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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근 Aug 26. 2024

회피

완벽한 회피라는 건 없다. 그저 미루는 것일 뿐

 회피는 동물에게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기능 중 하나다. 다른 말로는 도피라고도 할 수 있고, 투쟁 - 도피 반응은 대부분의 동물에게서 나타나는 생리적 반응이다. 이 반응은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면서 아드레날린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어 심박수 증가, 혈압 상승, 근육 긴장 등의 신체적 변화가 일어난다. 일종의 도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의 판단 능력과 신체 능력을 향상한 뒤, 맞서 싸우거나 도망가거나를 결정하여 동물의 생존 확률을 높여준다.


 인간도 아주 당연하게도 동물이니 이 반응이 일어난다. 어떠한 위협적인 일을 마주하게 되면 그 일에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거 나를 선택한다. 일반적으로 싸울만한 가치가 있고 싸움에서 이길 것 같으면 투쟁을 선택하고,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도피를 선택한다. 이는 온전히 그 사람의 판단에 걸린 일이며 상대의 능력과 역량 혹은 상황의 해결 난이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정이 된다. 투쟁 - 도피 반응은 이 결정을 빠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최종적인 결정에 대해서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가끔이 교감신경계에 문제가 생겨 투쟁 - 도피 반응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분노조절장애가 있다. 과도한 아드레날린 분비로 인해 판단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닌 투쟁욕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나 상황에 대한 판단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고 투쟁하는 선택을 한다. 현대에는 물리적으로 위협적인 대상이 많지 않아서 그나마 생존할 수 있고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과거에는 이런 질환을 앓고 있었다면 쉽사리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노조절장애가 투쟁의 극에 해당한다면, 회피의 극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 히키코모리와 같이 사회적 고립자들일 것이다. 스스로에 처한 대부분의 문제들에 맞서 싸우지 않고 계속해서 투쟁하다가 방에 틀어박힌, 그런 사회적 고립자들이 회피의 극에 해당한다. 이들은 어떤 트라우마로 인해 이런 극의 질환이 발발한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기에 사람의 의지적인 문제와는 조금 다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의지는 필요하지만 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누군가의 도움, 혹은 약물과 같은 현대 의학의 도움이다.





 사람이 항상 가운데를 유지하진 못하지만, 어느 정도 투쟁과 회피 성향의 가운데에 존재한다. 약간의 치우침이 존재하며 그 치우침이 곧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극에 달하지 않는다면 성격으로 볼 수 있고 그 사람의 개성으로 볼 수 있다. 투쟁에 가깝다면 문제 해결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고, 도피에 가깝다면 원만하게 넘어가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투쟁적 면모는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경우가 많기에 그런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때로는 다혈질적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좋게 발현이 되었든, 안 좋게 발현이 되었든 투쟁적 면모는 쉽게 볼 수 있다. 중도적 면모는 일반적이다. 투쟁적 면모나 회피적 면모의 차이가 크지 않은 경우 대체로 그 어떤 성향도 아닌 일반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도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회피적 면모는 쉽게 알아챌 수 없다. 그 모습이 중도적 모습과 일치하는 경우도 많고, 잘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알아채기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조차도 회피해서일 수도 있다.





 회피하는 것은 해당 상황을 큰 힘을 쏟지 않고 넘길 수 있기에 에너지 보존 측면에서 탁월하다. 사람들의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기에 항상 문제 상황에 맞설 수 없다. 효율적으로 운용하고자 하고 회피는 그 효율적 운영에 있어서 굉장히 좋다.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스스로에게 치명적인 문제라면 피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런 문제는 크게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굉장히 복잡한 문제에 얽힌 게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거나 내게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문제는 손에 꼽게 된다. 심지어는 회피한 줄로만 알았던 상황은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다. 완벽히 똑같은 상황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더라도 변모하여 돌아오게 되어있다. 내게 주어진 문제라는 것은 그렇다. 언젠가는 해결을 해야 한다.


 완벽한 회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에 다시 돌아오기에 문제 상황을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수학 문제와도 비슷하다. 특정 유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이후에 등장하는 비슷한 유형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처음 마주친 유형의 문제를 넘겨버린다면 이후에 등장하는 유사한 유형의 문제는 풀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회피의 문제라는 것은, 상황의 해결을 미루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문제를 회피하여 해결을 미루는 것은 나 스스로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만 잘하면 되는 문제다. 주어진 시련들을 계속 회피해서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한 유형의 사람이 되는 것은 나 자신의 문제이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폐가 될 것 같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사회라는 것은 혼자서 생활하는 곳이 아니다. 심지어 사회 진출을 하지 않았더라도 가족이라는 소규모 형태의 사회가 존재하고, 학교, 학원이라는 형태의 소규모 사회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러나저러나 사회에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상황은 나 혼자의 상황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얽혀있는 상황이다.


 이때부터는 일종의 책임감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역지사지의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내가 이 일을 미뤘을 때 다른 누군가에게 생기는 파급력을 인지하여 일을 끝까지 책임지고 수행한다. 하기 싫고 어려웠지만 투쟁과 도피 중 투쟁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회피적 성향의 사람들은 일종의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다. 내가 이 일을 미뤘을 때 생기는 문제점을 다른 누군가가 해결해 주겠지라는 알량한 생각으로 넘겨버린다. 앞에서 일이라고 표현을 하여 회사에서 하는 업무나 학교의 과제를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일은 업무를 포함하여 인간관계까지 모든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업무가 됐건, 인간관계가 됐건 결국에는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을 해결하지 않고 남에게 미뤄버린다는 것이 그 문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회피하는 것일까? 앞에서 말한 치명적이고 위협적인 문제인 건 알겠지만 모든 문제가 그런 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모든 것에 회피하고자 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고통에 민감해서라고 생각한다.


 사람들마다 느끼는 그 고통의 정도가 다르다. 누구는 맷집이 세고, 누구는 둔감하고, 누구는 예민하고,... 사람들마다 느끼는 감각의 정도나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 다르다. 이는 정신적으로도 통하는 말이다. 몸이 약할지언정 정신의 맷집은 강하고, 둔감할 수 있다. 회피적 성향의 사람들은 결국에 정신적 고통에 굉장히 민감해서 상황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늘에 찔리면 바늘에 찔린 만큼만 아파하면 된다.
'왜 내가 바늘에 찔려야 했나',
'바늘과 나는 왜 만났을까',
'바늘은 왜 하필 거기 있었을까',
'난 아픈데 바늘은 그대로네',
이런 걸 계속해서 생각하다 보면 예술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은 망가지기 쉽다.



쉽게 말해 최소한 바늘에 찔린 만큼만 아파해야 하는데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아파하기에 사소한 상황에서도 피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고통에 민감해졌을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의 성장과정은 천차만별이고 어떤 걸 경험했을지, 어떤 트라우마가 있을지 까지는 알 수 없는 영역이다. 하나로 뭉뚱그려 얘기하기에도 스펙트럼이 넓기에 고통에 민감해졌다는 결론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다.





 회피적 성향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회피형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업무적으로는 회피적 성향을 가지진 않았지만 인간관계에서 회피적 성향을 가졌다. 둘, 혹은 셋, 혹은 그 이상의 사이에서 불화가 일었고, 내가 특정 대상 혹은 단체에 불만이 생겼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해결해 줄 거고 언젠가는 알아줄 거라는 생각으로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나 스스로가 이걸 인내 혹은 포용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돌아보니 그저 회피였을 뿐이다. 나의 불평을 듣고 기분 나빠하거나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인 인내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인간관계의 불화는 언젠가는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이라면 갈등이 안 일어날 수 없다. 의견차이라는 것은 허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다. 오히려 완벽히 일치하는 의견이라는 것이 허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소한 마찰음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고 그 마찰음이 지속되면 불이 붙게 된다.


 나는 그 마찰을 계속해서 피했다. 맞닿으려고 할 때마다 피해서 마찰이 일어나지 않게 했다. 의견이 완벽히 일치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사실은 저도 그랬어요.', '저는 어떻게 해도 상관없습니다.'라는 식의 말을 자주 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은 정말로 그런 게 맞아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다. 나는 가치관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그렇게 이야기한 것도 꽤 있었다.


 그동안에는 괜찮았다. 마찰음이 나는 거 자체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니 대체로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맞붙으려고 하지 않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특별한 관계에 있어서는 아주 큰 문제다. 특별한 관계에서 마찰음이 없다는 것은 어느 한쪽이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해봐야 한다. 나의 경우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나였다.


 특별한 관계, 가족이 되었건 애인이 되었건 정말 친한 친구관계가 되었건 나는 항상 가면을 썼다. 속으로는 괜찮지 않지만 괜찮은 척했다. 그동안에는 내가 가면을 썼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고 생각했기에 계속 가면을 썼고 그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다들 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 알았고 내가 가면을 벗는 것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과 친구 관계는 본 시간이 오래되었으니 충분한 유대관계가 형성이 되었고,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애인의 입장에서는 그 유대 관계를 형성한 시간이 짧기에 결국에는 나와 더 이상 붙으려고 하지 않고 떨어져 나간다. 나는 그렇게 떨어져 나가는 동안에도 내가 가면을 제대로 안 쓴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가면을 쓴 것 자체가 문제였는데 말이다.


 이를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나보다 더 한 회피형을 만났을 때였다. 나도 회피적 기질이 있지만, 이 사람은 회피적 기질이 있는지도 못 알아챌 정도로 자연스럽게 가면을 쓰고 있었다. 결국에는 이야기도 제대로 진행하지도 못한 채로 나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믿기지가 않았다. 전혀 눈치채지도 못했고 전혀 얘기하지도 않고 혼자서만 생각하다가 문제 상황 자체를 회피해 버릴 거라고는 상상조차도 못했다. 그동안에 어느 정도의 회피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을 봤을 때는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 정도였는데 이 사람을 보니 이해조차도 안 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회피적 성향이 없는 사람들이 보는 내가 이런 느낌이었구나. 나는 모두를 위해서 말을 안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나를 위해서, 문제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였구나를 느꼈다.


기분은 굉장히 안 좋았지만 엄청난 교훈을 얻었다.




 회피라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미루는 것은 쉴 시간을 마련해 준다. 에너지 보존을 위해서라면 회피는 무조건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언젠가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언젠가는 되돌아온다는 것을. 그리고 평생 미룬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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