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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평온한 글로스터 대성당, '해리 포터'는 거들뿐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글로스터, 해리 포터 촬영지

by 노현지



영국 잉글랜드 남서부에 위치한 글로스터(Gloucester)는 영국에서 가장 긴 강인 ‘세번(Severn) 강’을 끼고 있어 로마 시대부터 중심지로 번성한 긴 역사를 가진 도시로, 특히 중세시대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글로스터 대성당(Gloucester Cathedral)’이 유명한 곳이다. 예전부터 글로스터가 중세 시대의 성당과 수도원 등으로 유명했던 도시인지, 제인 오스틴도 그녀의 소설 중 『노생거 사원』에서 남자 주인공 ‘틸니’씨의 집, 중세 시대의 사원을 사들여 저택으로 개조한 ‘노생거 사원’이 있는 도시를 바로 이 ‘글로스터’로 설정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영국에서 일 년 남짓 지내면서 여러 도시들을 방문해 본 바, 영국 도시에는 성당이 없는 곳이 거의 없고, 그 성당이 안 유명하다는 곳이 없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도시(= 볼거리가 많은 도시)가 아닐 경우, 대부분의 도시의 ‘가 볼 만한 곳’ 1순위가 성당일 정도.

처음 영국 도시들을 돌아보기 시작할 땐 열심히 성당을 방문하고, 성스러움에 감탄하고, (신앙이 없음에도) 정성스럽게 기도도 했으나 점차 흥미가 떨어졌다. 이 종교에 대해 믿음도 대단한 지식도 없는 내게 각 도시의 성당이란, 분명히 각기 다르지만 다 같아 보이는 묘한 기분을 안기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당의 역사가 도시의 역사와, 또 영국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중에는 대충 둘러보거나, 가끔은 건너뛰기도 했던 것이 성당이었다.


그렇게 감흥을 잃어가던 성당이었건만, 어찌하여 나는 또 시간을 내어 이 ‘글로스터 대성당’을 보기 위해 글로스터를 찾았는가. 바로 이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해리 포터 영화를 촬영했기 때문이다. (하하, 또 해리 포터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이렇게 3편이나 촬영했다는 주요 촬영지를 ‘해리 포터 덕후’로서 가보지 않을 수 있나! 마침 우리 가족이 지냈던 도시 바스(Bath)와 가깝기도 했던 글로스터로 떠난 날은 어느 날이 좋은 일요일이었다.


< 바스 북쪽에 위치한 글로스터 (출처 : 구글맵) >




:) 이렇듯 평온하고 아름다운 ‘글로스터 대성당’


일요일 한낮. 5월의 기온은 적당하게 선선했고, 파란 하늘 아래 글로스터 대성당은 햇살을 받아 온화한 빛으로 서 있었다. 고딕 양식의 특징인 높은 첨탑, 그리고 외벽과 창문의 섬세한 장식들. 대성당 주변을 둘러 펼쳐진 초록의 잔디밭이 근엄한 중세풍의 대성당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성당을 중심에 두고 주변을 빙 둘러 형성된 집들은 신의 가호 안에서 가가호호 평온무사한 날들을 보낼 것만 같았다. 글로스터 대성당의 첫 인상은 이렇듯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 글로스터 대성당과 성당 주변의 집들 >



성당 내부도 근사했다. 입구에서부터 압도하는 높고 화려한 천장을 올려다보자니, 아득한 웅장함에 저절로 다소곳하게 경건해졌다.

첨탑과 함께 또 하나의 고딕양식의 특징인 스테인드 글라스가 벽면을 따라 쭉 이어져 있었다. 운이 좋게도 우리가 방문한 날의 날씨가 화창하여, 유리창에 밝은 햇살이 내렸다. 덕분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상당한 규모와 풍부한 그림들로 글로스터 대성당의 자랑거리라고 했다.


< 글로스터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천장 및 창문 장식 >



깊숙하게 이어진 성당 내부 벽을 따라서 걸으면 곳곳에 성서 속 인물을 기리는 동상이 있고, 특별히 마련된 기도 공간 등이 있다. 공간마다 어떤 곳인지 안내판이 있어서 종교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도 관심이 있다면 알 수 있도록 설명이 잘 되어 있는 것에서 방문자들에 대한 글로스터 대성당의 섬세함이 느껴졌다. 입구에 들어설 때도 다른 성당들보다 더 다양한 언어, 특히 한국어로 된 안내책자가 마련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물론 무료로 배포하는 것은 아니고 발전기금처럼 조금의 돈을 내야했지만), 군데군데 배치된 안내판과 함께 다양한 방문자들에게 더 다정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성당의 마음 같아서 흐뭇했다.


< 구석구석 정성스러움이 묻어나는 글로스터 대성당 내부 >



성당은 메인 건물과 뒤편의 건물로 나뉘어 지는데 그 가운데 정원이 있었다. 오래된 작은 나무문을 통과해 정원으로 나서는 기분이 ‘비밀의 화원’에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영국 어디에 가나 인심 좋게 펼쳐진 잔디밭과 5월의 흰 꽃이 무리 지어 활짝 핀 성당 안뜰 정원 벤치에 앉아 잠시 쉬었다.


< 글로스터 대성당 안뜰 >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참 좋았다. 날씨도, 성당도. (비록 사진에는 먹구름이 가득하지만 곧 사라질 것임을 알았다. 그것이 영국의 하늘이기에.) 첫 눈에도 성당과 주변 풍경의 평온함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시간을 보낼 수록 성당이 점점 더 좋아졌다. 지금껏 여러 성당을 방문해 보았지만 이 글로스터 대성당처럼 말그대로 기분 좋은 성당은 처음이었다. 너무 크지도 또 너무 작지도 않은 성당이 너무 높지도 또 너무 낮지도 않은 문턱으로 방문자를 향해 열려 있는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종교적으로나 국적으로나 이방인인 내가 환영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유난히도 평온하게 느껴졌던 글로스터 대성당. 나는 늘 신이 있다면, 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마음의 평화’라고 여겼다. 그날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나는 어쩌면 성당 주변의 집들을 감싸는 신의 가호 속에 더불어 잠시 머물다 온 것이 아니었을까.


< 유난히도 평온하게 느껴지던 글로스터 대성당 >




:) ‘해리 포터’를 찾아서


글로스터 대성당을 기분 좋은 곳으로 만든 데는 ‘해리 포터’의 역할도 컸을 것이다.

성당의 메인 공간은 내부로 깊숙하게 한 바퀴 돌아 다시 입구로 돌아가게 구성되어 있는데, 안쪽 벽 측면으로 곁가지처럼 통로가 하나 나 있다. 위에서 말한 성당 안뜰로 이어지는 통로다. 그 통로를 걸어 들어가면, 글로스터 대성당을 방문하기로 했던 최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해리 포터 첫 번째 편인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해리와 론이 호그와트 지하감옥에서 탈출한 트롤로부터 헤르미온느를 구하기위해 복도를 달리는 장면을 촬영한 장소이다.

첫 학년 첫 학기, 아직 서로의 운명을 못 알아보고, 어딘가 범상치 않은 헤르미온느를 흉보는 론의 말에 상처받은 헤르미온느가 아무도 가지 않는 여자화장실에서 혼자 울고 있는 사이 지하감옥에서 트롤이 탈출한다. 교수님들이 모든 학생들을 대피시키지만, 이 소식을 들을 수 없는 헤르미온느를 찾아 해리와 론은 달린다. 여차저차 트롤을 물리친 해리와 론, 그리고 헤르미온느. 이 일을 계기로 셋은 평생의 친구가 된다.

친절한 글로스터 대성당은 ‘해덕’들을 위해서도 이곳에 해리 포터 영화 촬영지에 관한 안내스크린을 설치해 두었다. 정말 은혜로운 성당이었다.



< 영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촬영지 안내스크린 >


안내판이 알려준, ‘해리 포터’ 복도에 서서 나도 아이들과 함께 해리와 론처럼 뛰어보았다. 유명한 관광도시가 아닌 글로스터의 대성당에는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 원 없이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기분이 괜히 좋은 것이 아니었다.


< '헤르미온느를 찾아 뛰어가는 해리와 론'을 따라 뛰는 아이들 >



해리 포터 두 번째 편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도 이곳에서 촬영을 했다.

해리가 복도를 혼자 지나갈 때 어디선가 자꾸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뱀의 언어로, 뱀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파셸텅)을 가진 이들에게만 들리는 소리. 뱀의 소리를 듣는다는 건 좋지 않은 징조같다는 헤르미온느와 론의 말에 해리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애써 모른 척 무시하고 넘긴다. 그러던 어느 날, 호그와트 복도 벽에 의문의 글씨가 무시무시하게 피로 쓰여 져 있고, 호그와트 관리인 필치씨의 고양이가 굳은 채 매달려 있다. 하필 그것을 해리가 혼자 목격한다.


< 영화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촬영지 안내스크린 >


피로 쓴 글씨가 있었던 벽 앞에 서서 딸 아이가 글씨를 써 본다. 엄마의 하찮은 디렉팅에, 누가 볼까 긴장하는 표정까지 실감나게 연기해 준 착한 딸은,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한 해리 포터 덕후였다.


< '누가 벽에 피의 글씨를 적었나!' >



여섯 번째 시리즈인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의 한 장면도 이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촬영했다.


< 출처 :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


어둠의 마법사 ‘볼드모트’가 돌아오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점점 힘을 키워가는 암울한 시기의 호그와트. 어둠의 마법 편인 말포이와 스네이프는 복도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고, 그 세력에 맞서 마법 세계를 지키고자하는 해리 포터는 벽 뒤에 몸을 숨기고 둘의 이야기를 듣는다.


< 영화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촬영지 안내스크린 >



밝은 성당 복도에서는 영화 속 긴장감을 따라갈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몹쓸 흉내를 내 보는 즐거운 여행자였다.


<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속 해리 따라잡기 >




:) 마지막까지 기분 좋은 ‘글로스터’


대성당 밖의 글로스터 도시 풍경도 참 한가하고 조용했다. (‘런던 빼고 영국 여행’의 글을 쓰며 여러 차례 언급한 듯하지만, 영국의 도시들을 다닐수록 나는 크고 발달된 모습보다 오래되고 소소한 구석구석의 작은 지방 도시들에서 더 큰 만족을 느꼈다.) 특히, 성당 주변에 작은 골목이 있었는데, 멋진 곳으로 이끌어 줄 것 같은 분위기의 길이었다. 그 골목으로 홀린 듯 걸어가 오른쪽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 글로스터의 예쁜 골목과 카페 >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시켜 출출한 배를 채웠다. 나는 크림티(Cream Tea)를 주문했는데, 크림티란 ‘애프터눈 티’의 약식 버전 느낌으로, 홍차에 스콘과 버터가 함께 나오는 메뉴이다. 그날의 따끈하게 데운 스콘은 정말 포슬포슬하게 맛있어서, 영국에서 먹었던 모든 애프터눈 티와 크림티 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카페가 정말 손에 꼽히는 스콘 맛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때를 지난 늦은 오후의 예쁜 카페는 한산했고, 그래서인지 더욱 친절하게 반겨주는 주인 아주머니의 웃는 얼굴이 글로스터 대성당만큼 다정했다. 작은 골목의 예쁜 카페 ‘릴리스’의 스콘은 그런 맛이었다.


< (참고 사진) 크림티의 스콘. 사진이 없어 다른 곳에서 찍은 사진을 첨부하나 릴리스의 스콘이 훨씬 맛있었다. >



카페를 나서며 바라본 맞은 편 가게는 우리가 갔을 땐 휴업일이라 아쉽게 둘러보지 못했지만, 『피터 래빗』으로 유명한 작가 ‘비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와 관련된 가게였다.


< 비아트릭스 포터의 '글로스터의 재봉사' 기념샵 >


비아트릭스 포터의 동화 중 ‘글로스터의 재봉사’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을 컨셉으로 만들어둔 작은 박물관 겸 기념품 샵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놓친 비아트릭스 포터의 이야기를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잉글랜드 북서부의 산지 지역)’를 여행하며 그녀가 살던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달랬지만, 영국으로 잠시 여행을 온 사람이라면 멀리 레이크 디스트릭트까지 가는 일이 쉽진 않을 테니, 관심이 있다면 비교적 런던에서 가까운 잉글랜드 남서부 글로스터에서 '유난히도 평온한 글로스터 대성당'의 해리 포터와 함께 피터 래빗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좋은 기회일 듯하다.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글로스터, 영화 ‘해리 포터’ 촬영지

이렇듯 평온한 ‘글로스터 대성당’, 해리 포터는 거들뿐 _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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