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으로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
다양한 일을 해왔지만, 프리랜서가 아닌 회사의 일원으로서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입사, 혹은 이직이라는 관문이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자기소개서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해온 일들에 대한 얘기를 하기 전에 그 일을 할 수 있게 된 자기소개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면접 막바지, 회사 대표님은 내가 제출했던 자기소개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원자 노씨. 당신 자기소개서에는 스토리가 있네요."
처음이었다. 자기소개서 안의 팩트가 아닌 자기소개서 자체에 대한 평가를 받았던 건. 그것도 40대에. 잠시 이 자리, '자기소개서 공모전 평가 자린가?'하는 공상에 빠졌다가 대표님의 이 한마디에 그 생각의 굴레에서 화들짝 빠져나왔다.
"오타 몇 개가 있다는 거 빼면."
'헉...'
나는 지금 위의 면접을 봤던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자기소개란 그 채용에 지원한 이 사람, 저 사람 말고 나를 채용해 달라는 '설득'을 목표로 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리고 그 설득에 내 자기소개'서'가 큰 영향을 줬으니 일단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입사 후 대표님은 내 보고서의 구독자가 되어 작성할 때마다 내겐 특별히 스토리를 강조하신다. 마케터로 입사를 했는데 '여기, 잡지사 편집부인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콘텐츠기획자로서 글을 쓰기 때문에 굳이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만) 난 자기소개서에서 스토리텔링을 중요시한다. 스토리텔링은 한 마디로 '이야기(스토리)를 말하는(텔링)' 것이다. 흠, 너무 단순한 것 같아, 아래 긴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스토리텔링에서의 스토리 즉, 이야기는 웹툰이나 드라마를 생각하면 된다. 인물이 나오고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성장해 결국 목표를 달성하거나 갈등을 해결하거나 어느 분야에 정점에 다다르는. 즉 인물과 사건과 시간, 이것들이 엮인 하나의 서사다.
'나에게 그런 스토리가 있을리가...'라 좌절하지 말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줬을 때 흥미로운 '나의 이야기'가 있다. 실감을 하고 싶다면 목요일 9시, 번화가의 손님들이 적당히 자리를 채우고 있는 술집에 앉아 입 대신 귀를 열어보라. 모두들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술집에서 한 시간 동안 모든 테이블의 이야기를 녹취해 글로 옮겨보면 책 한 권은 나오겠다는.)
하지만 자기소개서를 그런 이야기들로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술자리에서 상대방과의 공감을 목표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고 자기소개서는 나를 뽑아달라는 하소연의 커뮤니케이션이니 목표 자체가 다르다.
몇 번의 이직을 하면서 가장 힘든 건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매번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력사항은 '복붙'을 하지만 자기소개서는 지원하는 회사의 업무 분야나 추구하는 가치, 포트폴리오 등을 보면서 내 자기소개서를 볼, 즉 내 이야기를 들을 대상을 '한 명의 사람'으로 구체화한 뒤 마치 그를 앞에 앉혀 놓고 들려주듯이 작성을 한다. 내 작성 방법은 좀더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향하는 것과 상대방이 바라는 것, 이 둘이 일치하는 지점을 성장의 목표로 놓고 자기소개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내 인생의 구체적인 사건 Top 100(농담이다. 그렇게 많지 않다...) 중에 5개 정도를 골라 시간 순으로 줄을 세운다. 그리고 이 사건들과 성장의 목표가 맥락을 이룰 수 있도록 엮어서 이야기를 만든다.
여기까지 얘기를 하면 '뭐야? 소설을 쓰라는 건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소개서의 상대방은 (대부분) 시니컬한 소수다. 그들에게 문서로 '말을 해야'한다. 그래서 '-습니다.'와 같이 구어체가 되야한다.
경력자들의 자기소개서를 받다 보면, 요즘 트렌드가 심플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보니 숫자를 붙여가며 리스트 형태로 작성해 제출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경쟁률이 치열하다 보니 길게 쓴 자기소개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테니 최대한 빠르게 자신을 파악할 수 있는 키워드를 배치하자는 마음에 그런 자기소개서가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작성할 경우 이런 문제들이 있다.
(1) 동일한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하는 사람들, 해온 일은 다 비슷비슷하다. 내용들이 맥락을 이루지 못한 자기소개서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2) 팀에서 사용할 전자제품의 스팩을 보려 하는 게 아니라 지원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다. 즉, 우리 팀원들과 함께 일 할 사람을 뽑는 것이다. 즉 그가 누구인지, 또 성장의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지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스토리텔링을 적용한 자기소개서는 힘을 발휘한다.
보통 채용을 진행할 때는 다수의 온라인 지원자들 중에서 1차로 소수의 후보를 걸러낸다. 이때 면접에 참여할 이들은 최종 면접 대상을 선발하기 위해 회의를 진행하는데, 이 바쁜 사람들이 보고서 작성을 위해 논문을 보듯 자기소개서들을 보지는 못한다. 게다가 내용들이 다 비슷하다면? 그래서 쉽게 읽히고 흥미로우며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것이다. 그 장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대한 이해도와 수용도를 높일 수 있다.
(2) '각인 효과'라는 큰 힘을 갖게 된다.
(3) 이야기의 본질인 '구전'이 용이하다.
그렇게 서류전형이 통과되어 면접을 보게 된다면 첫 인사로 당당히 말해보자!
"궁금하셨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접니다!"
궁금하지 않았으면 안 뽑지 않았을까? 흠... 자칫 썰렁한 면접의 시작이 될 수도.
그런데 20대의 자기소개서는 좀 다르지 않을까?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상대적으로 빈곤할 수밖에 없는 소재일 것이다. 물론 그만큼 기대치도 낮겠지만 말이다.
이번에 (수줍게도) 내 20대의 첫 자기소개서를 소개하려 한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을 했던 (꽤 잘 나가던) 잡지사의 기자아카데미 지원을 위해 작성했던 글이다. 내가 가진 지극히 빈곤했던 소재를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경역학 전공, 미술동아리 활동, 농구, 당구, 스타크래프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끼적거리던 몇 편의 어설픈 픽션.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이런 방향을 정했다.
'1인칭으로 쓴 픽션, 그럼 그 주인공은 바로 나 아닌가? 이야기 속에 넣은 나니까 꾸밈없이 과도하게 순수한 나. 정면돌파다! 픽션의 나로 현실의 나를 소개하자!'
그래서 아래와 같은 자기소개서가 나오게 된다. (기대치를 한껏 낮추고 봐주시길.)
저는 H대학교 경영학과 3년을 마시고 현재는 휴학 중인 백수입니다.
취미라고 한다면 글을 좀 끄적이는 거랄까요? 아니 이 표현보다는 더 잘 어울리는 게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아! 추상적인 생각들을 어떠한 형태로 형상화 시키는 걸 즐긴다고나 할까요?
이런 취미를 갖게 된 것은 아마 동아리 생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 학교 미술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년 동안 회장도 했었구요. 그리고 그곳에서의 여러 경험들이 그런 취미를 만들어 주게 되었나 봅니다.
전 여행을 좋아합니다. 특히 아무런 계획 없이, 또 그런 여행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를 애지중지 하구요.
이러한 분위기로 알 수 있듯이 술 또한 저에게선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죠.
또한 전 어학을 좋아합니다. 사람을 좋아해서 좀더 많은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기 위해선 필수가 아닐까 해서요.
아 그리고 전 왼손잡이입니다. 이건 별로 관심이 없는 사항이시겠지만, 제가 남들과 가장 구별이 되는 점이라고 전 생각하기에. 흔치 않은 오리지널 왼손잡이. 이 왼손을 지키기 위해 어렸을 땐, 가족들의 온갖 구박을 견디어내야 했지요. 그런 왼손이기에 제 신체에서 가장 아끼는 부분입니다.
이린 저런 말들을 너무 두서 없이 들어 놓은 것 같네요. 저... 제가 쓴 글을 가지고 저의 소개를 해도 될까요? 기사와는 별개지만 저를 보여드리는 데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첨부를 하겠습니다.
<하룻밤, 한 인생>이라는 짧은 이야기인데, 두 가지 상상을 기초로 쓰게 됐습니다.
첫 번째, '술 취한 모르는 사람을 부축해서 가게 되었을 때 그 사람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인가?'
두 번째, '난 이웃에 사는 사람의 얼굴도 모른다. 그린데 그 사람과 제 3의 장소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냥 이 글을 저의 소개서라 생각하고 봐 주세요... 원래 이런 글에 그 사람의 성격과 심리가 잘 드러나는 거니까요. 그럼 잘 부탁 드립니다.
<하룻밤, 한 인생>
드디어 중간고사가 막을 내렸다.
(아내 검열 중)
삐-!
삐-!
삐-!
삐이익~!
한바닥 적었던 픽션 부분은 '아내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유는 길고, 암울하기 때문이다...
IMF와 세기말을 품었던 내 20대의 그 소름돋는 1인칭 자기소개 픽션은 굳이 볼 사람들만 아래 링크를 통해 봐주시길.
이런 소름돋는 자기소개서로 인생의 첫 기회를 잡았다니. 과연 편집부의 그들은 이 자기소개서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분명한 건 개성있는 자기소개서 아닌가? 내 인생의 '이야기'가 없으니 아예 이야기를 만들어 나를 소개하는, 과도한 스토리텔링 자기소개서. 중요한 건, '눈에 띄었다', 혹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거겠지. 뭐 20대니까 이런 과감함이 통하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그 편집부는 편견을 중시하고 개성을 존중하는 곳이었으니.
최근에 김누리 중앙대 교수의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됐다.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스팩'이란 단어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분명 제각기 타고난 재주가 다를텐데 수많은 대학생들이 공무원 시험이란 동일한 목표를 향해 많은 시간 동안 같은 지식을 입력하는 데 반짝이는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내 개인적인 아쉬움이기도 하다. 너무 소모적이기 때문이다.
엉뚱하지만,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걸 목표로 삼아보는 건 어떨까? (앞선 이야기에서 언급했지만) 자신에게 온 우연한 기회들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고 몰입해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루고 그 경험들을 마치 일기처럼 자기소개서에 업데이트 해나가는 것, 이런 스토리텔러로서의 인생도 재밌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