는 스스로의 몫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애매한 태도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를 이해해줬으면하는 바람과 일관적인 태도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도 든다. 언제나 일관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신뢰하는 만큼 그 신뢰가 돌아왔으면 하는 그럼 바람이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그렇게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작가의 이전글 좋아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