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나는 여러 번 ‘울컥’, 울렁이는 감정을 다독여야 했다. 이유는 그때도, 지금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날의 감정을 더듬어 본다면, ‘떠남’의 메타포를 품은 항구의 쓸쓸함 때문이었거나, 목적 잃은 항구의 겸연함 때문이었거나, 빛나던 네 명의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 때문이었거나,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은 리버풀 밤거리의 투박한 번잡함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필 그때가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의 마지막 주였다는 것 또한, 잔잔한 리버풀(Liverpool) 바다 위에 ‘송년(送年)’이란 ‘회한(悔恨)’의 배를 띄웠으리라.
// 리버풀의 상징, 앨버트 독(Albert Dock)
리버풀은 잉글랜드 북서쪽 해안에 자리한 바닷가 도시다. 대대로 어업에 의존했던 작은 어촌 마을 리버풀은 18~19세기 영국의 산업 혁명과 함께 중요한 항구 도시로 거듭났다. 산업혁명의 중심인 ‘맨체스터(Manchester)’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리버풀은 내륙인 맨체스터와 철도로 연결되어, 맨체스터의 생산물을 수출하고 원자재를 수입하는 핵심 무역항이 된 것이다.
< 리버풀과 맨체스터 위치 >
그 무역의 중심에 항구 ‘앨버트 독(Albert Dock)’이 있었다. 앨버트 독은 단순한 항만 시설 이상의,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까지 구비한 (당시 기준으로) 혁신적인 항구였는데, 특히 이 앨버트 독의 창고는 주철과 벽돌 등을 이용하여 만든 영국 최초의 불연성 창고로 화재의 위험성을 낮추며, 산업혁명으로 항구를 오고간 엄청난 양의 물자를 안전하게 보관했다고 한다. 산업혁명 시대에 이런 중대한 역할을 담당한 리버풀은 작은 어촌에서 영국의 주요 산업도시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고, 그 중심에 있었던 ‘앨버트 독’은 리버풀의 상징이 되었다.
< 리버풀 알버트 독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
수 세기 전 ‘영국 최초의 불연성’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붉은 벽돌의 창고건물들이 리버풀 앨버트 독에 여전히 건재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붉은 건물색이 감청색 바다물과 잘 어울려, 화재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멋스러운 앨버트 독이었다. 체스터에 이어 리버풀 여행까지 잉글랜드 북서부 지역 여행 내내 흐린 날의 연속이었는데, 모처럼 보이는 파란 하늘 덕분에 리버풀의 항구도 바다도 제 매력을 최선을 다해 발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 닿는 앨버트 독의 바다 바람은 조금 쓸쓸했다. 물론 겨울 바람이란 본디 차갑고, 마지막 달인 12월은 갖가지 미련으로 헛헛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런 통상적인 감상보다 선명하게 부는 쓸쓸함은 앨버트 독의 운명 때문이었다.
< 날씨마저 스산한 겨울의 알버트 독 >
산업혁명 이후, 역사는 여전히 쉼없이 흐르고, 산업 기술은 보다 빠르게 진화했다. 리버풀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앨버트 독을 설계할 당시 주요 대형 선박은 돛을 달아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범선’이었다. 대형 범선의 입출항에 적합하게 설계된 앨버트 독은 엔진의 발달로 기관선이 생겨나면서 초대형 크기의 선박을 품을 수 없었고, 점차 주요 항구로써의 입지가 약화되었다고 한다. 다른 타계책을 찾았겠지만, 시대는 점점 더 발달해 나갔고, 설상가상으로 제2차 세계대전 폭격으로 손상된 앨버트 독은 쇠락을 멈출 수 없었다.
< 시대에 뒤쳐져 버려진 알버트 독의 모습 (출처 : 리버풀 뮤지엄) >
항구 폐쇄와 부지의 매립이라는 극단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현재 앨버트 독은 복합문화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기관선을 넘어, 탈산업화 시대로 달려가는 새로운 시대에 항구로써는 더 이상 생명을 다 했으나, 건축물로써의 앨버트 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앨버트 독을 다른 용도로 이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앨버트 독의 붉은 건물에는 해양 박물관과 미술관 등이 자리하고, 예쁜 레스토랑과 카페, 소품샵들도 생겨났다. 이 새롭게 생명을 얻은 앨버트 독을 보기 위해 매년 수많은 인파가 리버풀을 찾는다고 한다.
< 다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알버트 독 >
이것은 분명 희망찬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는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보다, 그 결말이 오기 전, 목적을 잃고 쓸쓸하게 마지막을 기다렸을 항구의 고독에 더 마음이 쓰였다.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쇠락한 것들은 늘 마음을 허전하게 만든다. 현재 아무리 근사한 모습으로 단장하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항구는 여전히 배와 바다를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 앨버트 독에서 느낀 나의 쓸쓸함은 앨버트 독의 절정의 영광에 고하는 위로이자, 뜨겁게 달아오르기 위해 혹은 그 자리에서 쇠락하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들을 향한 응원이었다.
< 어딘가, 여전히 쓸쓸함이 묻어나던 알버트 독 >
앨버트 독의 운명에 너무 깊이 공감한 탓인지, 리버풀의 거리도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용하고 소박한 지방 도시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세련되지는 못한, 번화한 거리. 리버풀의 밤 거리는 거칠고 투박하게 화려했다. 그 거리의 모습이 마치 앨버트 독의 운명 같아, 나는 리버풀의 밤길을 꽤 애틋하게 걸었다. 하필 12월이었고, 하필 ‘떠남’ 메타포인 항구 도시였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감상적으로 리버풀을 바라본 데는 다음에 얘기할 네 청년의 영향 또한 컸다.
// 눈부신 네 청춘의 기록, 비틀즈 스토리
새 생명을 얻은 앨버트 독의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 중 가장 유명한 곳이 있다. 리버풀에 온다면 누구라도 방문할 장소, ‘비틀즈 스토리(The Beatles Story)’다.
취향의 차이는 있겠으나, 20세기 음악을 얘기하면서 ‘비틀즈(The Beatles)’를 빼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1960년대 영국 락밴드인 비틀즈는 수많은 명곡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 비틀즈의 네 명의 멤버, 존 레논(John Lennon),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링고 스타(Ringo Starr)가 모두 리버풀 출신이고, 이 리버풀에서 비틀즈가 결성됐다. 앨버트 독의 비운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리버풀에서 희망처럼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탄생한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래서 리버풀은 ‘리버풀의 자랑’, ‘리버풀이 낳은 비틀즈’, ‘리버풀의 네 아들들’의 이야기를 앨버트 독 내 ‘비틀즈 스토리(The Beatles Story)’라는 공간을 마련해 리버풀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 리버풀 비틀즈 박물관 '비틀즈 스토리' (출처 : Expedia) >
음악사에 있어 비틀즈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겠지만, 80년대생인 나는 사실 비틀즈의 음악을 듣는 세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팝송보다 우리나라 음악을 좋아했다. (소싯적 ‘닉네임’이 ‘동률각시’였던, 엄청난 김동률의 팬이었음을 밝힌다.) 그래서 모를래야 모르기 쉽지 않은 유명한 곡들 ‘Hey Jude’, ‘Let It Be’, ‘Yesterday’ 등은 알고 있었지만, 그 외 비틀즈의 음악을 따로 시간을 내서 들어본 적은 없었다.
리버풀로 가는 길, 우리의 차 안에는 비틀즈의 음악이 내내 재생되었다. 리버풀 여행을 위한 나름의 ‘프렙(Prep)’ 이었고, 대뮤지션을 방문하기 위한 예의였다. 영국 초등학교를 다니며 영어에 대한 ‘귀가 뚫린’ 아이들은 남편과 나보다 노래말을 더 잘 따라 부르며 비틀즈를 즐겼다. (부러웠다...) 아이들의 ‘최애’ 음악은 ‘Yellow Submarine’이었다.
“We all live in a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 애니메이션 느낌이 가득한 비틀즈의 'Yellow Submarine' 음반 이미지 (출처 : 구글) >
비틀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겨우 리버풀로 향하는 길에 그들의 노래를 집중해서 듣고 간 게 전부인 우리에게도 '비틀즈 스토리'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공간이었다.
우선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이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과 비틀즈 스토리 내 자료들이 비틀즈를 잘 모르는 이들도 충분히 공감하며 관람할 수 있을 만큼 정성스럽게 마련되어 있었다.
비틀즈의 사진과 포스터, 당시의 기사, 레코드판 등 비틀즈의 기록물들이 전시된 것은 기본이고, 비틀즈가 처음 노래를 시작한 리버풀 거리의 ‘카번 클럽(Cavern Club)’ 공연장을 재현한 것을 시작으로 비틀즈의 음악을 녹음한 녹음실 모습, 그 유명한 ‘애비 로드(Abbey Road)’ 횡단보도, 비틀즈가 미국으로 진출할 때 탄 비행기 내부 등이 실제처럼 제작되어 있다. 심지어 관람용이 아니라 체험이 가능한 것들도 많다.
< 비틀즈의 서막 >
< 비틀즈 음악과 관련된 악기와 악보들 >
< 비틀즈가 공연한 클럽 '캐번' >
< 나왔다, 애비 로드! 안 건널 수가 없다! >
< 비틀즈 음반 포스터와 녹음실 등 >
< 영국에서 미국까지 타고간 비행기까지 재현! >
< 비행기는 한국에서 공수해 간 걸까? 하하. >
비행기를 타고 다음 공간으로 넘어가면, 두둥! ‘Yellow Submarine’ 속으로 들어갔다. 리버풀에 오는 내내 합창을 하며 부른 ‘Yellow Submarine’을 직접 만나니 비틀즈에 대한 친근감이 더욱 샘솟았다.
< 실제로 만나고 만 'Yellow Submarine' >
그 뒤로도 드럼을 직접 칠 수 있는 공간 등 전시가 끝나는 순간까지 비틀즈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도록 구성된 ‘비틀즈 스토리’. 어떤 가수를 ‘미치게’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아마도 내가 비틀즈 팬이었다면 이 ‘비틀즈 스토리’라는 공간이 너무 좋고 고마워서 줄줄 눈물을 흘렸을 것 같다. 하하.
< 직접 연주할 수 있는 드럼과 피아노 >
그러나 팬이 아니었음에도 그곳에서 나는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에는 너무나 잘 꾸며둔 공간에 대한 감탄으로 시작된 마음이, 비틀즈의 여정과 함께 자라 네 명의 젊은 청년들의 풋풋한 시작을 응원했고, 그들의 성공에 환호했고, 깊어지는 음악에 감동했다. 그리하여 ‘해체’라는 단어 앞에 이르렀을 땐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 그렇게 뜨거운 존재가 알알이 흩어지다니...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나도 이럴 진데, 당시 비틀즈의 팬들은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 풋풋한 비틀즈의 모습 >
해체 이후 각 멤버들의 이야기까지 놓치지 않고 빼곡하게 다루고 있는 ‘비틀즈 스토리’를 다 둘러보고 나자,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것 같았다. 문자보다 사진이나 영상, 공간의 재현 등 시각 자료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그곳은 영화보다는 소설의 느낌이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영상보다, 비틀즈의 시간을 따라 정성스럽게 꾸며 놓은 공간 안에서 비틀즈의 순간순간을 나의 속도와 나의 깊이 대로 꾹꾹 눌러 읽고, 체감할 수 있는 곳.
그 여정의 마지막에는 간단한 음식과 함께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이렇게 감동을 받았는데 어찌 맥주를 건너 뛰겠는가! 리버풀 IPA 병맥주를 마시며, 벽면을 장식한 ‘비틀즈’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노란 벽에 쓰여진 문장에 눈길이 멈추었다.
“You say goodbye and I say hello.”
비틀즈의 노래 ‘Hello, Goodbye’의 가사라고 했다.
이 문장을 나의 기분으로 다시 쓴다면,
“You say goodbye, but I say hello.”
내일 오전 ‘리버풀 대성당’을 마지막 일정으로 이 번화하지만 황량하고, 투박해서 애틋한 리버풀을 떠나면 아마도 내가 다시 리버풀을 찾을 기회는 거의 없으리라. 어느새 12월의 마지막에 다다른 올해 또한 곧 ‘안녕(goodbye)’을 고하며 우리를 영원히 떠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리버풀을 포함한 잉글랜드 북서부, 낯선 도시의 낭만과 묵직한 감상으로 가득 찬 이 연말 여행을 계속 소환하며,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시간을 향해 두고두고 ‘안녕(Hello)’이란 안부를 전할 것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