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터(Chester)는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지역 체셔(Cheshire) 주에 위치한 도시다. 체스터의 위치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조금 설명을 덧붙이자면,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대표적 축구팀으로 유명한 맨체스터(Manchester,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시티'가 있다), 그리고 리버풀(Liverpool, 축구팀 '리버풀'이 있다)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 잉글랜드 북서부에 자리한 체스터 위치 >
위치가 이렇다 보니, 나 역시 체스터를 유명한 ‘맨체스터와 리버풀’과 함께 묶어, 잉글랜드 북서부 도시들을 여행하는 길에 다녀왔다. 잉글랜드 북서부 여행 계획을 세우기 전까지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던 ‘체스터’라는 도시를 여행하는 나의 주요 목적은 ‘쇼핑’이었다. 체스터 근처에는 ‘체셔 오크스 디자이너 아울렛(Cheshire Oaks Designer Outlet)’ 이라는 아주 큰 아울렛이 있기 때문이다.
< 체스터 근교의 대형 아울렛 '체셔 오크스 디자이너 아울렛' >
마침 우리의 여행 일정이 크리스마스 직후, 영국의 최대 할인 기간인 ‘박싱 데이(Boxing Day)’ 기간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부터 보통 다음해 1월까지 이어지는 큰 폭의 세일 기간 동안 영국인들은 일 년치의 쇼핑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나 또한 일 년 중 가장 큰 폭으로 할인된 (것이리라 믿는) 가격에 영국의 대표 명품 ‘버버리’의 무엇이라도 ‘득템’하기를 고대했다.
영국 박싱 데이 기간에 체스터 아울렛에 갈 예정이라는, 물욕으로 가득 찬 나의 체스터 여행 계획을 친구에게 전했다. 쇼핑을 ‘노동’이라 생각할 정도로 쇼핑을 즐기지 않는 친구는 나의 야심찬 아울렛 방문 계획을 귓등으로 흘렸다. 대신 예전에 영국으로 출장 왔다가 반나절 동안 머문 적이 있다는 ‘체스터’에 대해 알은 체를 했다.
“아, 체스터! 그 예쁜 도시!!”
< 체스터 거리 전경 >
친구의 말처럼 체스터는 아름다웠다. 그저 물욕에 눈이 멀어 남쪽동네 바스(Bath)에서부터 잉글랜드를 동서로 가르며 몇 시간을 달려온 것이 부끄러울 만큼 고상하고 운치 있는 도시였다. 동절기의 영국답게 체스터의 하늘은 잔뜩 찌푸린 잿빛이었지만, 그런 하늘 아래서도 체스터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줄어들지 않았다. 영국의 지방 도시들은 대체로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어서 새로운 도시를 소개할 때마다 '고풍스럽다'고 말하니, 나의 글을 줄곧 읽고 계신 독자분들은 이제 ‘고풍스럽다’는 수식어가 살짝 지겨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정말로 고풍스럽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 체스터를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을.
체스터의 고풍스러움은 이전에 소개한, ‘오래된 석조 건물이 유명한 코츠월드(Cotswold)’나 ‘18세기 영국 시골 마을의 소박한 분위기를 간직한 라콕(Lacock) 마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체스터는 중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도시였다. 도시 곳곳에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도 있는 긴 역사의 체스터이지만, 현재의 체스터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것은 (나는 몰랐지만 영국에서는 꽤 유명한 여행 도시였다) 체스터가 잘 보존하고 있는 중세풍의 거리일 것이다.
// 중세풍의 상점가, 더 로우즈(The Rows)
체스터의 중심 거리는 독특한 분위기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건물의 외관에 까만 선을 그은 듯 흑과 백이 대조되는 목조 건물들이 있는데, 13~14세기 중세와 15~16세기 튜더 시대 스타일의 건물들이라고 한다.
< 중세 및 튜더 시대 스타일의 흑백 목조 건물 >
이 건물들 때문에 체스터는 중세풍의 분위기를 간직한, 중세 시대를 즐길 수 있는 도시로 사랑받고 있었다.
중세와 튜더 스타일의 건물들이 밀집되어 길 양쪽으로 쭉 늘어서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보이는 메인 상점 거리는 특별히 ‘더 로우즈(The Rows)’라고 불리는데, 지금도 많은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있어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 체스터의 중심 거리 '더 로우즈' 풍경 >
더 로우즈의 건물에는 2층에 발코니 같은 공간이 있는데,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이다. 그 발코니 때문에 1층의 상점 앞은 지붕이 드리워져 있어 수시로 내리는 영국의 비를 피해 쇼핑을 할 수 있고, 마치 아케이드 안을 걷는 듯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 체스터 더 로우즈 건물의 특징, 2층 상점 앞 발코니 >
< 더 로우즈 건물의 2층 발코니 아래 1층 인도 >
차량이 통제되어 있어 길 한 가운데를 걸어가도 되지만 괜히 한 번 올라가 걸어보고 싶게 만드는 더 로우즈의 상점 거리. 이 예스런 건물들 중에는 정말로 중세나 튜더 시대에 지어져 지금까지 보존된 건물들도 있지만, 많은 수는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튜더 스타일의 복원 운동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더하여 현재까지도 이 소중한 과거의 유산, 튜더 스타일의 건축 양식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니, 전통을 존중하는 영국의 정신 덕분에 다채로운 영국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여행자로써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체스터의 역사처럼 오래되었을 것 같은 건물에 자리한 펍에 들어가 맥주 한 잔을 청했다. 인기 도시답게 손님들이 많아 소란했지만, 옆 테이블에서 즐겁게 건배를 나누는 소리에 우리 역시 흥이 더해져 맥주 맛이 한층 진하게 느껴졌다.
< 체스터 거리 분위기를 닮은 펍에서 맥주 한 잔 >
// 그대와 함께 걷고 싶은 성벽 길, 체스터 시티 월즈(Chester City Walls)
체스터의 '더 로우즈'를 한눈에 더욱 잘 담을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성벽 위 길이다.
체스터에는 구도심을 빙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있다. 로마 제국 시절에 군사 요새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성벽은, 이후로도 시기에 따라 주체는 바뀌었지만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강화되었는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성벽의 많은 부분은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체스터 시티 월즈(Chester City Walls)’라고 불리는 체스터의 성벽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잘 보존된 도시 성벽 중 하나로 꼽힌다. 구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 길은 보존 상태가 좋은 만큼 꽤 긴 편인데(약 3.2킬로미터라고 한다), 곳곳에 성벽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어 원하는 만큼만 걸을 수 있다.
< 긴 역사를 품은 체스터 성벽 >
< 성벽 위로 오르내리는 계단 >
성벽 위에는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아마도 시작은 도시 경비를 위한 보초 등의 군사적 목적이었겠으나, 지금은 체스터 구도심의 전망과 체스터를 흐르는 강 ‘리버 디(River Dee)’의 경치를 구경하며 여유 있는 사색을 즐기기에 더 없이 좋은 산책로다.
< 체스터 성벽 위 산책로 >
가끔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달콤한 우울을 한 스푼씩 더하는 흐린 어느 겨울 늦은 오후, 체스터 성벽 위의 돌담 길을 걸으며 나는, 멀리 보이는 중세의 ‘고풍스러움’ 위로 ‘낭만’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성벽을 이루는 돌담이 주는 다정함에, 좁은 산책로가 주는 은밀함,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서 하나 둘 불이 켜지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본다면 누구라도 ‘사랑하는 그대’와 이 길을 걷고 싶어지리라.
< 빗물에 촉촉하게 젖은 성벽길이 더욱 운치 있다 >
이 성벽 길의 중간에 아주 유명한 시계탑이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이스트게이트 시계탑(Eastgate Clock)’은 영국에서 런던의 빅 벤(Big Ben) 다음으로 많이 사진 찍히는 시계탑이라고 한다. 이 시계탑에서 길 아래를 내려다보면 근사한 체스터 거리를 다시 한 번 눈에 담을 수 있다.
< 런던의 빅 벤 다음으로 인기 있는 영국의 시계탑 '이스트게이트 시계탑' >
< 시계탑 부근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체스터 거리 풍경 >
고즈넉한 낭만이 흐르는 성벽 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시간을 기념하는 시계탑 앞에서 우리 또한 우리의 시간을 영원히 사진에 담아 기억하는 것 역시 꽤 근사한 체스터 여행법이 될 것 같았다.
체스터는 이외에도 천 년의 역사가 서린 체스터 대성당, 19세기에 고딕 양식의 부흥을 꿈꾸며 지은 체스터 시청, 로마 유적인 원형극장 등등 볼거리들이 많은 도시였다.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 내가 처음, 체스터의 진가를 모르고 물욕만 불태웠던 아울렛이 있고, 영국에서 가장 큰 동물원 중 하나로 꼽히는 체스터 동물원(Chester Zoo)도 있어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곳이다.
< 체스터 대성당 >
< 영국에서 가장 큰 동물원 중 하나로 꼽히는 체스터 동물원 >
처음 잉글랜드 북서부 여행에서 짧은 일정 동안 맨체스터와 리버풀까지 돌아보느라 오래 머물지 못한 체스터가 못내 아쉽게 계속 생각이 나서, 다음해 봄에 아이의 생일을 맞아 체스터 동물원을 방문하며 다시 한번 체스터를 찾았다. 다른 계절에 찾아간 두 번째 체스터 역시 첫 방문과 같은 잿빛 하늘을 보여주었지만, 체스터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성벽 아래로 핀 노란 수선화의 행렬을 통해 또 다른 낭만을 선사하는 ‘그대와 함께 걷고 싶은’ 체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