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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사로 가는 짧은 여행, 그위의 긴 생각

[유한한 영국 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이탈리아, 피사

by 노현지


로마(Rome) 일정이 예상보다 지연되어, 이탈리아 서쪽 해안을 따라 달리다 마주친 노을이 다 타서 검은 재 같은 까만 밤하늘로 변하고도 한참을 더 달려, 밤 11시 반이 넘어서야 ‘피사(Pisa)’에 도착했다.


< 3시간이 넘게 걸린 '로마'에서 '피사'로 가는 길 (출처:구글맵) >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저녁 식사 시간 전에 피사에 도착한 뒤, 저녁 산책을 하면서 피사 도심도 구경하고 저녁 식사도 할 예정이었다. 피사의 호텔에서 하루 밤 묵은 뒤, 다음 날 오전에 피사의 핵심이자 한국의 유치원생들도 다 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울어진 건물, ‘피사의 사탑(Torre di Pisa)’을 구경하는 것으로 피사의 짧은 여행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늦어진 로마의 일정 때문에, 또 미룰 수 없는 다음 날의 일정(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관람이 예약되어 있었다.) 때문에 피사 도심을 구경하는 것은 건너 뛰고, 깊은 밤까지 도로 위에 있어야 했던 여행자의 눈꺼풀 위로 한 가득 내려 앉은 무거운 피로만 밤의 피사에 떨군 뒤, 다음 날 오전 ‘피사의 사탑’을 돌아보고 급히 피사를 떠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처음부터 짧게 잡은 피사 여행이 더욱 짧아진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서 ‘피사의 사탑’ 외에도 피사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모습, 피사에는 ‘피사의 사탑’ 외에는 볼 것이 없다고들 하는 그 평범함에도 반드시 담겨 있을 ‘피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별 수 있나. 여행 중의 일정 지연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 도로 위의 빨간 노을이 다 타고, 검은 재 같은 밤이 되어서야 도착한 '피사' >


그리고 여기 낯선 이탈리아의 도로, 그것도 까만 밤의 지방 도로를 구글 네비게이션 하나에 의지해 달려 온 이방인에게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의 무시무시한 ‘ZTL(Zona Traffico Limitato)’이었다.


< 이탈리아 ZTL 표지판과 단속 카메라 (출처:Visit Florence) >


ZTL(Zona Traffico Limitato)이란 이탈리아 대부분의 도시 중심부에 설정되어 있는 차량 출입제한 지역이다. 도시내 주요 유적지 혹은 도심을 중심으로 띠처럼 둘러진 이 ZTL은 허가된 차량(보통 해당 지역 거주민 혹은 직업적 허가 차량 등)만 ZTL 안으로 출입이 가능하고, 그 외의 차량이 진입하면 ZTL 표지판에 붙어 있는 카메라로 촬영을 하였다가 추후에 벌금을 물린다. 늘 관광객이 넘쳐나는 이탈리아이니 거주민들의 쾌적한 생활 유지나 환경 및 유적 보호 등을 위해 도심내 차량 통행량을 일정 수준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이 제도의 취지가 이해도 되고, 공감도 되었다. 다만, 이 제도를 피해 운전을 해야 하는 낯선 여행자라면 융통성이 거의 제로인 이 제도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지금 지내고 있는 영국의 도시 중 교통량이 많은 런던(London)에도 도심내 차량 통행량을 규제하기 위한 유사한 제도가 있다. 런던 중심부로 출입할 차량은 ‘혼잡 통행료(일 8파운드, 시간당 분할 불가)’를 내야 한다. 즉, 추가적 비용을 부과하여 도심내에서 개인 차량 이용을 억제하고대중교통 이용을 장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꼭 차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 사전에 비용을 지불하면 차량 출입이 가능하다. 반면 이탈리아의 ZTL은 별도의 예외 신청 수단 없이 허가된 차량 외 모든 차량을 철벽 수비한다.

문제는 이 표지판이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ZTL 뿐 아니라 모든 도로 표지판이 그렇다.). 그리고 도시 마다 구체적인 ZTL 제한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더하여 유사해 보이지만 ZTL 안내가 아닌 표지판들도 종종 보인다. 그 도시에서 생활을 하거나 생계를 위해 오가는 차량들은 어차피 ZTL 내로 진입이 가능할테고, 그렇다면 ZTL 표지판을 보고 조심해야 하는 이들은 외부인들, 이탈리아내 다른 도시의 사람들이나 외국인 여행자들일 텐데 영어를 함께 표기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실제로 ZTL 벌금을 내는 대다수가 외국인 여행자라는 풍문이 있다). 음… 좀 더 솔직히 말해 아쉬움 보다는 불만에 가까웠다.


< 이탈리아어로만 표기된 이탈리아 도로 표지판 >


도로 표지판이 나온 김에 얘기를 조금 더 이어가자면, 피사로 가는 길에 ‘ZTL’ 이전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도로 가에 세워진 ‘너무’ 수시로 바뀌는 ‘제한 속도 표지판’이었다. ‘시속 110’이라는 표지판을 방금 보았는데, 곧 ‘시속 90’이라는 표지판이 나오고, 그러다 또 다시 시속 110이 되었다가, 다시 시속 90이 되고, 그러다 시속 40이 되었다가 다시 110이 되고, 곧이어 시속 90이 나왔다. 중간중간 시속 130과 시속 70 표지판도 나왔지만, 대세는 시속 110과 뒤따라 나오는 시속 90, 그리고 시속 40이었다.


< '피사'로 가는 길, 어두운 밤이라 심령사진처럼 나온 '제한 속도' 안내 표지판 >


잦은 제한 속도 변화에 운전하는 남편의 발은 쉴 틈이 없었다. 다행히 남편은 ‘시속 40’ 표지판이 이 도로를 빠져 나갈 때 적용되는 속도라는 것을 곧 알아채고 도착지가 다가올 때까지 그 표지판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시속 110’과 ‘시속 90’은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표지판을 자세히 보니 ‘시속 90’ 표지판 아래에 검정색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제한 속도에 대한 부연 설명 같았지만, 이탈리아어라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앉은 ‘조수석’이란 이름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그 아래 이탈리아 문구를 번역기로 해석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너무 까만 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글씨가 눈에 잡히지도 않았고, 핸드폰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았다. 우리는 끝까지 그 표지판을 읽지 못한 채, 도로 위에서 춤을 추듯 속도를 높였다 줄였다 반복하며 불안하게 피사로 달렸다.


혹시 부지런한 여행 블로거들이 이탈리아의 도로 표지판을 정리해 둔 것이 있을까 하여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지만 내가 궁금한 표지판 문구에 대한 설명은 찾지 못 했다. 결국 나중에 이 문구의 의미를 알긴 알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베네치아(Venezia)’로 향하는 중에 고속도로에서 빠져 나와 도시로 진입하는 도로에서 또 제한 속도 표지판이 연이어 다른 숫자(시속 90과 시속 50)를 나타내며 등장했다. ‘시속 50’이란 표지판 아래에 작은 문구가 적혀 있긴 했지만, 역시나 이탈리아어라 읽을 수 없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우리 뒤에 있던 몇 대의 차들이 ‘빵’, ‘빵’, ‘빵’, ‘빵’, 화를 내듯 요란한 경적을 연이어 울리며 우리 차를 추월해서 지나갔다. 영문도 모르고(물론 그들도 우리가 속도를 줄이는 영문을 몰랐을 듯하다.) 큰 경적 세례에 놀란 나는 피사로 가던 밤과 달리 밝은 낮이라 한 눈에 들어오는 표지판에서 이탈리아 단어를 포착해 이탈리아어 사전을 찾았다.


“Nebbia”


‘안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였다. 그제야 짧은 간격을 두고 등장하는 두 제한 속도 표지판의 숫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로 향하는 도시 진입 도로의 제한 속도는 기본적으로 ‘시속 90’이며, 안개가 끼었을 때는 ‘시속 50’으로 달리라는 뜻이었다.

피사로 향하며 불안하게 속도를 변주하던 어두운 도로로 다시 돌아가 보면, 그 도로의 일반적인 제한 속도는 ‘시속 110’이나 안개가 끼었을 때는 ‘시속 90’으로 낮춰서 달리라는 뜻이었다. 이탈리아어뿐만 아니라, 그 도로에 안개가 잦다는 것조차 몰랐던 우리는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이탈리아어만 가득한 이탈리아 도로를 안개 속을 달리듯 뿌옇게 달렸다. 외국인 여행자에겐 너무 가혹한 이탈리아 도로 표지판이었다.

주요 교통 표지판과 부차적인 설명, 지명 안내판까지 모두 이탈리아어로만 되어 있는 이탈리아도로를 달리면서 세계적인 관광도시이고, 이 관광수입이 나라경제의 큰 축이 되는 나라에서 도로 표지판이나 그외 기타 여러 안내문에 영어를 함께 넣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에 비하면 해외관광객이 많지도 않은 우리나라 지방 국도에도 적혀 있는 영어 표기인데.

물론 이탈리아를 여행하려는 여행자가 이탈리아어를 잘 익혀서 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도도 훨씬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언어는 너무 다양하고, 현실적으로 여행을 가는 나라의 언어를 다 배우고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영어가 최고의 언어라 생각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영어가 세계 공통어처럼 쓰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 부디, 만에 하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탈리아를 재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이탈리아어 아래에 나란히 표기된 영어를 볼 수 있기를, 이탈리아 도로에 영어 표기가 없는 이유가 이탈리아 입장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면 이방인들의 편의를 조금만 생각해 주기를, 또는 이탈리아어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라면 그때는 이방인들이 느낄 불편, 그 이상의 당혹감을 조금만 더 생각해 주기를 바라 본다.

아뿔사, ZTL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운을 띄워 놓고 아직 우리의 ZTL 얘기는 시작도 못하다니, 이쯤에서 이탈리아 도로 위에서 떠올린 긴 생각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피사로 향하던 밤의 도로처럼 피사에 처음 도착한 밤으로 어서 돌아가야겠다.



피사에 가까워져 갔을 때, 우리는 이탈리아어로만 된 도로 표지판 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탈리아의 ZTL 제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십 수년 전이지만 남편은 오래전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왔다가 연수가 끝날 무렵 낡은 자동차를 타고 유럽 여행을 했다. 그때 이탈리아를 포함해 여러 나라의 도로를 경험해 본 덕분인지 유럽 여행을 할 때 큰 부담 없이 렌터카를 이용했다. 결혼 직후 나와 단 둘이 온 프랑스 남부지역을 여행할 때도 그랬고, 몇 년 전 나의 부모님을 모시고 다녔던 유럽 여행(영국, 프랑스, 스위스)에서도 그랬다. 몇 달 전 다녀온 스페인 남부 여행에서도 ‘세비야(Sevilla)’에서 협곡 위의 도시 ‘론다(Ronda)’로 남편은 직접 운전을 해서 갔다. 직접 운전을 해서 다니는 여행 경험이 많기도 하고, 그런 여행에서 필요한 것들을 미리 잘 챙기는 성격의 남편이었는데,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어쩐 일인지 ZTL을 놓치고 있었다.

변명을 하자면 남편이 여행 직전까지 꽤 바쁘기도 했고, 유럽에서 운전하는 것이 익숙하게 느껴져 쉽게 생각한 탓도 있지만, 사실 이런 규제가 있는 곳이 거의 없어서 고려할 생각 조차 못한 것이 크다. 게다가 남편이 20대에 차로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시절에는 ZTL 제도가 없었다고 했다. 흠…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월인데, 그동안의 익숙함에 기대어 우리가 안일했다. 환경과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져 꼭 이탈리아뿐아니라도 차량을 제한하는 다양한 제도들이 유럽의 도시들 곳곳에 생겨나고 있는 추세이니 앞으로의 여행에서는 미리 출발 전 필수 규제들을 확인하고 떠나야 될 듯 하다.


우리를 이렇게 반성하게 한 이탈리아의 ZTL은 무시무시 했다. 특히 피사 코앞에서 널뛰기하는이탈리아어 속도 제한 표지판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검색하던 인터넷페이지에서 ZTL의 존재를 알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밤 11시가 넘어 우리가 찾아가야 하는 호텔이 그 ZTL 구역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말 그대로 ‘멘붕’. 허가된 차량 외에는 사전 등록도, 추가 비용 지불도 불가하고 벌금 외에는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ZTL을 뚫고 어떻게 호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남편이 검색을 시작했다. 일단 한 번 어기면 벌금이 약 100유로(한화 14만원) 전후라는 것을 파악했다(나중에 알았지만 이 벌금도 나에게 도달하기까지 그 경위에 따라서, 예를 들면 순수 벌금 약 100유로에 각종 수수료 등이 붙어서 300유로를 훌쩍 넘길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처럼 ZTL 안에 호텔이 있을 때는 해당 호텔에 얘기를 하면 우리 차가 그 호텔을 이용하기 위해 지나야만 했던 ZTL 출입 기록을 삭제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호텔뿐아니라 이용해야 하는 장소(당연히 해당 장소가 차량을 허용하는 경우에 한해서다.)가 ZTL 내에 있을 때, 예외적으로 해당 장소에서 ZTL 내 출입 기록을 해결해 주는 경우들이 있다고 한다. 진작 알고 있었다면 낯설고 어둡고 적막한 도로 위에서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을텐데. 여러 모로 미흡한 것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은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방법을 찾은 우리는 용기를 내어 호텔로 향했다. 호텔 담당자와 아주 작은 의사소통의 차질이있었지만, 밤 12시 반경에는 무사히 주차를 하고, ZTL 출입기록 삭제 가능 여부까지 확인하고 호텔 방에 들어 설 수 있었다.

그날 밤 남편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탈리아 ZTL 공부에 매진하여 이탈리아의 ZTL을 알려주고 우회도로를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 어플을 찾았고(심지어 한국어 음성지원까지 되는!), 이후부터는 백퍼센트 신뢰할 순 없지만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이탈리아 도로 위를 달릴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을 하면서 한 번 더 ZTL 출입 기록 삭제 여부를 확인하고 호텔을 나섰다. 피사를 제외하면 그 후로는 꼬박꼬박 ZTL 구역을 확인하고 운전을 했기 때문에 벌금을 내야하는 일이 없을 것 같지만, 말했다시피 이탈리아어만 가득한 도로를 남편이 얼마나 완벽하게 운전했을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이 피사에 있는 호텔과의 ZTL에 대한 의사소통도 잘 되었을지 문득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이 ZTL 벌금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을 확인하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릴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우리가 어긴 도로 규칙에 대한 벌금이 이탈리아 렌터카 업체를 거쳐 우리에게 닿는데 6개월 이상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운이 나쁘면 그 기간 중에 수많은 수수료가 붙어 금액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상태로.




<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불량 건축물 피사의 사탑 >


이탈리아 도로 첫 데뷔를 꽤나 화려한 불안과 불확실한 밤으로 장식하고 난 이후, 마침내 마주한 ‘피사의 사탑’은 상상했던 것만큼 크진 않았다. 어른이 되어 모처럼 찾은 경주에서 내 머릿속에 저장돼 있는 것보다 한참 작은 첨성대를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까.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기대보다 왜소한 모습에 어린 날의 거대한 우상이 더 이상 거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처럼 어딘가 애잔한 감상에 젖는 그런 기분 말이다.

그러나 예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지 55m 높이의 ‘피사의 사탑’은 크기는 크다. 50m가 넘는 거대한 건축물이 조금씩 저절로 기울어져 현재 이런 경사진 각도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소문대로 신기한 장관이었다.

피사 대성당의 종루(鐘樓)로 지어진 ‘피사의 사탑’은 12세기에 처음 착공할 때는 수직으로 지었으나, 지반 토질의 불균형 때문에 더 부드러운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쪽 땅이 내려앉은 것이다. 몇 세기에 걸친 오랜 기간의 보수 공사에도 기울어짐이 계속 되다가 다행히도 현재는 기울어짐을 멈추었다고 하는데, 기울어진 건축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이 거대한 건축물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한 것은, 당연히 건축적 기술이 큰 역할을 했겠지만, 이 신성한 건축물이 붕괴되지 않기를 빌며 약 천년의 시간 동안 열과 성을 다한 사람들의 마음이겠구나, 그 마음들이 모여 오른쪽으로 5.5도 기울어진 그 아래의 공간을 가득 채워 탑을 떠받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현재의 피사의 사탑을 지탱하는 것은 무엇보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지반 침하 사례’로 손꼽히는 이 건축물을 보기 위해 피사로 몰려온 여행자들의 손과 손가락, 등 혹은 어깨일 것이다.

‘피사의 사탑’ 주변에는 탑에 바로 인접한 주변 공간뿐아니라 그곳에서 수십 걸음 씩 떨어진 잔디밭까지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피사의 사탑’을 향해 팔을 위시한 여러 신체 부위를 허공으로 뻗고 사진을 찍는다. 무거운 탑을 받치고 있자니 표정 역시 고되지만 역사적인 건축물에 힘을 보탠다는 보람 때문인지 찌푸린 표정에도 밝음이 있다. 잔디밭 여기저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다양한 포즈로 ‘피사의 사탑’을 지켜내고 있는 풍경은 ‘피사의 사탑’의 또 하나의 장관이 아닐까 싶다.


< '피사의 사탑'을 떠받치는 사진을 담기위해 고군분투 중인 여행자들 >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도 뜨거운 태양 아래서 ‘피사의 사탑’을 떠받치는 행렬에 동참했다. 그후 로마의 트레비 분수에서 시작된 약속(1일 1젤라또)대로 잔디밭 건너편 인도에 걸터앉아 고된 노동을 시원하게 달래주는 ‘젤라또’를 먹었다.


< 남편의 열정적인 자세 덕분에 '피사의 사탑'을 지탱하는데 동참한 우리 아이들 >


그늘에서 잠시 쉬는 동안에도 눈 앞으로 사람들이 쉴 세 없이 오갔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불안의 존재였던 ‘피사의 사탑’은 이제 ‘피사의 사탑’ 말고는 볼 게 없다는 이 도시에 세계의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는 존재가 되었다. 더하여 이 ‘피사의 사탑’은 건축학적으로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어, 이후의 고층 건물 설계에 큰 영향(고층일수록 지하도 깊이 파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주었다는 점은, ‘역사’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거름이 되어 주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했다.

우리에겐 너무 벅찼던 로마 여행에 이어, 불안한 까만 도로를 달려 도착한 피사. 짧은 여행이 더욱 짧아진 아쉬움이 있지만 긴 생각의 여운을 남긴 ‘피사(Pisa)로의 여행’이 뜨거운 볕에 빨갛게 익은 뺨을 식히는 기분 좋은 서늘한 바람과 달콤한 젤라또와 함께 마무리되고 있었다.



[유한한 영국 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이탈리아, 피사 – ‘피사(Pisa)로 가는 짧은 여행, 그 위의 긴 생각’ 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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