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 돌아본 맨체스터는 영국에서 산업 혁명을 중추적으로 이끈 도시였다. 그리고 그 산업 혁명의 시작과 중심에 증기기관차(Steamed Train)가 있었다.
< 19세기 증기기관차 (출처 : 런던 교통 박물관) >
세상의 속도를 바꾸었던 증기기관차. 이제는 더욱 발달된 기술을 장착한 기차들이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먼 곳들을 연결하고 있지만, 맨체스터의 외곽 작은 마을 주변에는 여전히 힘차게 달리는 증기기관차가 있다고 했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맨체스터’의 근간을 경험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까?
그리하여 영국에서 맞이하는 처음이자 유일한 새해 첫날에 우리는 맨체스터 근교로 나가, 지금도 여전히 생생한 생명의 기적소리를 뿜으며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타기로 했다.
더하여 만 9살 된 딸과 나는 <해리포터(Harry Potter)>의 빅 팬이었으니, 우리에게 증기기관차란 그것이 달리는 장소가 어디든 호그와트 마법 학교로 향하는 급행열차에 몸을 싣는 것과 같은 설렘을 줄 것이었다.
< 맨체스터 근교에서 증기기관차 체험한 지역 >
맨체스터 북쪽의 ‘버리 볼튼 스트리트(Burry Bolton Street)’ 역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증기기관차는 정말로 ‘칙칙폭폭’, 뜨거운 물기와 공기를 꾹꾹 눌러 담은 소리를 내며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영화 속 장면이나 장난감 모형에서 봤던 기차와 꼭 같은 붉은색과 검은색, 그리고 초록색이 섞인 증기기관차의 문이 열리고, 방금 그림책에서 나온 듯한 역무원 할아버지가 기차 앞에 서서 승객들을 안내했다. 우리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기차에 올랐다.
< 증기기관차를 탈 수 있는 '버리 볼튼 스트리트 기차역' >
< 증기기관차 내부와 역무원 할아버지 >
기차 내부는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증기기관차의 역사만큼 낡았지만 여행자의 감성을 자극하기엔 제격이었다. 감성이 더욱 고조되는 지점은 이 기차의 일부 좌석이 영화 <해리포터>에서 해리와 론, 그리고 헤르미온느가 처음 조우하는 장면에 나온 기차처럼 좌석마다 칸막이와 문이 달려 은밀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 호그와트로 향하는 기차에서 처음 조우하는 해리, 론, 헤르미온느 (출처: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
우리도 칸막이 자리에 꼭 한 번 앉아 보고 싶어 열심히 빈 자리를 살폈으나, 그런 명당은 이미 전역에서 탄 사람들의 차지였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덜컹덜컹’ 좌우로 흔들리는 기차 복도를 걸어 일반 좌석이 있는 칸으로 걸음을 옮겼다.
< 증기기관차 좌석 중 대부분에 해당되는 일반좌석 >
대부분의 좌석은 보통의 기차처럼 한 량 안에 2인용 좌석이 두 줄씩 배치되어 있었다. 칸막이 좌석에 비해 은밀한 아늑함은 없지만 좌석 간 간격이 넓어 여행을 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이 증기기관차는 먼 거리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기보다, 특정 구간을 오가며 증기기관차 체험을 제공하는 관광상품으로 활용되고 있었다(이렇게 운행되는 증기기관차가 영국 내 다른 지역에도 여러 군데 있다고 한다). 기차가 지나가는 구간 내에 있는 마을은 잉글랜드 중서부 지방의 작은 마을들로, 기차표를 한 번 사면 그날 하루는 구간 내 어느 역에서든 자유롭게 내렸다가 다시 기차에 탑승해도 된다. 다만, 증기기관차와 디젤 기차가 섞여서 지나가므로 반드시 증기기관차를 타고자 한다면 미리 시간표를 확인해 시간을 맞춰야 할 것이다.
우리도 기차가 오가는 철길 주변의 작은 마을 중 한 곳에 내려 즉흥 여행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램스버텀(Ramsbottom)’이라는 마을이었다. 이전에 이 마을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꼭 이 마을이어야 하는 이유도 없었으나, 아기자기한 소품을 파는 가게와 시간의 손때가 서린 건물이 거리를 예쁘게 장식하는 마을이라는 안내 책자의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 영국 작은 시골 마을의 소소한 정취를 구경한 뒤, 점심을 먹고 마을을 나서면 반대 방향으로 가는 증기기관차를 타기에 딱 적당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 즉흥적으로 내린 '램브버텀 기차역' >
기차가 램스버텀 역에 멈췄다. 우리 가족을 포함한 몇 명의 승객을 내려주고, 기차는 곧 다시 출발했다.
혹시 알고 있는가? 증기기관차는 출발할 때 ‘끼익—’ 하고, 높이 찌르는 코끼리 소리를 낸다. 커다란 몸집의 기차가 새된 소리를 내며 무겁게 레일 위를 밀고 나가는 모습이 정말 코끼리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인간이 덫으로 놓은 그물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코끼리처럼, 레일 위의 마찰력을 가까스로 이겨낸 기차는 하얀 연기를 가득 내뿜으며 철로 위를 달렸다.
< 승객들이 내린 뒤 떠나는 기차 >
기차가 떠나는 뒷모습이 영화 같았다. 덫과 같은 암담한 현실을 떨치고 오래 소망한 무엇인가를 향해 우직하게, 또 힘차게 달려갈 주인공의 운명을 암시하는 영화의 프롤로그, 혹은 에필로그. 시작과 끝이 맞닿은 새해 첫날의 증기기관차와 그 기차가 내뿜는 하얀 연기, 그리고 공기를 흔드는 기적소리가 먹먹하고 아련해서, 어쩐지 내게도 영화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고동쳤다. 나의 기적을 싣고 떠나는 기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차역에 서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역을 떠나는 증기기관차 영상 >
레트로한 감성이 물씬 풍겨나는 램스버텀 기차역이 예뻤다. 이런 기차역을 가진 램스버텀 마을 또한 분명 아름다웠을 것이다. 비록 우리 가족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마을을 방문한 날이 1월 1일, 새해 첫날. 거리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어여쁘다던 소품 가게도, 카페도, 식당도 모두. 영국은 평소에도 가게 문을 일찍 닫는 편인데, 일요일과 새해 첫날 같은 특별한 날은 더욱 철저하게 휴일을 지켰다. 직장과 일만큼이나 개인의 생활을 중시하는 문화가 부러우면서도, 일부러 걸음한 곳을 제대로 보고 가지 못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는 동네를 걸으며 나름 활기찬 마을을 상상해 보려 했지만, 실패.
텅 빈 듯한 길에서 추위와 배고픔만 더 느껴질 뿐이었다. 마을 초입, 조금 전 기차에서 내린 역 맞은편에 펍이 하나 있었다. 입간판에 ‘12시 오픈’이라고 적혀 있었으니, 지금 가면 문을 열었을 것이다. 춥고, 배도 고프고, 걷기도 싫다는 아이들을 달래 가며, 마지막 희망을 찾는 사람들처럼 펍으로 향했다.
<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아 아쉬웠던 램스버텀 마을 풍경 >
예상대로 펍은 열려 있었다. 기찻길 옆 마을의 펍답게, 펍의 이름이 ‘레일웨이(The Railway)’였다. 간판도 증기기관차 모양을 한 예쁜 펍.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우리 가족을 향해 문이 열린 가게의 출입문 상단, 주황색 전구로 밝힌 ‘Warm Welcome’이란 작은 현판 속 문구가 특히나 따뜻하게 다가왔다.
< 기차역 앞 마을 초입의 펍, '레일웨이' >
막 영업을 시작한 펍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친절한 인상의 직원이 다가와 아무 테이블이나 편한 곳에 앉으라고 했다. 거실과 방처럼 몇 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눠진 펍에서 우리는 벽난로가 멋스럽게 장식된 안쪽 구역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곧 직원이 와서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어느 펍이나 그렇듯 ‘키즈 메뉴(Kid’s Menu)’가 포함된 메뉴판이었다. 영국엔 펍뿐 아니라 대체로 많은 음식점에서 키즈 메뉴를 마련해 두고 있는데, 이젠 익숙하지만 처음 펍에서 키즈 메뉴를 봤을 땐 꽤 놀랐다.
영국으로 오기 전, 나에게 펍은 술집이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영국풍의 대중 술집, 펍. 미국식이면 ‘바(Bar)’라고 불릴 테고, 독일식이면 ‘호프(Hof)’라고 불릴까.
그러나 영국에 있는 동안 여러 도시의 많은 펍들을 방문해 본 경험으로, 영국의 펍을 단순히 술집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것 같다. 술을 마시는 곳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국 어디를 가나 쉽게 찾을 수 있는 펍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술집보다 점잖다. 술집이지만 진탕 술을 마시고, 고성으로 대화하는 장면은 잘 보기 힘들다. 적당히 기분 좋게 술을, 혹은 분위기를, 그리고 사람을 즐기는 느낌에 가깝다.
또 하나, 가족 친화적이다. 술을 파는 곳인데도 어느 펍에 가나 아이들을 위한 키즈 메뉴가 있다. 키즈 메뉴의 가격도 아주 후하다. 심지어 유아용 의자를 구비해 둔 펍들도 많다. 아이들이 환영받는 술집이라니. 내가 느낀 펍은 술집이라기 보다 술도 파는 ‘캐주얼 식당’ 같았다. ‘캐주얼’이라고 표현한 것은 제공하는 음식이 제대로 된 레스토랑의 음식에 비해 피시 앤 칩스나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샐러드, 햄버거, 피자 등 간편하고 가벼운 음식을 팔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레스토랑 수준의 음식을 제공하는 펍도 있다.
< '키즈' 친화적인 영국의 펍 >
여기에 한 영국인에게 들은 영국인의 펍에 관한 생각을 덧붙이자면, 그녀에게 펍이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안부를 나누는 소통과 교류의 공간이라고 했다. 최근 이사한 케임브리지 근처 조용한 마을에서 좋은 펍을 발견했다고 기뻐하는 그녀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녀에게 듣는 펍은 퇴근 후나 주말에 습관처럼 들러 사람들과 얘기나누는 푸근한 동네 회관 같은 느낌이었다.
아쉽게도 우리가 바스에 살면서 경험한 펍은 조금 매끈했다. 영국인 지인은 아마도 바스가 꽤 유명한 여행지(영국 내에서는 그렇다)이기 때문에 외부사람들이 많아, 소박하고 정다운 동네펍의 느낌보다는 세련된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로 운영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스 시티 센터에 있는 펍들은 친절했지만 거리감이 있었고, 손님들도 단골의 느낌보다 단순한 방문자나 뜨내기 여행자의 느낌이 진했다. 혹은, 일 년간 짧게 머무는 유한한 생활자인 우리가 미처 바스의 ‘진짜 펍’을 찾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바스의 토박이 주민들이 사는 깊숙한 마을 길 구석구석에는 어쩌면 이방인이 발견하지 못한 푸근한 그들만의 펍이 알알이 박혀 있었을지도 모르리라.
기차 모양 간판이 정감 있는 이 작은 마을의 펍은 어떤 모습일까? 증기기관차라는 관광상품을 끼고 있는 마을의 초입에 자리한 펍이니, 아마도 우리가 바스에서 본 펍처럼 외지인들이 많은 여행지의 매끈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 기분 좋게 술과 분위기, 사람를 즐길 수 있는 영국의 펍 >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주문한 음식보다 먼저 나온 맥주를 홀짝이는데, 출입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홀(Hall) 쪽이 소란해졌다. TV 소리도 들렸다. 축구 경기가 중계될 모양이었다. ‘축구로운 영국 생활’을 하는 남편이 이것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TV가 있는 홀의 테이블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온 남편이 TV 가까운 자리에 빈 테이블이 있다며, 자리를 옮겨도 되겠느냐 물었다. 지난번에 실패한 ‘영국 펍에서의 축구 관람’을 경험해 볼 기회인 것 같아, 나도 흔쾌히 동의했다.
안쪽 구석 테이블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잠깐 사이 펍에는 여러 명의 손님이 와 있었다. 큰 모니터 앞에 앉은 부자(父子)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TV 바로 앞 ‘펍(Pub)구석 1열’에 자리를 잡은 부자는 나란히 앉아 아빠는 맥주를, 아들은 콜라를 마시며 TV를 보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들의 모습에서 이 펍을 한두 번 방문한 것이 아닌, 단골의 포스가 물씬 풍겼다.
< 축구 중계를 보러 온 '펍 1열'의 부자 >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식사하는 사이, 축구 경기가 시작됐다. 그날의 축구 경기는 맨시티와 아스널(Arsenal)의 대결이었다. 리그 순위가 각각 2위, 3위로 경기는 거의 라이벌전.
다시 상기해 보자. 우리가 있던 펍은 어디에 있다? 바로 맨체스터! 당연히 펍 안의 사람들은 맨시티의 팬들이 많을 것이고, 우리는 맨체스터의 펍에서 맨체스터 축구 팬들이 모여 열성적으로 축구 경기를 보는 모습을 직관하는 영광을 얻었다.
< 축구 경기 중계를 볼 수 있는 펍 >
경기가 시작된 후에도 사람들이 연이어 문을 열고 들어오며, 펍 직원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딱히 자리를 잡지도 않고, TV 주변에 서서 맥주를 마시며 축구를 보았다. 순위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두 팀의 경기는 꽤 치열했다. 그것을 시청하는 사람들의 몰입감도 대단했다. 남편도 맨시티를 응원했다. 보통 ‘맨유’의 팬은 ‘맨시티’를 응원하지 않지만, 둘 중 더 순위가 낮은 팀인 아스널이 지면 맨유에게 조금 더 유리하다나 뭐라나. 나는 그런 역학관계는 모르겠고, 그 순간의 내가 맨체스터 축구팬들의 공간과 에너지를 빌려 영국 축구 문화를 체험하고 있으니, 맨체스터 팀을 응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전반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분명히 같이 온 일행이 아니었는데, 먼저 온 사람이든 따로 온 사람이든 서로 섞여, ‘일행’이란 말이 무색하게 한데 어울렸다. 다정하게 포옹을 하며 새해 인사를 나누는 이들과 흥분한 제스처로 축구에 대해 논하는 이들. 일찌감치 아빠와 나란히 명당에 앉아 콜라를 마시던 아이 옆에는 동네 형이 와서 자리를 잡았다. 우리 바로 옆자리의 큰 원형 테이블에는 가족 3대가 함께 와서 새해 첫날의 점심 만찬을 즐기는 듯했다.
< 어느새 펍을 가득 채운 동네 사람들 >
테이블에 앉아 가만히 홀을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내 입술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참 따뜻해 보이는 ‘사람들의 풍경’. 타국에서 우리 가족끼리만 맞이하는 새해 첫날이 증기기관차 여행이란 이벤트로 즐거우면서도 어딘가 조금 쓸쓸했는데, 그날의 펍이 주는 다정한 분위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푸근해졌다. 케임브리지 인근 작은 마을의 영국인이 말했던, 그녀가 사랑하고 즐기는 영국의 펍이 어떤 것인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흐뭇하게 바라보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펍에 들어설 때 친절하게 맞아주었던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여행 중인지 등을 물었다. 한국에 대해, 또 우리가 사는 바스에 대해 알은체하며 대화를 나누던 직원은 마지막에, 원한다면 기념으로 가족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주변머리가 없어 여행가서도 다른 사람에게 사진 부탁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늘 사진 속에서 각개전투를 하던 남편과 내가 아이들과 함께 온전한 가족사진을 남겼다.
< 친절한 펍 직원이 찍어준 가족 사진 >
더욱 치열한 후반전이 시작되고 마지막 몇 분이 남았을 무렵, 기차 시간 때문에 우리는 경기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일어서야했다. 맨시티가 앞선 상황에서 아스널 선수 한 명이 퇴장당했기에 이대로 맨시티가 이길 확률이 높았다. 경기 종료 휘슬이 불리는 순간, 맨시티 팬들이 승리에 환호하는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그런 진풍경을 보지 못하고 펍을 나서야 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지만, 떠날 시간이 정해진 이방인은 떠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기차 플랫폼 안에 들어갔을 때 경기가 종료되었다. 역시나 맨시티의 승리. 새해 첫날의 통쾌한 승리를 동네 펍에 모여 함께한 사람들은 지금 얼마나 신나고 행복할까? 내 말이 맞다는 듯, 멀리 펍 문을 열고 나오는 이들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때, 오전에 떠났던 증기기관차가 다시 코끼리처럼 육중하게 플랫폼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들른 이 마을에서 우리가 한 것이라곤 영국 어딜 가나 있는 흔한 펍에서 점심 한 끼 먹은 것뿐인데 떠나는 마음이 무척 아쉽고, 동시에 벅찼다. 이방인 가족의 새해 첫날을 다정하고 따뜻하게 열어준 기찻길 옆 작은 마을의 펍, 레일웨이. 덕분에 이제 내게 영국의 펍이란 영국풍의 술집이나 캐주얼 음식점이 아니라, 따뜻한 정이 가득한 ‘사람의 공간’이 되었다.
“고마워요, 램스버텀의 펍, 그리고 사람들. 올 한 해 이 마을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 Happy New Year!”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영국, 잉글랜드, 램스버텀
영화처럼 떠나는 증기기관차, 그리고 기찻길 옆 펍 _ 마침.
※ 이 글은 지난 해 발간된 영국 생활 에세이 <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들>에 수록된 글 중 영국 도시 여행 부분을 발췌/편집한 글입니다. 브런치에 발행하고 있는 영국 여행이야기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외에, 1년간 영국에 머물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다정하게 풀어낸 이방인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에세이 <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들>을 서울 망원동 독립서점 ‘여행마을’에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