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말 없이 같이 시험공부를 하던 카일이 정적을 깨고 말했다. 마침 집중이 안되어 같은 문단을 세 번째 다시 읽던 터라, 잠깐 쉴 겸 책을 덮고 대답했다.
"공부하다 말고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야."
"문득 궁금해져서. 생각해봐봐. 우주의 끝에 가서 바깥쪽을 보면 뭐가 보일까? 그냥 평범한 어둠일까?"
"그렇지 않을까? 공간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은 거니까 빛이 보이진 않을 것 같고, 그럼 그냥 까맣게 보이지 않을까"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할수록 묘해. 봐봐. 일단 우주의 끝 너머로 손을 뻗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손이 뻗어질까 아니면 벽에 손을 댄 것처럼 막힐까?"
"음.... 흥미롭네. 왠지 막히는 건 잘 상상이 안되는데."
"그치. 막힌다는 건 손이랑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무언가가 경계에 있다는 거잖아. 경계에 물질이 있는 것도 이상하고, 우주가 커지면서 경계면은 점점 넓어질텐데 물질을 막을 수 있는게 같이 넓어진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해."
"그럼 그냥 뻗어지려나?"
"여기가 재밌어지는 포인트야. 만약 뻗어진다면, 공간 밖으로 나간 손은 어떻게 될까? 증발해버리진 않을 것 같단 말이지. '허락되지 않은 공간을 넘보다니!' 하면서 신이 천벌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하하. 그렇지."
"그럼 모종의 공간으로 이어질텐데, 같은 우주의 다른 시간대로 간다고 하면 이상해."
"왜?"
"우리가 흔히 보는 시간여행은 몸 전체가 이동하잖아. 그런데 이건 내 팔만 다른 시간대에 있는거야. 만약 과거 시공간으로 팔만 뻗어서 현재의 내가 자의로 팔을 움직이면 현재에 나에게 영향이 있을텐데, 그럼 실시간으로 내가 바뀔 수 있으니 말이 안되잖아"
"세계관 중에 시간여행을 해서 하는 행동은 과거의 시점에 이미 일어난 일이라 미래에 영향을 안 미치는 경우도 있잖아."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과거에 영향을 줘서 태어나는 세계관은 말장난 같아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걸 받아들이면 자유의지가 없는 느낌이 드는데, 나는 그냥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고 살래. 그리고 느낌이 좀 달라. 의사결정과 인지는 현재에 하는데 팔이 과거에 영향을 주는거니까."
"뭔가 다른 느낌이 드는건 맞는데... 잘 모르겠네. 이어진 곳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면 상관 없는거 아니야?"
"미래 쪽으로 머리까지 넣어서 과거에 있는 손을 움직이면 되는거니까 결국엔 똑같아."
"아니면 신체 일부가 닿는 순간 온 몸이 이동한다던지."
"그건 너무 게임 같잖아. 그리고 만약 그렇게 생각하면 신체 뿐만 아니라 신체 바로 옆에 있는 입자, 그 옆에 있는 입자까지 이동한다고 생각해야 해서 귀납적으로 우주 전체가 이동하겠다."
"야, 그렇게 치면 어떤 가설이든 다 반박할 만한 구석이 하나씩은 있겠다. 이정도면 네가 원하는 결론이 있는거 아니야?"
"오 맞아. 사실 제일 내 마음에 드는 가설은 같은 우주의 같은 시간대의 정반대로 이어지는거야. '이 지긋지긋한 우주에서 탈출에 성공했다!'하면서 기쁘게 경계를 지나갔는데, 알고보니 그냥 정반대 공간에 도착했을 뿐인거지. 아, 내 마음에 쏙 드는 결론인데. 누가 영화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새드엔딩으로 끝내는 게 너 답다."
"이게 왜 새드엔딩이야?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 불러줘. 원래 무언가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할 수록 반대로 구속되는거야."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걸 우리는 새드엔딩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에이. 그보다 이야기가 아직 안 끝났어. 이 상상의 핵심은 끝 너머가 무슨 공간일지 추측하는 게 아니라 첫 질문으로 돌아오는거야. 손을 뻗을 수 있다면 경계 너머가 어디든 거기서 발생하는 빛은 반대로 우리 우주로 들어올거잖아? 그럼 깜깜하지 않을 수도 있지. 만약 그게 다른 우주인데도 비슷하게 생겼다면, 우리는 경계를 넘은걸 알지도 못하고 똑같은 우주라고 생각하고 넘어버릴걸. 근데 만약 보지도 못하고 의식도 못하면, 그걸 우주의 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하나의 우주로 보는게 더 합리적이지.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하던게 사실 수 많은 우주의 집합일 수도 있는거고.
만약 지구가 평평하고 밑에 무언가가 있다면, 그 밑에 무언가가 또 있어야 하는데, 이걸 무한히 반복할 순 없으니 연역적으로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했던 고대 이집트 학자처럼, 이것도 비슷하면서 동시에 정반대로 생각할 수 있어. 우주 밖에 다른 우주가 있다면, 그 우주 밖에도 또 다른 우주가 있어야 하는데, 이걸 무한히 반복할 순 없으니 우주 밖은 결국 우리 우주라는 연역적인 결론에 이르는거지.
사실은 너랑 내가 다른 우주에 살고 있고, 우리 사이에 각 우주의 끝인 경계가 있는데, 우리 둘다 그걸 모르는 것 뿐일 수도 있지. 그런데 앞에 말한 것처럼 내 우주 밖을 나가봤자 결국 내 우주니까 네 우주가 내 우주고 내 우주도 네 우주고."
"갑자기 머리 아파지는데."
"쉽게 요약하면, 네 돈이 내 돈이니까 편의점 가서 나한테 아이스크림 사주면 된다는 뜻이야. 맛있게 먹고 내가 행복해지면, 그게 네 행복이고."
"얼씨구"
천진난만하게 웃는 카일의 얼굴을 보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