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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보 다리’, 그 이상의 ‘론다(Ronda)’

[유한한 영국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스페인, 론다

by 노현지

마드리드를 떠나 우리는 태양이 더욱 뜨거운 스페인 남쪽 안달루시아(Andalucía) 지방으로 향했다. 기차 창문으로 스페인의 들판이 스쳐갔다. 스페인은 하늘 뿐 아니라 땅의 모습도 영국과 달랐다.

영국, 특히 잉글랜드 남중부 지역을 여행할 때면 늘 창밖의 비옥한 들판에 감탄하곤 한다. 영국의 들판에는 비옥함을 넘어 유려함이 있다. 초록 들판 위의 농작물과 잔디 뿐 아니라 나무들 조차 촘촘하고 섬세하다. 그 덕분에 음울한 잿빛 하늘 아래서도 고상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영국의 겨울 들판은 여름이 되면 무성한 잎들로 윤택과 풍요의 옷을 입는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7월이었다.) 영국의 윤기나는 너른 들판을 보며 얼마나 부러웠는지.


“얘들아, 저기 좀 봐. 한국에는 없는 풍경이야.”


< 영국 잉글랜드 남부의 윤택한 들판 >


물론 서울에 살아 한국의 들판도 자주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10살, 6살)은 당연히 별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스페인의 들판 앞에서 영국의 들판은 조금 큰 공원 같은 수준이었다. 스페인의 들판은 들판 끝에 또 들판, 그 뒤에 또 이어지는 들판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다 거칠고 짙은 초록의 땅, 혹은 황량한 황무지. 그러다 빽빽한 나무 숲이 나오면 아이들이 소리쳤다.

“우와~ 정글 같다~~.”

어린이책에 자주 등장하는 정글(Rain Forest) 덕분에 아이들은 비옥한 농경지 보다 정글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넓은 땅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가진 스페인의 자연이었다.


< 세비야행 기차 안에서 찍은 사진, 아쉽게 정글 같은 장면은 감탄하느라 담지 못했다. >




세비야(Sevilla) 기차역에서 내려 렌터카를 타고, 대문호 ‘헤밍웨이(Hemingway)’와 ‘릴케(Lilke)’도 극찬했다는 협곡 위의 작은 도시 ‘론다(Ronda)’로 가는 길은 훨씬 거칠고 높았다. 들판이 아닌 산이 등장했고, 특히 초록색 보다 황갈색의 비중이 높은 험준한 돌산이 자주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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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4_141818.jpg < '론다'로 이어지는 길 >


주변으로 보이는 지형이 거칠어 질수록 협곡 위의 도시로 올라서는 길이 어떨지 두근거렸다. 난간도 없는 산비탈길을 차로 지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문호들의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론다’를 검색하는 순간 화면을 빼곡히 채우는 사진의 숫자만큼 많은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론다로 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사람의 심보가 참 간사한 것이, 길이 험할까 걱정을 했으면서도 기대보다 잘 닦인 도로를 통과해 론다의 중심, 작은 광장에 들어서자 예쁘지만 평범해 보이는 마을에 조금 당황했다. 구불구불 경사진 도로에서도 ‘협곡’의 느낌을 받지 못했다. 거친 협곡의 감동은 어디에 있는가.

일단 광장 바로 옆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론다는 규모도 작고, 깊은 협곡과 다리가 주요 관광대상이라 당일 혹은 반나절만 머무는 일정으로 많이들 찾는다고 했다. 그러자면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이동을 해야 하는데,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 묵어 가기로 했다. 더하여 왠지 이 작은 도시에 유명한 다리,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헤밍웨이와 릴케가 괜히 극찬했을까. 대작가들의 안목을 믿고 하룻밤 묵으며 론다의 매력을 느껴보리라.


< 숙소에서 내다본 론다의 스페인 광장. 한적한 작은 도시 풍경이다. >


그렇게 기대에 차서 ‘그라나다(Granada)’도, ‘네르하(Nerja)’도 기약 없는 이다음 언젠가로 미루고 선택한 론다였는데 방금 본 첫인상이 밋밋해 살짝 후회가 밀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 무엇을 판단하기엔 너무 이르다. 곧 해가 지면 서늘해질 산 속 마을 저녁 기온에 대비해 옷을 두 겹으로 겹쳐 입고, 론다의 최고 인기스타 ‘엘 타호(El Tajo)’ 협곡을 찾아 나섰다.


지도 상으로 협곡은 숙소가 있는 광장 바로 앞에 있었다. 여기서 몇 걸음만 가면 120m 협곡과 장엄한 다리가 있다고? 의문을 품고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열 몇 걸음을 앞으로 걸어가자 저편으로 보이는 마을의 건물들이 위아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어어? 저거?! 갈라진 시야 위쪽에는 건물들이, 아래로는 깊은 절벽이 드러났다.

광장에서 이어진 작은 다리에 다다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 호흡 가득 들이마시고 숨을 멈췄다. 다리 난간 사이로 얼핏 보이는 장면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난간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허억!!!!!!!!!!”


외마디의 깊은 탄식의 소리를 내뱉으며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 한 발 물러섰다. 온몸이 쭈뼛거리고 오금이 저렸다. 멀리서는 심심해 보이던 그 작은 다리가 바로 세계의 여행객들을 론다로 부르는 ‘누에보 다리(New Bridge)’였다. 이 말인즉슨 우리가 120m 협곡 위에 서 있다는 뜻이다.


< 누에보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본 엘 타호 협곡 바닥 >


다시 한 번 협곡을 제대로 보기 위해 난간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거의 기다시피 바닥에 몸을 붙이고 고개를 쭉 빼고 다리 아래를 내려보았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난간 사이로 뻗은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손가락이 빨개졌다.

“어어어, 여봉봉. 그러다 핸드폰 떨어트린다!!!!”

여전히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남편이 내 핸드폰을 걱정했다. 나 역시 핸드폰을 떨어트릴 것 같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래도 담고 싶은 광경이었다. 감히 내가 이런 다리를 몇 걸음 앞에 두고 실망이네 어쩌네 했던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첫인상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는 버릇은 마흔이 넘도록 못 고쳤다. 이 아찔한 절경이 바로 협곡 위의 마을 ‘론다’였다!



론다는 가파른 협곡을 사이에 두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이 두 곳을 세 개의 다리가 잇고 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늦게 지어진 것이 이 누에보 다리(새로운 다리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기에 가장 장엄한 풍경을 선사한다. 그래서 제일 유명해졌다(나머지 다리들은 협곡이 얕아지는 곳에 위치한 비교적 낮은 다리이며,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협곡의 깊이와 아찔함을 느끼기에는 다리 위가 제격이지만, 협곡과 그 사이를 잇는 누에보 다리, 그리고 협곡 끝에 서 있는 건물들을 한 눈에 담으려면 다리를 지나 구시가지의 산책로로 내려가는 것이 좋다.


산책로로 향하는 구시가지의 골목으로 들어서자, 방금 본 간담이 서늘해지는 협곡의 날카로움과 다르게 해사하고 정갈한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다정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곳이 협곡 맞은 편의 절벽 위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어여쁜 반전의 매력이었다.



마을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옆으로 좁은 흙비탈길이 나온다. 협곡의 아래쪽으로 향하는 샛길이다.그 비탈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인터넷에서 숱하게 본 ‘론다’의 대표 사진, 누에보 다리를 멀리서 바라보는 사진과 같은 각도에서 엘 타호 협곡과 다리를 감상할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

많은 여행객들이 오가는 길이었지만 난간도 없는 미끄러운 흙비탈길을 내려가자니 역시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늘 앞서 뛰어가고 싶어하는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쉼없이 소리친 ‘조심해’란 말은 어쩌면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사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놀이동산에 가면 ‘회전목마’만 네 번씩 타는 작은 심장의 소유자였다(언젠가 친구 손에 끌려 에버랜드 롤러코스터를 탔을 땐 짧은 스무 몇 해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가며 입에서는 ‘엄마’가, 눈에서는 눈물이 나와 뺨을 타고 흘렀더랬다.).

경사진 비탈길이 평평해지는 언덕마루에 먼저 온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이제 막 걸어오는 우리를 본 한 노부부가 사진 찍기에 좋은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그 옆의 무리도 우리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잠시 물러나 주었다. 아름다운 경치 앞에서는 사람의 마음도 아름다워지나 보다.


< '론다' 대표 사진 (검색창에 '론다'를 쳐 보세요!) >


누에보 다리를 더 잘 담기 위해 언덕마루 가장자리로 다가서자, ‘엄마야’ 발 아래가 절벽이다. 누에보 다리 위에서 보던 높이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붙잡을 것 없는 허공 아래 절벽과 협곡이 있었다. 또 한 번 심장이 철렁 내려 앉고, 간담이 서늘해지고, 오금이 저렸다. 나 뿐 아니라 남편도, 두 아이도 모두 두려움의 탄성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고, 우리 옆에서 장성한 아들과 함께 여행사진을 남기던 어느 아버지는 불시에 아들의 등을 치며 놀래 키는 장난을 쳤다가 가족애를 잃을 뻔 했다.

그때 몇 걸음 떨어진 절벽에 걸터앉아 사과를 먹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여유로운지 그녀가 앉은 절벽 아래에 협곡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나 발받침대가 있는 줄 알았다. 슬쩍 뒤로 다가가 흘깃 아래를 바라보니, 그 아래도 아찔한 절벽인 것은 똑 같았다. 세상에 저런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언니처럼 절벽에 걸터앉을 자신은 없어, 두 걸음 뒤에 있는 얕은 바위 위에 잠시 앉았다.


< 오늘부터 '언니'로 모시기로 한, 이름 모를 강심장의 그녀 >


눈앞으로 절벽과 협곡, 그 사이를 잇는 누에보 다리가 병풍처럼 쫙- 펼쳐졌다. 황갈색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흰색의 단정한 집들이 실루엣처럼 솟아 있었다. 저렇게 높은 곳에 처음 도시를 만든 사람들을 생각했다. 우리가 감탄을 연발하며 카메라에 담아가는 이 협곡은 누군가에겐 목숨을 지키기 위한 요새였다. 아슬아슬한 절벽 위가 차라리 안전했던 침략과 혼돈의 시대. 그 시대가 끝나고 언제든, 누구나 오갈 수 있는 다리를 지어도 안전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후손들을 보면서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한때는 외부인을 거부했던 협곡이 이제는 외부인을 부르는 존재가 된 상전벽해의 평화로운 세상을.

저물 녘 노을이 드리워 더욱 그윽해진 누에보 다리를 바라보면 현재 전 세계인들(물론 반대편의 나라와 그들의 친구 나라는 제외)이 한 마음으로 평화를 염원하고 있는 한 나라를 떠올렸다. 여행을 하는 중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우리가 한가로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미안해지는 소식이었다. 최첨단 무기가 개발된 현대의 전쟁에서는 무용하겠지만, 이 요새 같은 협곡과 절벽을 옮겨 다 우크라이나 사람들 앞에 놓아주고 싶었다. 그들에게도 하루 빨리 상전벽해의 평화로운 세상이 닿기를 기도한다.


< 우크라이나가 평화를 되찾길 기도합니다 >




다음 날 아침은 엘 타호 협곡의 바닥으로 향했다. 오금 저리는 산비탈길을 벌벌 떨며 내려간 것은 아니고(정말 다행이다!), 협곡 위의 또 다른 관광장소인 ‘모로왕의 집(Casa Del Rey Moro)’에 가면 협곡의 바닥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있었다.


< 엘 타호 협곡 바닥으로 가는 비밀통로 입구 >


‘모로왕의 집’은 옛날 ‘모로왕’이란 사람의 별장이었다고 하는데 대단한 위인은 아닌지 그에 대한 정보가 많이 나오진 않는다(오디오 가이드가 있었지만, 한국어 지원이 되지 않아 들어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없을 듯 하여 ‘패쑤’.). 관람 대상도 모로왕의 업적이나 집 자체가 아니라 협곡 아래까지 연결되도록 만들어 둔, 계단으로 된 통로가 메인이다. 혹은 낯선 여행객들을 신경쓰지 않고 느긋하게 정원을 산책하는 블루 컬러의 꿩 무리들(알록달록 꼬리 부채를 쫙 별치는 진짜 꿩들이 정원을 자유로이 돌아다닌다!). 어쨌든 그 덕분에 우리가 엘 타호 협곡 바닥까지 내려가 볼 수 있으니 이 자체로 역사에 남을 엄청난 업적이라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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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와의 집' 정원의 터줏대감인 오묘한 블루 컬러의 꿩 >


어두침침하고 물기 젖어 축축한 오래된 계단을 걸어 내려갈 때는, 조금 과하게 몰입하면 잠시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 수도 있다. 그리고 협곡 바닥에 도착하면, 어제 오후 내려 다 본 협곡을 반대로 올려 다 보며 그 깊이와 절벽 위의 삶을 향해 감탄사를 쏟아 내게 된다. 그 방향의 감탄에는 아찔함 대신 아득함이 있었다.


< 엘 타호 협곡 바닥으로 가는 계단 >

< 엘 타호 협곡 바닥에서 올려다 본 '론다'의 파란 하늘 >


내려갈 땐 ‘탐험심’을 부르던 계단은 올라갈 땐 ‘탄식’을 불렀다. 20층 건물 높이쯤 된다는 계단을 쉬지 않고(중간에 쉴 곳이 없다.) 걸어 올라오니 너무 힘들어 잠시 쉬어 가야만 했다. 후문 끝에 자리한 ‘바(Bar)’의 존재 목적이 이것이로구나.



파란 하늘을 지붕 삼아, 엘 타호 협곡을 벽 삼아, 절벽 위로 구비구비 물결 치는 예쁜 하얀 집들을 액자 삼아, 살짝 서늘한 온도의 바람을 맞으면 마시는 에스프레소의 맛이 달콤했다. 풍경에 취해 생각 없이 마시다 보니 금세 에스프레소 잔이 비었다. 작은 잔에 담긴 딱 한 모금 양의 에스프레소는 아무리 아껴 먹으려고 해도 늘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일장춘몽(一場春夢)’ 같은 에스프레소라고 부르곤 한다. 한바탕의 봄 꿈처럼 짧고 아쉬운 에스프레소.



어제 저녁, 그리고 오늘 오전 머물고 떠나는 ‘론다’에서의 시간 역시 일장춘몽 같다. 에스프레소는 언제든 쉽게 다시 마실 수 있지만, 이곳은 언제 다시 올지 기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에스프레소 보다 더 아쉬운 ‘일장춘몽’.


“’론다’가 당일이나 반나절 짧게 보고 가는 도시라더니, 아닌 거 같아. 만약에 다시 ‘론다’에 온다면 나는 인터넷에서 알려주는 ‘가 볼만한 곳’이나 맛집 말고, 여기 이 ‘바(Bar)’에 와서 하루 종일 저 마을만 보다가 갈 거야. 그러다 좀 지겨워지면 저 마을 길 사이사이를 직접 걸어다니는 거지. 저기 보이는 저 마을 정말 너무 예쁘지 않아?!”


늦어도 오후 2시에는 론다를 떠나 ‘세비야’로 향해야 하는데, 오늘 오전에야 뒤늦게 발견한 협곡의 뒤편 너머로 켜켜이 쌓인 정갈한 집과 골목 들이 예쁘고 예뻐서, 아직 못 걸어 본 마을 길이 아쉬워서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진짜 ‘론다’는 저 하얀 집들과 골목 사이사이에 있을 것이다. 그 옛날, 적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절벽 위에 지은 도시 ‘론다’가 이제는 달라진 평화로운 세상에서도 여전히 ‘론다’일 수 있는 것은 협곡 위의 아슬아슬함과 불편을 감수하고, 높은 다리를 지어서라도 이어가고 싶었던, 아니, 높은 다리가 가져온 유명세 이전부터 ‘론다’라는 마을을 지켜온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평범한 삶일 것이기에. 언젠가 꼭 다시 와서 일주일쯤 목적지 없이 서성이다 가고 싶은 론다. 우리의 인연이 여기서 끝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빌며 세비야를 향해 출발했다.



[유한한 영국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스페인, 론다 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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