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영국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이탈리아, 로마
영국의 4월은 여행을 떠나기에 딱 좋은 시기다. ‘부활절(Easter)’을 전후로 하여 2주간의 학교 방학이 있고, 다시 살아 우리에게 오신 예수처럼 모든 메말라 있는 것들이 소생하는 봄이 찾아와 여행하기에 더 없이 좋은 날씨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날씨에 인색한 영국은 아직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탈리아(Italy)’로 떠났다.
사실 내게 이탈리아는 꼭 가보고 싶은 나라는 아니었다. 보통 내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곳은 ‘백야’나 ‘오로라(Aurora)’ 같은 극한의 자연현상이 있는 나라(보통 북유럽이다)나, 좋아하는 영화 혹은 소설 등의 배경이 된 도시(예를 들면,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리스본(Lisbon)이나 ‘비 포 선라이즈’의 비엔나(Vienna) 같은) 등 나의 감성, 또 감동과 얽혀 있는 드라마적인 스토리가 있는 곳들이었다.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행각을 벌이는 고대 신들의 도시, 이천년이 넘은 역사적 유적이 있는 도시, 혹은 성스러운 카톨릭(Catholic)의 도시는 그렇게 나를 끌어당기지 않았다.
그러다 큰 기대없이 떠났다가 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지난 2월의 스페인(Spain)을 떠올리고는, 이탈리아에도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무엇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 수많은 세계인들이 괜히 이탈리아로 향하는 것은 아니리라, 적어도 날씨와 음식만은 나를 만족시키리라 기대하며 이탈리아 여행을 결심했다. 무엇보다 나와 달리 ‘어린이용’ 그리스로마 신화에 푹 빠져 있는, 만 9살인 딸이 ‘신화의 나라’ 이탈리아에 무척 가보고 싶어했다. 딸은 특히 피렌체(Firenze)를 고대했는데, 피렌체의 ‘우피치(Uffizi) 미술관’에 딸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인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비너스의 탄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2주간의 긴 여행일정을 짜기 위해 이탈리아를 한 번 펼치자, 거기엔 일단 이탈리아에 발을 딛었으면 꼭 방문해야 할 것 같은 유명한 도시가 ‘수두룩 빽빽’ 했다. ‘로마(Rome)’부터 시작해, 피사의 사탑(Leaning Tower of Pisa)이 있는 ‘피사(Pisa)’, 붉은 두오모(Duomo)가 설레는 ‘피렌체’, 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세계의 패션 트렌드를 선도하는 ‘밀라노(Milano)’, 피자가 맛있기로 한국까지 소문난 ‘나폴리(Napoli)’, 그 옆의 파스타 맛집으로 꼭 ‘돌아가야’ 할 것 같은 ‘소렌토(Sorento)’,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아말피(Amalfi) 해안’, 화산재에 묻혔던 고대도시 ‘폼페이(Pompeii)’, 그리고 내겐 무라카미 하루키가 열심히 달리기 하던 섬으로 기억되는 ‘시칠리아(Sicilia)’ 등등.
“와, 이래서 관광대국이라고 하는구나!”
이탈리아가 이탈리아인 이유를 지도로 확인하고, (이탈리아는 신경도 안 쓰겠지만) 언어로 인정한 뒤, 수많은 유명 도시들 중에서 한정된 여행 기간과 동선, 이동시간, 아이들의 인내심 등을 고려해 몇 군데를 추려 우리의 여행 일정을 완성했다. 다음과 같다.
로마(3박) -> 피사(1박) -> 피렌체(3박) -> 베네치아(2박) -> 중부 내륙 작은 마을(1박, 쉬어가기) -> 포지타노(2박) -> 나폴리(1박) -> 다시, 로마
꼭 가고 싶은 곳, 손에 꼽히게 유명한 도시들은 포함된 일정이었기에 대체로 만족스러웠지만 밀라노를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고, 베네치아에서 포지타노로 내려가는 길이 너무 멀어 어쩔 수 없이, 굳이 궁금하지도 않은 중부 내륙에서 하루 쉬어 가야 하는 것이 아까웠다. 그러나 렌터카 안에서 지겨움에 절규를 할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것이 최선, 어쨌거나 이탈리아에 가서 오리지널 피자와 해산물 파스타를 먹을 생각에 신난 우리(남편과 나)와 1일 1젤라또를 먹을 생각에 우리보다 더 신난 아이들, 온 가족 모두 여행이 주는 설렘으로 뜰 떠 로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은은하게 노을이 지는 해질녘 로마의 첫인상은, ‘쓰레기’였다. ‘쓰레기처럼 별로’라는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말그대로 쓰레기. 공항버스를 타고 로마 시내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처음 우리 눈에 들어온 거리에는, 인도와 차도 구분 없이, 온갖 쓰레기가 마치 누군가 쓰레기통을 일부러 엎어 둔 것처럼 나뒹굴고 있었다(지금 쓰레기가 흩어져 있는 길을 상상해 보는가? 거기에 쓰레기통 3개쯤을 더 부어야 할 것이다.). 공항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버스 창문으로 언뜻언뜻 보이던 허물어진 고대의 돌벽을 발견하고 돌의 숨구멍 하나하나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할 준비를 하며 ‘로마’에 도착한 감흥을 느끼려는 찰나였다. 그리고 그 차오르던 감흥이 찌푸린 얼굴과 악취가 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숨을 참는 불편함으로 ‘바사삭’ 구겨진 것도 찰나였다.
버려진 쓰레기를 요리조리 피해 남편과 내가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호텔을 찾아 가는 길이었다. 오래된 도시인 만큼 좁은 골목이 계속 이어졌다. 그냥도 좁은 골목에 레스토랑에서 내놓은 테이블과 길가에 주차된 차들로 길은 더 좁았다. 그러나 유럽 도시에서 이런 길은 흔했기에 처음엔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테이블과 차들 사이로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가며 캐리어를 끌고 조심조심 걸어가는데 반대편 방향에서 차가 달려왔다. ‘쌩~~’
사람이 지나가고 있으니 근처에 오면 속도를 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빠르게도 지나갔다. 놀라서 아이들을 뒤로 챙기며 남아 있지도 않은 골목의 벽쪽 공간으로 더 붙어서 걸었다. 인도와 차도가 잘 구분 되지 않는 골목에는 우리 말고도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차들도 많았다. ‘쌩’하게 지나간 차에 뒤이어 달려오는 차들도 속도를 잘 줄이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골목을 빠져나와 차도와 인도가 확실히 구분되는 넓은 사거리에 이르자 안도감이 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차와 부딪혀 병원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ㄴ’자로 두 번만 더 건너면 호텔이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고 무섭게 달려오던 차들이 멈춘 것을 확인한 후, 횡단보도 위로 발을 내딛었다. 세 걸음도 가지 않아 귀를 찢는 요란한 경적이 울렸다.
“빵-빵-빵----“
신호대기선 제일 앞에 서 있던 버스였다. 깜짝 놀란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 쫓기듯이 서둘러 반대편 차선을 향해 몇 걸음 더 전진했고, 그러자 방금 경적을 울렸던 버스가 초록 신호인 것도 무시하고, 우리가 아직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않은 것도 무시하고, 우리 뒤쪽으로 바짝 붙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 버스의 뒤를 이어 다른 차들 역시 줄줄이 내달린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저 버스가 초록불에 지나는 우리 보고 더 빨리 지나가라고 빵빵 거린 거야? 아우씨, 저 망할 놈의 버스!!!”
이어지는 두 번째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상황은 별 반 다르지 않았다. 도로 위의 차들은 신호대기선 바로 앞까지 속도를 내며 달려왔고, 사람이 지나가기 무섭게 속도를 붙여 출발했다. 로마의 첫날 밤은 그렇게 지저분하고, 위협적일만큼 급했다. 그리고 실망스러웠다.
로마의 둘째 날이 밝고,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어제의 실망스런 로마의 잔상이 남아 있었지만 짧은 첫인상이 앞으로의 긴 여행을 망치게 둘 순 없어, 아침에 캐리어 속에서 구겨진 옷의 주름을 탈탈 털어 입을 때 구겨진 마음도 탈탈 털어 내고 일부러 더욱 경쾌한 발걸음으로 호텔을 나섰다.
“와ㅡ”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햇살이 펑펑 내리 쬐는 파란 하늘 아래, 빛나는 트레비(Trevi) 분수에는 물보다 사람이 많았다. 트레비 분수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물이 아니라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코로나 때문에 아시아 지역에서 여행을 덜 오는데도 이 정도면 그전에는 과연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갑갑했다. 분수를 조금 감상할라 치면 앞으로, 옆으로, 뒤로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트레비 분수의 멋스러움, 웅장함, 유려함 등을 도무지 느낄 수가 없었다.
여행자의 필수 코스, 사진 촬영은 더욱 험난했다. 혼자 온 사람도 옆 사람과 다정한 투샷을, 그것도 상대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도 찍을 수 있는, 아니 찍어야만 하는 곳이 트레비 분수 앞이다. 그만큼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을 겨우겨우 피해 사진을 찍으면, 대신 주인공 트레비 분수는 일부만 담겼다.
그래도 물 건너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조각상들은 누구나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볼 수 있는 점이 벽을 등지고 거대하게 세워진 트레비 분수의 장점이었다. 분수 위쪽 조각상에서 딸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 ‘바다의 신, 넵튠(Neptune)’과 ‘그의 아들, 트리톤(Triton)’을 찾아내며 신화의 도시로 여행 온 것을 즐겼다.
“근데 우리 젤라또 아이스크림은 언제 먹어?”
누나와 달리 둘째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다짐받고 다짐받은 젤라또(Gelato)에 대해 또한 번 물었다. 여행 오기 전부터 정해진 약속이었다. 트레비 분수 앞에서 젤라또 먹기. 그리고, 로마에서는 매일 젤라또 먹기. 젤라또 얘기가 나오자 신화에 빠져 있던 딸도 현실로 돌아와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트레비 분수를 둘러싼 여러 개의 젤라또 가게 중, 사람이 비교적 적은 분수 왼편의 가게로 들어가 각자 원하는 맛을 선택했다. 아이도 어른도, 손잡이에 비해 머리가 큰 젤라또가 바닥으로 떨어질까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심조심 분수 옆 난간으로 가서 트레비 분수를 바라보며 젤라또를 먹었다.
주변에 우리 말고도 젤라또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로마에 처음 오는 우리도 트레비 분수 앞에 가면 젤라또를 사 먹자고 벼르고 있었으니 당연한 모습이지만, 트레비 분수와 젤라또는 어쩌다 연결고리가 생겨 버린 것인지 궁금해지려는 찰나,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우리가 서 있는 난간 아래쪽, 분수대와 훨씬 가까운 공간에서는 젤라또를 먹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경찰의 호루라기였다. 햇살까지 달콤하게 녹아 들 것 같던 달달한 기분이 화들짝 깨졌다. 이후 트레비 분수 뿐 아니라 스페인 계단이나 다른 유명한 관광명소에서도 젤라또를 포함한 음식물을 먹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종종 시끄럽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딘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꼭 이렇게까지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와 강한 제스처로 제지를 해야 했을까? 음, 그럴 수 있다. ‘개인’ 보다 ‘대중’은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조금 더 강하게 제지를 해야 했을 것이다. 내가 답을 냈음에도 여전히 불편한 기분을 느끼는 내가 오히려 묘했다. 귀한 세계적 유적을 깨끗하게 잘 보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나는 그런 규칙을 지키는 것에 단호하게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이 불편한 기분은 뭘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을 찾았다.
그 호루라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들이 소중한 고대 유적을 너무나 아끼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로마 거리 어디를 가든 나뒹굴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거리의 쓰레기들이 떠올랐다. 그리곤 관광수입을 가져다 주는 과거의 유적만 그렇게 아끼지 말고, 현재의 사람들이 사는 거리도 좀 아끼고 관리하면 얼마나 좋겠냐는 아쉬움이 섞인 반감이 들었다. 구겨진 옷을 털 때 털었다고 생각한 실망스런 마음이 좀처럼 털어내 지지 않는 로마였다.
이렇게 내가 로마를 향한 실망스런 마음을 좀처럼 털어내지 못하고 꽁하게 바라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트레비 분수 주변, 로마시대의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 ‘판테온(Pantheon)’과 한때는 거대한 전차 경기장이었던 역사 위에 이제는 근사한 3개의 분수가 흐르는 ‘나보나(Navona) 광장’,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이 젤라또를 야무지게도 먹던 ‘스페인 계단’ 등을 다 구경한 뒤, 콜로세움(Colosseo)과 포로 로마노(Roman Forum),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등 고대 로마의 유적이 남아 있는 대전차경기장 쪽으로 옮겨 왔을 때의 일이다.
화장실이 급하다는 아이를 데리고 공중화장실을 찾을 수가 없어 대전차경기장 인근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아직 점심을 먹기엔 배가 그렇게 고프지 않았지만, 화장실을 쓰려면 뭐라도 먹어야 했고 곧 밥 때가 다가오니 조금만 주문해서 이참에 점심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메뉴판을 살피고 있는데, 직원이 빵 위에 토마토와 루꼴라, 올리브오일이 올려진 접시와 생수 한 병을 가지고 왔다. 남편과 내가 맥주를 마시면 아이들도 음료수를 마시고 싶어하는지라 보통 우리는 레스토랑에서는 물을 잘 시키지 않았다. 생수 한 병에 3유로(약 4천원)로, 비싸기도 비쌌다. 아직 음식을 주문하기 전이라고, 잘못 나온 것 같다는 우리의 말에 그 직원은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It’s free.”
호텔에서는 도시세(호텔을 예약할 때 붙는 부가가치세와는 별개의 세금이다.)를, 음식점에서는 자릿세를 따로 받는 이탈리아에서 물과 스타터(Starter) 메뉴를 무료로 제공하는 음식점이 다 있다니. 우리는 그냥 준다는 음식을 마다하지 않고 받았다. 곧이어 나온 우리가 주문한 파스타의 맛도 썩 훌륭해서 이렇게 좋은 식당의 구글 평점이 왜 낮은 지 모르겠다고 얘기 나누며 즐거운 점심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계산의 시간. 우리의 계산서에는 ‘free’라고 했던 생수 한 병과 스타터 접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엔 황당하고, 나중에 조금 화가 났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그것들을 먹어 버렸다. 거기서 따지고든들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닳고닳은 관광지 장사꾼을 상대로 우리가 이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른 점심이라 주문한 파스타도 음료도 다 먹지 못하고 일어서는 상황에, 먹지 않아도 상관 없었던 빵과 생수값까지 억지로 내야하는 게 억울했지만 남은 일정의 기분을 생각해 계산서에 적힌 돈을 다 지불하고 나왔다.
탁 트인 '대전차경기장'을 바라보니 언짢은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근사했다. 대전차경기장 한 가운데 우뚝 솟은 나무 한 그루와 콜로세움이 있는 방향으로 경기장을 따라 쭉 늘어선 적갈색의 팔라티노(Palatino) 언덕은 광활했다. 텅 빈 경기장, 무너진 건축물이 주는 황량함 위로 내리쬐는 4월의 오후 햇살이 극적이었다.
이것이 로마의 ‘대환장 포인트’다. 너무 짜증이 나는데 멋지고, 너무 짜증이 나는데 맛있다. 로마가 내게 준 지저분하고, 위협적이고, 무례한 경험을 생각하면(위에 언급한 것 말고도 자잘한 불편한 일들이 계속 있었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 당장 떠나도 아쉽지 않을 것 같다가도 고개를 들어 고대의 유적을 바라보면 그 웅장함과 아득함에 나도 모르게 경의를 표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무료라고 했던 음식을 계산서에 넣는 무례한 식당이지만 음식이 맛있었던 것을 부인할 순 없었다. 로마에서 들어간 음식점 중에 맛이 없는 식당이 없었고, 맛이 없는 카페가 없었다. ‘버럭’ 짜증을 내다가 ‘우와’ 감탄하는 부조화의 반복은 이 여행이 즐거운지 아니면 괴로운지 판단할 수 없는 이중적 감정으로 나를 혼란에 빠트렸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에 비해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가 미풍이 되어 불어오는 대전차경기장 흙바닥에서 아이들과 가위바위보 게임을 할 때는 ‘즐거운 편’이었다. 그래, 그까짓 조금 더 낸 돈, 세계인의 문화유산이라고 도심 가운데 넓은 땅을 마음대로 갈아 엎지도 못하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로마 사람들을 위한 여행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이미 우리는 로마에서 충분히 비싼 호텔비와 교통비, 음식비, 심지어 세금까지 내고 있지만 말이다.
덕분에 이어서 본 로마 여행의 상징, 로마 시대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은 로마에 대한 반감 혹은 실망감으로 삐뚤어진 시선을 거치지 않고, 아주 흡족하게 돌아 볼 수 있었다. 다만, 목숨을 건 사람과 사람 간의 싸움, 또 사람과 맹수와의 싸움 등 사람의 목숨과 살기 위한 인간의 본능적이고 처절한 절규를 유흥거리로 삼았던, 잔인한 과거 로마인들의 역사의 일면에 반감이 들었을뿐.
콜로세움을 나서는 길. 저녁해가 힘을 잃어가는 옅은 하늘에 달이 나타나고, 그 달이 콜로세움의 둥근 아치 아래로 동동 떠 있었다. 비인간적인 광기로 가득 찼던 과거와 달리, 세계인의 발길로 가득 찬 지금의 콜로세움은 몇 천 년의 세월을 견뎌 낸 인간의 지혜와 기술의 증거가 되어, 존재 자체로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 목적을 잃었기에 이제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대적으로 콜로세움 보다 유명세가 떨어지는 ‘포로 로마노’는 나에겐 최고의 로마 유적지였다. 화려했던 고대 로마의 중심지, 최고의 지성과 상업과 문화의 교류가 일어났던 곳, 그러나 이제는 폐허가 된 땅. 황량한 땅 위에 군데군데 솟아 있는 기둥과 주춧돌, 반만 남은 돌벽은 상실의 슬픔과 함께 영광의 허무함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포로 로마노는 죽지 않았다. 4월의 포로 로마노에는 보라색 등꽃과 이름 모를 하얀 풀꽃 등 무수한 봄꽃이 돋아나 생명을 다한 땅을 감싸며 다시 숨을 불어 넣고 있었다. 상실과 생명이 뒤섞인 아득하고 향기로운 공존은 끝내, 화려한 역사의 어느 날을 그려보는 상상을 자극했다.
“이 작은 꽃처럼 하얀색 튜닉을 입었대, 로마 사람들은. 그런데 보라색은 아주 귀한 색이라서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 입을 수 있었대.”
우리집 그리스로마 신화 및 로마 역사 전문가인 딸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책으로만 보던 길 위를 꿈결처럼 걸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흰색 옷을 입은 로마 사람들, 보라색 옷을 입은 귀한 신분의 귀족들… 지금 포로 로마노 위에 흰색과 보라색 꽃이 피어 있는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포로 로마노의 봄꽃처럼 이대로 아름답게 로마 여행이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면 로마를 '시작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좋았던 도시'로 기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아닐 수도 있다. 하하.). 하지만 로마는 우리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하긴 무슨 짓을 해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스스로 분수물이 될만큼 ‘미어터지게’ 찾아오니 우리 가족 하나와 절교하는 것 쯤이야 상관없지 싶기도 하다.
방문하기로 계획했던 로마의 마지막 장소까지 다 둘러보고, 공항 근처에 있는 렌터카 대리점으로 갈 예정이었다. 로마 이후 여행할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은 남편이 직접 운전을 해서 이동할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렌터카를 픽업하기로 한 예약 시간보다 늦기도 했고, 캐리어 2개와 온 가족이 각자 하나씩 등에 맨 4개의 백팩을 들고 로마 시내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이동해서, 거기서 버스를 타고 공항까지 간 뒤, 다시 또 셔틀을 타고 렌터카 대리점으로 가는 것이 너무 오래 걸리고 번거로울 것 같아 택시를 탔다.
처음엔 쾌활해 보였던 택시 기사는 운전 내내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통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급하게 속도를 내고, 급하게 멈추고, 급하게 차선을 바꾸다가, 아예 차선을 밟고 달리며 주변 차들을 위협하더니 급기야 중앙차선을 넘어서까지 앞차들을 추월했다. 오해 방지를 위해, 우리는 단 한 번도 빨리 가 달라고 재촉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까지 데리고 있어 불안했지만, 매일 밥 먹고 운전만 하는 사람이니 사고야 낼까 싶어 별 말 없이 조용히 타고 갔다.
렌터카 대리점에 도착하니 택시비가 약 65유로(약9만원). 우리가 마지막 관광지에서부터 택시를 타서 호텔에 들렀다가 공항까지 오느라 긴 거리를 타긴 했지만, 그래도 좀 과한 금액이었다(보통 주요 관광지에서 호텔까지 10유로 남짓, 호텔에서 공항까지는 30유로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기사가 택시요금 미터기를 보여주며 그렇다는데 어쩔 도리가 있나, 앞 좌석에 앉은 남편이 50유로 지폐 1장과 10유로 지폐 2장, 총 70유로를 택시기사에게 주고,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 있던 우리 캐리어를 내렸다. 그리고 거스름돈을 받으러 기사에게 가니, 기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남편이 30유로 밖에 주지 않았다고 돈을 더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인즉, 남편이 50유로 지폐 대신 20유로 지폐를 줬다는 것이다.
남편은 처음에 정말 자기가 잘못 준 줄 알고 사과까지 했다. 그러나 다시 돈을 꺼내기 위해 지갑을 보다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50유로와 20유로 지폐의 색깔이 유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편의 지갑 속 50유로의 숫자가 분명히 줄어 있었다. 택시기사가 남편에게 받은 50유로를 남편이 가방을 내리는 사이 20유로와 바꾸고 돈을 잘못 줬다고 발뺌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증명하냔 말이다. 남편 지갑에 있던 돈이 원래 얼마였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고, 만에 하나 택시기사의 짐을 뒤져 50유로가 나온들 그 지폐가 남편이 준 지폐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고, 무엇보다 그 모든 항의를 영어가 잘 안 통하는 이탈리아인과, 게다가 운전하는 행태만 보아도 예의라고는 없는 사람과 어떻게 소통하냐는 것이다. 이탈리아 경찰을 부르면 해결이 될까? 어차피 증명을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30유로를 더 주었고, 우리는 95유로(약 13만원)에 가까운 아주 비싼 택시비를 내고, 렌터카를 넘겨 받았다.
“스페인처럼 좋을 줄 알았는데, 이탈리아는 좀 많이 별로다.”
“나는 영국 가고 싶다.”
지난 스페인 여행의 즐거운 기억을 소환하는 나의 말에 남편은 영국에 대한 향수로 대응했다.나는 진심으로 로마를 여행하는 내내 이탈리아 전에 다녀온 지난 2월의 스페인이 생각 났다.
스페인에 도착하기 전, 부끄럽게도 나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같은 유럽내 남쪽, 비교적 더운 지역에 있는 나라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뜨거운 날씨를 닮아 뭐든 뜨겁고, 즉흥적이고, 다혈질일 것 같다는 편견. 사람들을 닮아 그 나라의 도시들 역시 즉흥적이고 다혈질의 결과로 무질서하고 지저분할 것 같다는, 경험도 한 적 없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져버린 근거 없는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마드리드(Madrid)에 도착한 순간, 그것은 완전히 나의 그릇된 편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드리드는 골목골목 놀랄 만큼 깨끗하고 단정했고, 가게의 직원들은 빠르고 성실했다(영국인의 일처리 속도에 비하면 거의 올림픽선수급이었다!). 스페인은 즉흥적이지도, 다혈질이지도 무질서하지도 않았다. 나는 오해한 것이 너무 미안해서 누구든 아는 스페인 사람이 있다면 붙들고 석고대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스페인에 빠져버렸다.
반면 이탈리아는 내가 이전에 생각한 그대로였다. 로마의 첫날 밤에 느꼈던 지저분하고, 급하고 또 무례한 그 느낌은 이후의 도시들을 여행할 때도, 물론 도시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내내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 왔다. 나의 경험 속 이탈리아는 아무리 장엄한 유적과 근사한 명소들이 있다고 해도 굳이 다시 찾고 싶지 않은, 불편하고 불쾌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아마도 이 감정은 바로 직전에 경험한 스페인 여행이 기대보다 훨씬 좋았기에 상대적으로 더욱 도드라지게 까슬거렸음이 분명했다.
남편이 영국을 그리워하는 것은 운전 때문이 컸다. 물론, 영국인들의 운전하는 습관도 결코 느긋한 편은 아니다. 영국의 도로 사정 또한 좁은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우리가 사는 바스(Bath)의 외곽 쪽은 소위 말하는 ‘시골길’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들판을 가르는 좁은 길들이 많아서 처음엔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와 부딪힐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가끔은 험하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영국인들의 운전이지만, 철저하게 지키는 것 하나가 ‘양보’이다. 영국의 운전자들은 사람이 횡단보도에 서 있으면 멈추거나 속도를 줄인다.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에서도 마찬가지다(물론 런던처럼 아주 복잡한 도로에서는 신호를 따르는 것이 우선이다.). 교차로나 좁은 양방향 도로에서도 먼저 가려고 서둘러 파고들기 보단 일단 멈추어 상대의 의사를 살핀다. 그리고 양보를 받았을 땐 살짝 손을 들어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땐 이런 것들이 익숙하지 않아 횡단보도 앞에서 차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나를 되려 기다리며 대기선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운전자의 시선에 당황하기도 하고, 신호만 보고 횡단보도를 거침없이 달렸던 남편은 길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비매너남으로 보일까봐 걱정하기도 했다. 영국 생활을 한지 몇 개월, 우리는 서로 배려하는 영국의 운전 습관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니 이탈리아 운전자들이 누구에게 질세라 누구보다 빠르게 거침없이, 요리조리 차선을 바꿔가며 내달리는 도로에서, 누가 나를 추월할세라 차선을 밝고 달리는 도로에서, 깜빡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드는 도로에서, 달리는 차의 창문을 열어 옆 차선에 차가 있는데도 빈 패트병을 밖으로 던져버리는 도로에서, 위협을 느끼고, 불쾌함을 느끼고, 영국 도로의 안정감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국에는 없는 이탈리아의 눈부신 날씨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아~ 이제 로마 끝났다.”
“로마는 대도시니까, 다른 도시들은 괜찮을지도 몰라.”
“그래, 원래 우리는 작은 도시 타입이잖아.”
로마에서 3시간이 걸리는 피사로 향하는 차안에서 남편과 나는 최면 같은 위로의 말을 주고 받으며, 진심으로 기쁘고 후련하게 로마를 떠났다.
해안을 따라 달리는 차 앞유리 너머로 아주 붉고 진한 노을이 내렸다. 그 풍경이 어찌나 장관인지, 기가 막혔다.
“와, 저 노을 좀 봐. 진짜, 짜증나게 멋지다.”
로마는 잔뜩 열 받게 했다가 ‘옛다’하고 멋진 것 하나 툭, 던져 주는 얄미운, 밀당의 고수 같았다. ‘암만 그래본들 니들이 나를 싫어할 수 있겠니? 이렇게나 멋진데?!’
부인할 수 없는 이탈리아의 매력적인 노을을 나도 모르게 핸드폰 카메라로 계속 찍으면서도, 약이 오른 나는 곱게 인정하고 싶진 않아 오기로 응수했다.
“흥, 우리 나라 제주도 해안 도로 가 봐라. 노을 질 때 이만큼 안 이쁘나!”
내겐 너무 벅찬 로마 여행은 뜬금 없는 ‘제주도 사랑’으로 마무리 되었다.
[유한한 영국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이탈리아, 로마 - '내겐 너무 벅찬 로마(Rome)' 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