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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근 Aug 28. 2024

가능성 중독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희망고문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굉장히 유명한 문구이다.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탱은 이 문구를 올림픽 슬로건으로 사용했다. 스포츠를 통해 허약한 근대 남성들의 육체를 로마의 검투사와 같이 강건하게 단련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는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이 뒤집은 의미이고, 실제 의미는 인간에게 육체 단련만큼 정신 수양도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이 문구는 고대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가 쓴 시의 한 소절로, 육체의 강건함과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당대 로마인들을 풍자한 문구였다. 필자는 유베날리스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와 완전히 같을지는 모르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적극 공감한다.

 사람의 정신은 많은 곳에 영향을 끼친다. 사실 많은 곳보다는 사람이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친다. 단순히 사람의 신체 능력만을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격투기에서도 사람의 심리는 크게 작용한다. 정신이 영향을 크게 미치는 것은 모성애에서도 볼 수 있다. 아이가 차에 깔린 것을 본 어머니는 여성의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고 1톤이 넘는 무게를 단번에 들어 올린 사례도 있다고 한다. 이렇듯 사람의 정신, 마음가짐은 무언가를 할 때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온다.




 마음가짐은 순환을 형성한다. 마음가짐이 형성한 순환은 쉽게 깨지지 않게 되는데, 이는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 부정적인 마음의 순환이 생기게 되면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될 수 도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쉽게 회생할 수 없는 이유가 그 사람의 정신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순환, 우울의 고리를 쉽게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의 순환이 생기게 되면 꺾여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좋은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있다. 더욱 견고한 정신이 생기게 되고, 그 견고함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작업을 반복하며 건강한 정신을 만들어간다.


 마음가짐이 양날의 검이라고는 말했지만 사실 스스로가 크게 관여하여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위 환경, 상황에 따라 개인이 갖게 되는 마음의 상태는 달라지게 된다. 어느 정도의 의지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 의지가 꺾여버릴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의 순환을 형성하기 어렵다고 해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좋은 마음을 갖고자 노력한다. 뭐가 됐건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인생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고자,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낙관적인 시선의 근거는 높은 가능성이다. (이제부터 말하는 가능성은 모두 높은 가능성이다.) 내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을 가능성, 어떻게 보면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능성, 희망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

 내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성과에 뚜렷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성공할 수 있다고 믿으면 자신감이 생기며, 이 자신감은 사람의 행동을 더 정교하게 혹은 더 대범하게 만들어준다. 스스로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실패 안 한다고는 못하겠지만) 실패하는 빈도가 적다. 실패한다고 해도 바로 일어선다. 높은 자존감 덕분이다.

 이렇듯 가능성은 사람에게 동기를 주고 삶의 원동력이 된다. 할 수 있다는 말 한마디가 주는 위력은 상당히 파괴적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이루어질 수 있다’ 정도의 의미이지, ‘이루어진다’ 혹은 ‘이루어졌다’의 의미가 아니다. 90%의 확률로 성공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건 거진 성공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다. 변수로 인해 실패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사실 90% 는 거진 성공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실패할 비율보다 성공할 비율이 월등히 높다. 이런 상황에서 실패할 경우 운이 없었다고 하고 약간은 세상을 원망하며 넘어가는 정도로 끝난다. 90%의 일을 100번 했을 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70%로 확률이 내려가게 되어도 이런 믿음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실패했을 때 세상을 덜 원망하게 된다. 10%도 아니고 30% 정도면 일어날 수도 있지 하고 말이다. 50%의 확률이라면 어떨까.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둘 중 하나이기에 어느 결과가 나와도 양 쪽 모두 수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40%는? 여기부터는 조금 애매하다. 하지만 조금은 확률에 기대볼만 하다. 30%부터는 이제 도전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승산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 아래는 기회가 무수히 많은 게 아니라면 거들떠도 안 볼 것이다.

 이렇게 정확한 확률이 나오면 다른 제약 조건이 있는 게 아닌 한 판단을 이성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도전하냐 도전하지 않느냐를 명확히 생각하고, 설령 잘 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합리화할 구석도 마련이 되어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삶의 확률을 정확하게 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정확한 가능성의 수치를 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예측은 가능하다. 그게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식이 많을수록 비교적 정교한 가능성을 도출해내기도 한다.
어느 분야 든 간에 지식이 많을수록 실제 확률(물론 실제 확률은 알 수 없지만)에 가깝게, 타율이 높게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시사를 보아 특정 국가가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라거나, 새롭게 시작한 프로젝트의 성공률이라거나, 두 격투기 선수의 경기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 각 분야의 지식이 많을수록 더 정확하게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그만한 지식이 없으면 아무리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왜 그렇게 가능성이 나왔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도 같다. 전문가의 권위와 함께 설명이 들어가면 그 순간에는 그 확률에 대해 순간적인 암기는 하지만 돌이켜 봤을 때 어떠한 경위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게 혼자 곱씹다 보면 그 확률에 대해 의구심이 들게 되고 전문가의 권위에 도전하게 된다. 물론 도전한다고 해서 정확한 확률이 나오진 않아 제시한 확률로 돌아오겠지만 여전히 뿌옇게 가려진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가?"

  

 본인은 본인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가? 정말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근거가 있을까? 어쩌면 잘 알지 못하는데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메타인지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가 메타인지이다.
 
 ‘나라면 오늘 100문제나 풀 수 있어.’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성공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생각해 보자. 꽤 많이 성공했다면 스스로가 100문제를 풀 수 있음에 확신하고 있는 것이고, 이 부분에 있어 메타인지가 높다는 것이다. 문제의 개수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라면 오늘 30문제나 풀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정말로 30문제를 풀고 더 이상 풀 수 없다면 이 역시도 메타인지가 높은 것이다. 만약 100문제를 풀 수 있다고 했는데 30문 제 만 풀었다면 메타인지가 낮은 것이고, 반대로 30문 제 만 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100문 제 만 풀 수 있는 것 역시도 메타인지가 낮은 것이다. 물론 이 한 가지 사례만 가지고 전체적인 메타인지를 측정하진 않지만 이런 방향으로 메타인지를 테스트한다.
 
 그러면 메타인지가 낮은 부분을 확인해 보자. 30문제밖에 못 푼다고 생각했는데 100문제를 풀었다면 이 역시나 메타인지가 낮은 것이라고 했지만 이는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나 생각보다 능력이 되네?’ 이를 조금씩 인지하다 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 스스로를 인정하며 성장하게 된다. ‘오늘은 50문 제도 거뜬히 풀겠는데?’, ‘오늘은 70문제 까지도.’, ‘오늘은 100문제를 채울 수 있겠어.’ 라며 계속해서 성장하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장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기에 가능한 상황이다. 내가 성장할 구석이 있고, 사실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런 방향으로 계속해서 성장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100문제를 풀기로 했는데 30문제밖에 못 푼 경우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생각한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셈이다. 스스로의 상상 속에서는 모든 걸 해낼 수 있는데 실제로는 해내지 못하는 괴리감을 마주하게 되면 사람의 성장욕구는 꺾여버린다. 나의 이상향에 도달하려면 한참 남았다는 생각이 스스로를 갉아먹게 된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성장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렇게 많지는 않은 편이다.
 



 앞의 예시는 예시가 극단적이기에 뚜렷하게 판단할 수 있다. 내가 잠재력이 대단한 사람인지, 생각보다 대단하지 못한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항상 모든 것이 애매하게 돌아간다. 오늘은 100문제를 풀기로 했는데, 95문 제 만 풀고 말았다면 이는 내가 생각한 나와 맞는 것일까? 고작 5문제 차이지만 지켰다고 하기에도, 안 지켰다고 하기에도 애매해진다. 나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 엄밀히 따지면 고작 5문 제지만 못 지켰다고 할 수 있다. 기준이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 이를 본다면 ‘고작 5문제라면서 못 푼다면 고작 5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지키고 고작이라고 말하는 게 어떨까?’라고 쏘아붙이며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옆에 그런 엄격한 사람이 있는가? 없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자기 합리화에 들어가게 된다. ‘5문제는 오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못 푼 거야. 나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고, 여전히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잘 알아.’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대학 입시로 생각해 보자. 수능을 보고 대학에 원서를 넣었는데 예비 8번에서 걸렸다. 총 20명을 뽑는 학과인데, 예비 8번에서 걸린 이후 결국 전화가 오지 않아 대학에 떨어졌다. 이를 보면 대게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예비 8번이면 충분히 들어갈 만했다.’, ‘이번 학년도에는 운이 조금 없어서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은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이는 굉장히 안타깝게 떨어진 것이다. 예비 8번이면 앞의 20명 중 8명이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면 들어갈 수 있던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해당 학과에 대해 모두 찾아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내가 예시를 들었던 학과는 경쟁률이 1 대 2 정도에 가깝고, 한 번 합격 통보를 받으면 입시생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바로 들어가는 학과다. 경쟁률이 낮은 이유는 커트라인이 거의 확실하게 정해져 있고, 그 커트라인이 높아서 괜히 성적도 안되는데 운에 기대어 지원했다가 원서비 날릴 바에 다른데 넣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비 8번은 사실상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번호다. 하지만 사람이 절박해지면, 그리고 자신의 얄팍한 지식으로 가능성을 계산하면 이는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상황이 된다. 주변에서 진실을 이야기해 주어도 더 하면 될 거 같다는 생각으로 한 번 더 도전하게 된다. 그리고 다짐한다.
 

‘저번에는 내가 내 최대치로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래.
이번에 저번보다 더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어.’



 사람의 잠재력과 재능에는 어느 정도의 한계치가 있다. 노력을 통해 이 한계치를 돌파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소수이고 대부분 한계치에 막히게 된다. 그리고 한계치를 돌파한 대부분의 경우, 다른 부분이 출중하여 그 부분을 이용해 한계치를 돌파했거나 다른 요인들로 막혀있던 능력이 개방되는 경우가 많다. 즉, 정말 극소수의 경우만 정말로 순수한 노력으로 한계치를 돌파한다.
 
 앞의 예시에서 실제로 저 다짐을 달성하는 사람은 몇 안된다. ‘저번보다 더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어.’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저번에는 왜 더 열심히 하지 못했을까? 이 질문을 하면 이런저런 핑계가 나온다. 필자는 이전에 과외를 했던 학생에게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 하지만 게임하는 시간이 부족하여 티어를 올리기가 힘들다. 한두 단계만 올리면 프로게이머 구단에 입단할 수 있을 거 같다.’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정말로 하고 싶은 건지 물어보고 부모님께 직접 전화드려 양 측 다 설득시켜 과외를 중단하고 게임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줬다. 물론 다른 연습생들보다는 확실히 부족한 시간이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을 확보해 주었다. 하지만 이 학생은 오히려 랭크가 떨어졌다.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시작했던 랭크보다 높게 올라가지 못했다.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그 랭크가 이 학생의 한계인 것이다. 게임 학원도 다니고 학원 과외 다 빼고 했는데도 랭크 상승에 실패했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이 학생도 학생의 부모님도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했고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특정 단계 이상을 올라가기가 어렵다. 이는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노력은 충분했지만 타고난 성질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학생이 자신이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했을까?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다고, 정말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정말로 그럴까? 이미 이 학생은 가능성에 중독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실재하는 가능성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낸 공상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문제다.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 스스로의 능력을 속이게 되고, 스스로가 만들어낸 공상의 능력치에 자신이 속아 빠져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될 거 같은데 를 외치다가 결국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가라앉게 된다.
 
 결국에는 가능성 중독에 빠지게 되는 원인은 부족한 메타인지와,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속인 자신의 재능의 악순환이다. 현실을 직시하면 무너져버릴까 봐 계속해서 공상 속에서의 자신을 상상하다, 더 성장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살아간다. 이는 확실히 좋지 않다. 상처는 필연적으로 입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악순환 속에 정신은 계속해서 쇠약해지는데, 상처받는 것을 계속 미루어 가장 약할 때 상처를 입게 된다. 상처의 양은 정해져 있는데 미루다가 가장 약할 때 맞아 치명적이게 된다. 그렇기에 빨리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의 한계치는 이 정도고, 노력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고 스스로를 용서해 줄 시간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필자가 패배주의에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필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능력은 정해져 있으니 더 노력하지 말라.’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은 정해져 있으니, 내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보고 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다른 능력을 만들어라.’이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방향성 없는 노력보다 자신의 능력을 이해하고 방향성 있는 노력을 하자는 것이다.
 
 특정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타고난 센스, 타고난 습득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 줄 운까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계속해서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옳을까? 조금만 더 할 수 있다는 기분 좋은 말로 스스로를 속이며 달려가는 것이 맞을까? 달려가는 그 길에 끝이 있는 것은 맞을까? 바로 앞에서 놓치면 아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앞에 있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것 역시도 기분 좋은 말 중 하나 아닌가. 그렇기에 목표를 찍어놓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 능력들을 잘 조합하면 이걸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나 스스로에 조금 더 집중하면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글을 작성한 이유는 필자 스스로 가능성 중독에 빠져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개발자가 될 수 있다고, 더 좋은 곳에 취직할 수 있다고 계속해서 생각하지만 실제로 더 좋은 곳에 있는 개발자와 협업을 해보았을 때 부족함을 너무나도 많이 느꼈다. 그 개발자분을 제외하고도 정말로 개발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느꼈다. 절대로 저 사람들과 같은 사고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저 사람들의 사고를 난 절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해보지도 않고 그런 생각을 한다고 질책할 수 있다. 필자는 그 사람들처럼 되기 위해 1년 동안 모두와의 연락을 끊고 집에서 공부만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필자가 했던 노력은 그 사람들이 한 달이면 성취할 정도였다는 것을 알았고, 더 이상 그 분야에서의 노력을 그만두었다. 이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시간에 다른 능력을 키우기로 생각했고, 그 외적인 개발 능력을 키우기로 했다.

 물론 여기서도 한계가 보이긴 하지만, 그 한계가 바로 앞에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것 역시도 가능성에 중독되어서일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성과가 눈에 확실히 보인다. 이전보다 더 나은 코드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인정받는다는 것. 많은 것들이 아직은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준다. 그럼에도 내 다른 능력들을 찾는 것을 멈추진 않을 것이다. 이것보다 더 잘하는 것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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