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근 Sep 01. 2024

상처 핥아주기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건 독이 된다

격려와 칭찬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아래는 격려와 칭찬의 좋은 점이다.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해준다.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하고 있는 일의 완성도나 수행도를 더 높일수도 있다.

성장의 좋은 양분이다.


격려와 칭찬의 좋은 점들을 봤다면, 다음은 설탕의 좋은 점이다.

단기 기억력을 상승시킬 수 있다.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

단 맛을 통해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다.

저혈당을 막아준다.


 조금 억지스러운 면도 없진 않지만, 위는 실제로 설탕이 줄 수 있는 효능이다. 하지만 우리는 설탕이 몸에 좋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갑자기 설탕의 효능을 이야기 한 것은 설탕은 사실 몸에 좋은데 누명을 썼다고 알리고 싶어서일까? 물론 전혀 아니다. 설탕은 몸에 안좋은게 맞다. 그렇다면 위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는 바로 적정량 섭취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격려와 칭찬도 마찬가지다. 적정량의 격려와 칭찬은 개인에게 있어 많은 도움이 되지만, 그 이상이 되면 오히려 독이 된다. 과한 격려는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게 하고, 과한 칭찬은 자신의 수준을 잊게 만든다. 사람의 메타인지에 환각을 주어 스스로가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믿게 만든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받으며, 스스로도 아직 부족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부터 그런 경계와 자각이 사라지게 되고, 자신이 자신 스스로가 세운 이상향에 도달한 것 마냥 행동하게 된다. 빠르게 자각하면 다행이지만 그런 달콤함 속을 빠르게 빠져나올 사람은 별로 없다. 한 마디로, 중독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중독될 정도의 과도한 격려와 칭찬을 동물들의 행동에서 따온 '상처 핥아주기'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쓴소리를 잘 안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 스스로도 느낄 정도로 나는 쓴소리를 못하고, 싫은 소리도 잘 못한다. 돌려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상대의 약점을 후벼파는 그런 행동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좀 더 예전에는 팩트 폭행러라고 불릴 정도로 직설적으로, 그리고 상대의 상처는 생각하지 않고 말하던 시기가 있었다.
 
 되게 막 나가던 시기와는 달리 굉장히 유순하게 바뀐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싫어해서였다. 내가 팩트 폭행을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지내게 되면 그 문제가 나중에 더 큰 문제로 바뀔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렇기에 내가 그 문제점을 알려줘서 나중에 생길 큰 문제를 방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쓴소리와 상처 후벼파기를 하고자 한 것이었다. 허나 그렇게 상처를 후벼파다보니 내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비슷한 사람 몇명만 남을 뿐, 더는 내 근처로 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내 상황을 가리지 않는 쓴소리가 인간관계를 망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최대한 상처받지 않고 돌려서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직설적 화법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문제는 지적이다.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지적하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상대를 지적하고 나면 상대에게는 아주 약간이지만 나에 대한 반발감이 생기게 된다. 내가 옳은 소리를 했건, 틀린소리를 했건 나는 상대의 반발감을 지필 불씨를 남겨 놓고 가게 된다. 그 불씨가 얼마나 커질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내게 큰 화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지적을 멈추고 직설적 화법에서 우회적 화법으로 바꾸며, 상대가 상처받지 않게 말하기 시작하니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관계가 확장되었고 하나의 단체를 운영할 정도로 사람이 모였다. 이는 굉장히 좋은 결과지만 나는 이 상처 핥아주기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상처를 핥아주는 것은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심히 근력 운동을 하면 근육이 커진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근력 운동’ 자체가 근육을 키운다기 보다는, 근력 운동을 통해 근육에 상처를 내는 것이 근육을 키우게 해준다. 근육에 상처가 난 후, 충분한 영양 섭취가 이루어지면 상처를 새로운 근육 세포들로 메꾸면서 근육이 커지게 된다. 그렇기에 상처라는 것은 근성장에서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이는 근육을 키우는 방법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도 같은 맥락으로 작용한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처들을 치유하고 새 살이 상처 이상으로 돋아나며 스스로가 성장하게 된다.
 
 허나 상처를 남이 치유해주면 그 때부터는 문제가 생긴다. 너무나도 큰 상처의 경우에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게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를 치유받는 것은 스스로의 성장을 기회를 버리는 것과 같다. 상처를 핥아주면 자극과 통증이 완화되고 보다 빠르게 치유가 된다. 하지만 그게 스스로의 힘으로 치유되고 회복된게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는 성장할 기회를 잃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누군가의 상처 핥아주기에서 특별한 영감을 얻었다면 원점으로 돌아오기 보다는 조금 더 성장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정량의 범위 내에서고, 계속해서 상처 핥아주기를 받다보면 결국엔 스스로도 치유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은 했지만, 내가 사람들을 지적하는 행위를 멈춘 이유가 사람들이 싫어해서라고 밝혔었다. 지적은 사회에서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지적을 받는 사람에게는 반발심을 키우게 한다. 물론 그정도 반발심 가지고 기분이 상하고 동기가 꺾여버린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기는 하나, 조금씩 쌓이는 반발심은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정도 가까워진 사람, 엄청 친하지는 않고 특별한 일로 인해 만나게 되는 그런 사람에게는 큰 지적을 하지 않는다. 나와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 일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니 굳이 적을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단체에 많다. ‘특별한 일로 만나게 되는’의 요인 중 가장 큰 것이 단체이기 때문이다. 단체에서 누군가를 지적하는 행위가 잘못하면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 있다. 단체의 특정 인물의 행동에 대해서 지적했는데 그 행동을 단체의 대부분이 하고 있던 거라면, 나는 모두의 적의 될 수 있다. 그런 위험 부담도 있고 지적은 보다 나은 사람, 보다 잘 하는 사람이 하는 거라는 인식이 있기에 괜히 나서지 않는 것도 있다. 그렇다보니 대부분 의견을 조심스레 밝히고 상처받지 않게 말을 하려고 노력하며, 아예 오해를 사지 않게 지적이라는 행위를 멈춰버린다. 모두가 성장을 하기 위해 지적을 규칙으로 세워둔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단체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는 아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일어난다. 지적은 갈등의 불씨와도 같다. 그렇기에 지적이 자주 오가는 모임은 금방 소멸되곤 한다. 모두가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지인들의 모임은 쉬러가는 목적이 강한데 거기서 지적을 받게 되면 순식간에 감정이 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한 감정은 화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모임에서 역시 지적이라는 행위를 잘 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특정 단체와 모임은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구조로 쉽게 변모 되곤 한다. 그러나 가장 문제되는 것은 상처를 입으면 상처를 핥아주는 곳으로 이동하는 자신이다. 날카로운 피드백으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되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기 보다는 상처를 핥아주는 곳으로 가게 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했던가, 쓴 피드백은 뱉어버리고 달콤한 칭찬과 격려를 주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몸이 향한다. 나를 즐겁게 하는 대부분은 내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즐겁게 해주는 장소로 향해있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의 상처를 핥아달라고 한 곳으로 모이게 된다. 그 곳이 바로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구조로 변모된 단체와 모임이며, 대부분의 단체와 모임의 사람들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운영이 된다.
 
 단체나 모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유인책이 필요하기에 이런 구조가 필요하기에 순전히 잘못되었다고는 하기 힘들다. 또한 칭찬과 격려 역시도 단체나 모임의 운영을 위해,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를 핥아주기만 하고 지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단체를 보고 있자면, 계속해서 신물이 올라온다.
 



 즐겁게 모이고 끝내는 모임과는 다르게 특정 목적을 가진 단체가 그렇게 변질되어버리면 단체는 사실상 괴멸에 이른다. 단체가 괴멸에 다다르기 전에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이미 그때는 그들의 눈에 지적하는 사람은 행복한 유토피아를 망치려는 반동분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보이기 시작 할 때면 단체는 사실상 목적을 더 이상 달성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문제점을 느낀 사람은 다 떠나가고 편안함에 안주한 사람들만 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상태가 되기 전에 누군가 한 명은 지적을 해야한다. 단체를 위해서라면 인간관계가 박살 날 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 해야한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 총대를 맬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문제긴 하지만, 내가 문제점을 인식했다면 나와 같은 문제점을 인식한 사람이 한 명 쯤은 있을 것이다. 혼자가 힘들다면 같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 허나 그것 마저도 쉽지 않다면, 빠르게 단체를 옮기는 것이 현명할 지도 모른다.
 
 지적은 악(惡)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인식하게끔 만들 필요가 있다.
 



 현재 단체를 운영하기도 하고, 동아리를 여럿 운영본 적이 있었다. 나는 지적에 능했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단체가 좋게 운영되지 않았던 경험이 많다. 문제점이 눈에 선히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좋게 운영되는 분위기를 해칠까봐 말을 못했던 적도 많다. 그 순간의 지적을 참는 것은 그 상황 자체를 잘 넘어갈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더 큰 화가 되어 돌아온다. 그렇기에 지적은 필수라고 내 생각을 담은 글을 작성했다.
 
 사실 요즘 들어서 상처를 핥아주고 칭찬과 격려가 가득한 곳에 있는게 조금 불편하다. 마치 단 것을 너무 많이 먹어 속이 불편한 그런 느낌이다. 처음에는 불편한 정도였는데 이제는 보기 힘들어질 지경이다. 그래서 이제는 지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나도 지적에 익숙해지고,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게 지적하는 법을 연습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칭찬과 격려, 꼭 필요한 존재지만 마음에도 없는 칭찬과 격려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고급 초콜릿을 먹는 기분이 아니라 값싼 정말 이름 그대로의 정크 푸드를 먹는 느낌이다. 이제는 그런 싸구려 정크 푸드들에서 손을 떼고 내 원래 위치를 찾아갈 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가능성 중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