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권 - 『방울 슈퍼 이야기』를 읽고 생각한 곁에 있는 행복
어떤 책은 내용을 다 읽고 나서도 줄거리보다 먼저 온도가 남는다.
황종권의 『방울 슈퍼 이야기』가 그랬다.
나는 이 책을 독립서점에서 블라인드 생일책으로 만났다.
책을 펼치기 전부터 이미 작은 우연과 호의가 겹쳐 있었고, 그래서인지 첫 장을 넘기자마자 오래된 골목의 공기가 먼저 들어왔다.
이 책은 여수 국동의 작은 구멍가게, '방울 슈퍼'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동전 하나로 과자를 사 먹던 아이들, 평상에 모여 하루를 나누던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의 한가운데에 있던 '슈퍼집 여자'—저자의 어머니.
방울 슈퍼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허기를 달래는 곳이고, 누군가에겐 심심함을 버티는 곳이며, 또 누군가에겐 잠깐 기대어 숨 돌리는 곳이다.
저자는 그 작은 공간을 통해 한 시절의 정서와 사람의 마음이 오가는 방식을 복원해 낸다.
나는 2000년생이라, 이 책이 불러오는 8090의 풍경을 '내 추억'으로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처음엔 내가 이 책을 얼마나 깊이 공감할 수 있을지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알게 됐다.
추억은 꼭 같은 시대를 살아야만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겪지 않는 풍경인데도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들이 있다.
그건 아마 그 장면들 안에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
나누는 기쁨,
작은 친절의 힘,
그리고 버티는 삶을 붙드는 정 같은 것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문장이 있다.
"행복이란 게 높이가 아니라, 곁이라는 아득한 깨달음도 얻는 것 같았다."
이 문장을 읽고 한참 멈췄다.
우리는 너무 자주 행복을 '높이'로 배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더 나은 조건을 갖춰야 행복할 수 있다고.
그래서 삶은 자꾸 비교의 언어로 번역된다.
누가 더 빨리 갔는지, 누가 더 많이 가졌는지, 누가 더 잘 살고 있는지.
그런데 이 책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행복은 높이가 아니라 곁이라고.
곁이라는 말은 이상하다.
숫자로 셀 수 없고, 증명하기도 어렵다.
성과처럼 기록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을 가장 오래 버티게 하는 것은 종종 곁에서 온다.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준 사람,
별말 없이 밥을 먹어준 시간,
나를 대단하게 보지 않아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태도,
겉으로는 별 말이 아닌 것 같지만 그 속에 숨어 있던 다정함.
책 속에서 '라면 먹자는 말은 살아 보자는 말로 들린다'는 대목을 읽을 때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살아가는 일은 거창한 결심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삶이 무너질 듯한 날에는, 큰 위로보다 작은 문장이 더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오늘 하루를 넘기게 하는 말,
지금 여기로 사람을 다시 데려오는 말.
돌아보면 내가 '평범한 삶'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장면들도 대부분 그런 것들이었다.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문득 나를 살렸던 시간들.
누군가의 마음이 내 하루에 닿았던 순간들.
그래서 『방울 슈퍼 이야기』는 내게 단순한 추억 에세이가 아니라,
평범함을 다시 정의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평범한 삶은 아무 일 없는 삶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붙들어주는 작은 마음들이 이어지는 삶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음들은 대부분 크지 않다.
동전 하나, 과자 하나, 라면 한 그릇, 천 원 한 장 같은 모습으로 온다.
(물론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였을 때, 이제 동전은 좀 그렇고.. 만 원 한 장이 맞겠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리기 쉬운 것은 '추억' 자체가 아니라,
그 추억을 가능하게 했던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는 일,
나누는 맛을 아는 일,
군림이 아니라 사정을 헤아리는 일을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각.
이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오래된 골목을 그리워했다기보다, (물론 그리워할 골목의 풍경은 다르지만)
지금의 내 삶에서 무엇이 누군가의 방울 슈퍼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잠시 기대어 숨 고를 수 있는 자리.
크진 않지만 마음이 오갈 수 있는 자리.
사는 일이 녹록지 않아도 다시 살아보자고 말해주는 자리.
그런 자리를 만들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삶이 아닐까.
『방울 슈퍼 이야기』는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책이면서, 동시에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용히 묻는 책이었다.
행복의 높이를 재느라 지친 날에,
곁이라는 말을 다시 꺼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