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노력에 의해 무언가의 시작이 된다
‘계획된 우연 이론’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 젊은 유행어, ‘OO는 다 계획이 있구나’와 비슷한 느낌이다. 뭐 다 지나고 보면 '아 이러려고 그때 그랬던 거구나'는 생각이 드는 일들, 많이 있지 않은가?
이 이론은 인생을 살아가며 군데군데 놓인 우연적 기회들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성향' 혹은 '학습기술'을 다루고 있다. 해외 연구에서 대학생에서 직장인들까지 진로를 정하는 데 이런 우연적 사건들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답한 이들이 많았다고 하는 결과에 한껏 고양된 연구자는 아예 우연을 잘 받아들이는 훈련, 혹은 성향을 키워야 하는 게 아닐까란 결론에까지 다다른다. 참고로 이 연구에서는 우연을 긍정적인 기회로 만드는 다섯 가지 학습기술로 '호기심', '인내성', '유연성', '낙관성', '위험 감수'를 얘기하고 있다.
난 전적으로 이 이론에 동의를 한다. 돌이켜 봤을 때 개인적으로 이 우연적 상황의 특혜를 받았던 시기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1999년에서 2000년, 세기말이라 불렸던 그 시간 동안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
아래 열거하는 몇 가지 우연적 상황들은 내 20대 중반, 겨우 1~2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다.
1. 외상을 갚기 위한 심야 재즈바 아르바이트
대학교 미술 동아리에서 회장을 하던 시절, 전시회 뒤풀이 2차로 한 재즈바를 갔다가 선배들의 후원 부족으로 얻게 된 15만 원의 외상을 갚기 위해 그곳에서 몸소 한 달 간의 아르바이트를 뛰게 된다. 당시는 밤 12시 이후의 심야 영업이 규제되는 시대였으나 항상 그 시간에 찾아오는 몇몇 단골들을 뿌리치지 못한 사장 누나는 새벽 2시까지 나에게 그 가게를 맡긴다. 난 그곳에서 단골들을 관찰하며 문화인류학 리포트를 작성한다. (외상을 갚고도 아르바이트 기간을 연장해 가며...)
2. 군대에서 시작된 월간지 정기구독
제대를 다섯 달 남기고, 좋아하던 동아리 선배가 자신이 즐겨보는 잡지라며 월간지 한 권을 생일선물로 보내준다. 나는 (잡지의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로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지속적으로 연락을 받기 위해 그 잡지를 계속 받아 보고 싶다는 의사를 수줍게 선배에게 전한다.
3. 무라카미 하루키와 만남
제대 후 복학 전, 집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나에게 어머니는 등짝 스매시를 날리시며 할 일 없으면 도서관이라도 가라고 등을 떠미셨다. 그날 시립도서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처음 접했다.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을 한 작가의 소설 몇 권을 읽다가 문득 나도 픽션을 써보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된다.
4. 일본어 학원 수강증 무료 득템
추석에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던 형 친구는, 강남에 새로 연 일본어 어학원의 1년 수강증을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했으나 두어 달 동안 한 번도 가지 않았으니 차라리 나에게 다니라며 던져준다. 그래서 (딱히 관심이 없었던...) 일본어를 시작한다.
5. 캠퍼스에 펄럭이던 일본 워킹홀리데이 모집 플래카드
대학교 3학년을 마친 뒤, 취업을 위해 무엇하나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난데없이 깨닫고 무작정 휴학을 했다. 그리고 진로 상담을 핑계로 선배들과 술 한 잔 하고 캠퍼스를 내려오다 (한숨 쉬며 올려다본 하늘에서...) '일본 워킹홀리데이 지원자 모집' 플래카드를 발견한다.
6. '그 월간지'의 기자 아카데미 모집 공고
군대에서 선배로부터 선물 받았던 월간지를 제대한 뒤에도 습관처럼 매달 사 보게 됐는데 어느 날 지면에서 '기자 아카데미 모집 공고'를 발견한다. (이 아카데미는 그 해 딱 한 번 운영된다. 편집부는 아카데미를 운영하기엔 그리 부지런한 사람들이 아니...)
위기감에 시작했던 휴학 생활의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 그 뒤 6개월 동안 난 무척 절제된 생활을 하게 된다.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일본어 학원의 아침 7시 수업을 들은 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귀가해 일본어 공부를 하거나 아카데미 지원을 위한 준비를 했다. 아직은 우연이 안겨준 건 작은 기회들을 목격했을 뿐이었고 그 씨앗을 틔우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일본 워킹홀리데이 신청을 하고(3차 심사까지 진행) 기자 아카데미 지원을 했는데 잡지사에는 자기소개서와 내가 직접 취재한 기사 형식의 글을 제출해야 했다.
평범한 자기소개서는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하루키를 접한 후 하나둘씩 끼적거렸던 1인칭 시점의 픽션을 제출했다. 1인칭의 주인공은 꾸미지 않은 나 자신이라며. (참고로 주인공은 이야기 속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기사는 재즈바 단골 관찰기 문화인류학 리포트를 조금 손봐서 제출했다. 그 단골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혼자 와서 자신이 키핑해 놓은 위스키를 홀짝이다 가는 여자 회사원, 올 때마다 다른 외국인 남자 친구와 동행하는 젊은 여자, 재즈바인데 락을 틀어달라며 CD를 챙겨 오는 아저씨, 재즈바 앞 파출소에 근무하는, 사장 누나를 흠모하던 경찰관 등이었다.
7월의 어느 날 워킹홀리데이 3차 심사 합격 통지를 받고 오는 길, 지하철에서 산 잡지의 합격자 공지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다. 경쟁률이 무려 25대 1 정도였다고 한다. (나중에 듣자 하니 남자 지원자가 없어서 가산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그해 8월 나는 도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자 아카데미 활동은 일본에서도 과제를 꼬박꼬박 내겠다는 약속을 하고 지속할 수 있었다.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아 일을 구하는데 제한이 있었다. 이런 경우 보통 한국 학생들은 전단지 돌리는 일을 하거나 불고기 식당에서 서빙 혹은 설거지를 하게 되는데 나는 다른 친구들이 경험하지 못한 일을 해보고 싶었다. 또 한국인이 없어 일본어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두어 번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거쳐 도쿄 북쪽의 외곽에 있는 건축 재료 재활용 공장의 장기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도쿄의 일상이 시작됐다. 이른 아침 자전거로 역까지 가서 전철을 한 번 갈아탄 뒤 공장에 도착하는데 1시간 30분 정도 시간이 소요됐고,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중간중간 10분 정도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일은 고됐다. 스티로폼 등 재활용 쓰레기들을 분쇄한 뒤 재료별로 분류해 부장이 기계로 10kg 혹은 20kg 정도 재료를 다양한 포장지에 밀봉해 넘기면 나는 그것들을 묶음으로 다시 포장하고 일정량이 쌓이면 창고의 제자리에 쌓아야 했다. 작업 도중에 게으름을 피울 틈은 전혀 없었다. 도쿄의 눅눅한 늦여름 날씨도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는 데 한몫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해 작업 중에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고 쉬는 시간도 각자 따로 자리를 잡고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면 금방 끝이 났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고비가 왔다. 하루 중 몇 번이나 체력적인 한계에 다다랐다. 한국에 놓고 온 대학생이라는 신분의 안락함이 그리웠고 그냥 아카데미 활동을 열심히 해도 되는 거 아닐까라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고개를 쳐들었다.
그 날 오후, 며칠 뒤 일을 그만둔다는 30대 초반의 일본인 청년 A와 담배를 피우며 잠깐 얘기를 하게 되었다. 키는 작은데 일머리도 체력도 좋았다. 덩치만 큰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는 서핑을 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일 년에 3~4개월 정도의 '좋아하는 것을 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생활비와 그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버는 전형적인 '프리타'였다. 나는 A에게 물었다.
"일이 정말 힘드네요. 사실 요새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A씨는 전혀 힘들어 보이질 않아요. 혹시 비결이 있나요?"
"난 서핑을 하기 때문에 평소에 활동량이 많은 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3개월 정도 하니까 익숙해 보이는 거고."
과묵한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진다.
"그냥 열심히 해봐요. 분명 익숙해질 거예요."
그가 말한 열심히, 일본어로는 '잇쇼켄메이'라는 단어로 한자로는 '一生懸命'라 쓴다. 지극히 일상적인 관용어지만 그 말을 외국어로서 공부하던 나에겐 한자가 더 와 닿았다. '일생을 걸고', 괜한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만났던 우연들을 난 '오 이런 행운이 나에게?'라 받아들였지만, 그것들을 기회로, 이어서 나에게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데는 분명 힘겨운 '감당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난 A의 말대로 그냥 열심히 그 일을 해 보기로 담담히 결심했다.
그 날 퇴근길,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모처럼 신선한 초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뜨겁던 여름은 그렇게 서서히 모습을 감춰가고 있었다.
몇 달이 흘렀다. 여름에 시작한 도쿄에서의 생활, 가을을 거쳐 어느새 계절은 겨울에 접어들었다. 그동안의 변화로는 일상이 된 노동과 부실한 식사로 몸무게는 20kg이 넘게 빠졌지만 공장 일에 필요한 근육은 더 단단해져 공장에서는 '치까라 모치(力持ち)', 즉 장사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불고기 식당에서 설거지하던 친구에서 광고지를 돌리는 친구로 룸메이트가 바뀌었고, 저녁 산책에서 만나는 동네 공원의 고양이들과 꽤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쉬는 날이면 새 룸메이트와 도쿄 구석구석을 여행한 덕에 그 거대한 도시와의 서먹함도 조금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만큼, 한국으로 돌아갈 날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기자 아카데미 활동도 이어갔다. 개인과제와 조 과제가 있었는데 글을 써야 하는 주제가 정해지면 연습장 한 장을 두 번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메모를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구성이 되면 일을 쉬는 날 신오쿠보라는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 PC방을 찾아 원고를 마무리해 제출했다. 인터넷을 활용하기도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정보를 얻기 위해 도움을 많이 받은 곳이 YWCA 자원봉자사 모임이었다. 일 하는 곳에 한국인이 한 명도 없어서 일본어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먼지를 뒤집어쓰고 하는 일이라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일해야 해서 출퇴근 인사 외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귀가하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YWCA에서 운영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외국인들과 일본어로 대화하는 모임'에 매주 수요일마다 나가게 되었다.
모임에서 누군가가 일본에 오기 전 무얼 했었나 물으면 나는 '그건 알 거 없고, 지금은 노동자'라 답했다. 아버지 영향으로 육체를 쓰는 성실한 노동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두고 있었고 앞으로 전적인 육체 노동자로 살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그저 노동자인 이곳에서의 나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구구절절 일본어로 설명하기에 아직 일본어 실력이 부족해서라는 이유는 아니...)
여하튼 그 모임에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일본인들에게서는 외국인에 대한 경계, 혹은 그들의 폐쇄적인 문화가 만들어 낸 벽 같은 게 느껴졌지만 이 모임의 자원봉사자들은 어느 정도 해외 경험이 있는 비교적 개방적인 사람들이었다. H 역시 그 자원봉사자의 한 명으로 30대 중반의 문학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진 여성이었다. 특히 상대방의 일본어 실력에 최대한 보조를 맞춰주는 대화를 했기 때문에 편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어쩌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그곳에 갈 때마다 그녀와 대화를 할 기회가 많았고 기자 아카데미 과제를 위한 인터뷰이 역할을 맡아 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대화의 연속성으로 내 개인적인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내 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리 진진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주제였지만 일본에 오기 직전 얻게 된 기자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신분은 내게서 '글을 쓰고 싶다'는 대답을 자연스럽게 꺼내 주었다.
"작가를 말하는 거죠?"
그녀는 확인하려는 듯, 한 번 더 되물었다. 꿈이란 건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언제든 수정이 가능한 거라 생각해 가볍게, '네'라 답했다.
크리스마스가 왔다.
그 날 아침 H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녀는 내게 작가가 꿈인지를 다시 한번 물었고, 내가 글을 쓰는 데 좋은 소재가 될 이야기를 자신이 제공해 줄 수 있을 거라며 오후에 시부야에서 만나자고 했다.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일본에서의 크리스마스는 밸런타인데이 정도의 느낌이다. 기업과 상점에선 좋은 이벤트의 기회지만 사람들에게 그 날의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빨간 리본으로 포장된 도심, 시부야의 한 카페에서 크리스마스 오후, H를 만났다.
잠깐의 인사를 나눈 뒤, H는 바로 자신이 아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는 5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야기의 중간에 H와 나는 북적이는 시부야에서 한적한 에비수 주택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이야기는 별안간 멈췄다. 주인공의 호칭이 바뀌면서.
"나는..."
3인칭이 1인칭이 되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충만하던 카페는 마치 3차원이 4차원의 공간으로 바뀐 것처럼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 H의 눈은 큰 잘못을 들킨 아이의 눈처럼 일순 커다랗게 확장됐다. 그리고 그 적막은 H가 터뜨린 울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에게 향했다. 알록달록한 카페 안, 그곳의 타인들 속에서 이 테이블은 한 덩어리 블루치즈처럼 묘한 묵직함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는 카페를 나서 역까지 걸었다. 나는 문득 H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이 이야기를 나한테 한 건가요?"
"그냥... 나중에 꼭 글로 써줘요."
잠시 침묵한 H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는 역에서 헤어졌다. 나는 '힘내세요'라는 한 마디를 그녀에게 건넸다. 짧고 식상한 단어, 하지만 단어 원형대로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H 덕분에 '글을 쓴다'라는 일에 대해 좀 더 진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막연했던 방향성이 그 하루의 경험으로 좀 더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타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믿고 맡길 정도로, 충분한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을까? 기자 아카데미 활동의 무게감도 한층 무거워졌다.
도쿄에서 돌아온 뒤, 복학을 하고 4학년을 마무리하기 전 아카데미 활동을 하던 월간지 편집부에 정식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 해에는 YWCA 모임에서 받았던 도움을 한국에서 지내고 있던 일본 대학생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한국과 일본 대학생들의 문화, 언어 교류 모임을 만들어 3년 정도 운영했다.
아직 H의 이야기를 글로 쓰지 못했다. 항상 아직 나는 그럴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고 미뤄왔고 그 날 H의 이야기가 담긴 녹음테이프는 아직 내 서랍 안에 고이 잠들어 있다. 최근에야 잠을 줄이고 새벽 시간에 노트북을 꺼내 조금씩 글을 써보기 시작했다. 글을 쓴 지가 오랜만이라, 녹슨 재봉틀의 먼지를 털어내고 어색해진 재봉질을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다.
뭐 중요한 건 일단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싶다. '타닥타닥' 새벽의 자판 소리는 참 기분 좋은 경쾌감을 준다.
** 계획된 우연 이론이 선호하는 다섯 가지 학습기술, '호기심', '인내성', '유연성', '낙관성', '위험 감수'는 한 마디로 '젊음의 특성'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1997년 IMF가 불러온 사회의 경직은 지금의 대학생들에겐 담담히 우연한 기회를 관찰할 수 있는 시야를 많이 거두어 간 것 같아 아쉽고, 괜히 미안한 감정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신입 직원을 뽑기 위해 이력서를 볼 때는 우연에 대한 개방성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콘텐츠를 만들고 마케팅을 할 이들에게는 영어 점수보다 더 점수를 주고 싶은 영역이다. 이는 그 사람의, 앞으로의 확장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