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빼고 영국 여행] 영국 웨일즈 남부 펨브룩셔 ①
사실 이번 웨일즈(Wales) 편은 한 편의 여행기로 쓸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정확하게는 ‘과연 한 편의 여행기가 나올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봐야겠다.
웨일즈(Wales)는 통합 영국(The UK)을 이루는 4개의 구성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중 하나로 잉글랜드 서쪽편에 자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산악지형이 많고,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발달한 영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역사 하에서 잉글랜드에 비해 전반적으로 덜 발달되었지만, 대신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생태 다양성을 자랑한다. 영어와 함께 웨일즈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으며, 콘월처럼 고대 영국의 켈트 문화 전통에 기반한 웨일즈만의 독자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보존하고 있다.
내가 일 년 남짓 지냈던 바스(Bath)는 잉글랜드 남서부에 있어 웨일즈에 가까운 편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큰 도시 브리스톨(Bristol) 너머 다리 하나만 건너면 웨일즈였고, 구글 창에 ‘근처에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농장(Kids farm activities near me)’이라고 검색하면 카디프(Cardiff, 잉글랜드에 근접한 웨일즈 남동쪽의 도시)의 외곽 농장이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첫째 아이의 생일(10월이다) 겸 할로윈을 맞아 주황색 ‘호박 밭’이 쨍하게 펼쳐진 카디프의 농장으로 주말 나들이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농장 체험 이후로는 웨일즈를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잉글랜드에 워낙 가보고 싶은 도시들(옥스포드, 케임브릿지, 요크, 맨체스터, 리버풀, 체스터, 노팅엄, 스토크온트렌트 등등)이 많았기 때문이고, 반면 우리의 시간은 유한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방학이 아닐 때는 수업을 빠지고 여행을 가지는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더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웨일즈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 컸던 것 같다. 웨일즈 북부에 있는 국립공원인 스노우도니아(Snowdonia, 웨일즈 북서부의 산악지대)는 기회가 된다면 한번 가 보고 싶었으나 유한한 우리의 일정상 포기하고, 잉글랜드의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를 돌아보는 것으로 영국의 산악지대 체험을 갈음하기로 했다. 그외에는 아는 곳이 없으니 가고 싶다는 욕망도 끓어오르지도 못했던 웨일즈.
여름에 처음 영국에 도착한 우리가 영국의 계절 한 바퀴를 다 겪은 뒤 다시 여름을 맞이한 7월의 어느 주말, 예상치 못하게 우리의 집을 며칠 간 지인에게 내어주어야 할 사정이 생겼다. 급하게 주말 여행 계획을 세우게 된 우리는 지금이 바로 웨일즈를 방문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꼭 가고 싶었던 도시도 없고, 급하게 잡은 주말 여행이라 미리 계획을 세우지도 못한 우리는 아는 영국인이 추천한 웨일즈의 ‘화이트샌드 해변(Whitesands Bay)’을 목적지로 일단 집을 나섰다.
이번 편은 이렇게 갑자기 떠나게 된 주말 웨일즈 여행을 담은 글이다. 웨일즈에 가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이 어딘지 미리 공부를 하지도 않고, 우리의 발길이 닿은 곳이 정확히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잘 모른 채 기분 따라 짧게 머물고 흐른 여행이기에 웨일즈의 매력을 충분히 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일즈의 단편적 기억을 꺼내어 이어붙인 것은 순간순간 마주한 웨일즈의 풍경이, 기대가 없었던 대신 훨씬 큰 놀라움과 눈부심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더하여 한국에서 잠깐의 짬을 내어 떠나는 여행에서는 방문하기 쉽지 않을 웨일즈이기에 더욱 그곳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짧은 시간 잠깐씩 머물러 흩어진 파편처럼 분절적이지만 사진첩에 넣어두고 말기엔 아까운 웨일즈의 반짝이는 여름의 조각들을 소중하게 꺼내 본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소개할 영국의 마지막 여름바다가 되겠다.
과연 한편의 이야기가 완성될까 걱정하며 시작했던 글이 반짝이는 조각을 구석구석 끌어모으다 보니 어느새 상당한 분량이 되어 두 편으로 나누어 게재하게 되었다. 이번 편에서는 웨일즈의 바다와 해안선을, 다음 편에는 웨일즈의 대표 해안 도시를 담았다. 다음주까지 이어지는 웨일즈 여행도 함께 즐겨주시길!
온화하고 너른 바다가 주는 진짜 ‘힐링’, 화이트샌드 해변
화이트샌드 해변(Whitesands Bay)은 웨일즈 가장 서쪽에 위치한 펨브룩셔(Pembrokeshire) 주에 있는 대표 해변이다.
이곳에 ‘화이트샌드’라는 이름을 선사해 준 밝고 고운 흰색 모래는 특히나 이 해변의 자랑. 웨일즈 해변 중에는 자갈이 많거나 색이 짙은 모래 해변이 많은 편이라 화이트샌드 해변의 흰 모래가 더욱 빛나 보인다고 한다.
또한 웨일즈어로는 이 해변의 이름이 ‘포쓰마우르(Porthmawr)’. ‘크고 넓은 만’라는 뜻이다. 화이트샌드 해변에 도착했을 때 처음 느낀 감상은 영어식의 ‘화이트샌드’보다 이 웨일즈식의 ‘포쓰마우르’에 더 가까웠다.
'웨일즈에서 해수욕을 하기에 좋은 해변'으로 영국 현지인의 추천을 받아 웨일즈 서쪽 끝까지 달려가 만난 화이트샌드 해변은 그 이름처럼 넓고 깨끗한 모래사장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도 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함이 밀려왔다.
이때가 7월 하순, 8월에 떠난 콘월 여행보다 몇 주 앞선 여행이었다. 바다란 언제 보아도 숨이 트이는 법이지만, 이 화이트샌드 해변이 그해 우리의 첫 여름바다였기에 더욱 강렬한 해방감을 만끽했던 것 같다.
화이트샌드 해변을 양쪽에서 감싸는 해안 구릉이 완만했다. 거칠고 극적인 해안 절벽이 많은 콘월의 해안과 다르게 화이트샌드 해변이 있는 웨일즈 서쪽 해안은 부드럽고 완만한 지형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매력이라고 한다.
해변에 해수욕을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여유 있는 느낌을 주는 해변 풍경에 ‘힐링’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갑자기 떠나와 마주한 만족스러운 풍경이 더욱 머릿속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 미리 잡은 여행 계획은 너무 많은 사전 준비로 이미 계획을 하면서 지치고, 또 사람이 너무 많은 휴양지는 그 장소가 아무리 근사해도 편히 쉬기 힘들다. 화이트샌드 해변에 선 지금 이 순간이 일상에 지친 사람에게 필요한 진짜 휴가인 듯했다.
넓은 모래사장 너머 온화한 느낌의 너른 바다가 은빛 윤슬을 반짝이며 출렁거렸다. ‘엄마의 품’ 같은 바다. ‘엄마’라는 단어에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적어도 내가 안기었던 ‘엄마의 품’을 바다를 빌어 표현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품어줄 것 같은 바다를 향해 뛰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모래사장으로 다시 튀어나왔다. 물이 너무 차가웠다.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국에 온 첫해에 간 화이트샌드뱅크스 바다에서도, 여기보다 몇 주 뒤에 찾은 콘월의 바다에서도 이미 수차례 말한 바 있지만, 영국의 바다는 내가 안길 수 있는 바다가 아니었다.
바다와 모래사장 사이, 바닷물이 얕게 깔리는 지점에 다리를 뻗고 앉아 웨일즈의 바다를 즐겼다. 다리와 엉덩이 아래로 부드럽게 밀려와 찰랑이는 파도에 한여름의 열기가 식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청량함을 맛보지는 못했지만, 뜨겁고, 시원하고, 한가로운, 딱 좋은 여름바다였다.
자연이 만든 바다의 문, 처치 도어 코브(Church Doors Cove)
웨일즈의 바다에서 ‘진짜 휴식’을 취한 뒤에는 웨일즈의 해안 언덕 지형이 선사할 힐링을 경험하기 위해 ‘처치 도어 코브(Church Doors Cove)’로 갔다. 이곳 또한 화이트샌드 해변을 추천한 지인이 알려준 ‘웨일즈의 근사한 자연 경관’이다.
웨일즈 남서부 펨브룩셔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긴 하이킹 코스인 ‘펨브룩셔 코스트 패스(Pembrokeshire Coastal Path)’의 일부 구간에 위치한 ‘처치 도어 코브’는 해안 절벽에 자연이 만든 거대한 '문(Doors)’ 모양의 자연 아치가 있는 자갈 해변이다.
바닷가 해안 절벽에 있지만 ‘바다의 문’이 아니라 ‘교회의 문’인 ‘처치 도어(Church Doors)’는 뾰족하게 올라간 아치형 천장과 좁고 높은 입구가 중세 유럽 교회의 문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이름 때문인지 어딘가 성스러워 보이는 ‘처치 도어’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해변으로 내려갔다. 신성한 문으로 가는 길은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가파른 계단과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걸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 길을 무사히 지났음에도 문 아래에서 철썩이는 바닷물 때문에 신성한 자연의 거대한 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처치 도어(Church Doors)’의 바닥이 완전히 드러나 문을 통과해서 지날 수 있는 시간은 썰물 중에서도 가장 썰물인 1~2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우리가 해변을 찾았을 때가 썰물 시간이라 해변으로 내려가 걸어보기라도 한 것이고, 밀물 때는 이 처치 도어 코브(해변) 자체가 완전히 바다에 잠겨 문의 위쪽 부분만 멀리 해안 언덕 위 산책로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
이렇게 한정된 시간에만 접할 수 있는 지형이기에 특별한 자연 경관을 애써 찾아 즐기는 하이커들에게 인기가 많은 ‘처치 도어 코브’는, 반대로 매력을 즐기기가 쉽지 않기에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장소는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거의 없던 처치 도어 코브에서 우리는 화이트샌드 해변에서와 마찬가지로 한산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처치 도어 코브를 찾아왔지만, 내 취향은 코브 양 옆으로 쭉 이어진 해안 언덕들. 화이트샌드 해변에서는 양쪽에서 바다를 편안하게 품어주던 해안 언덕이 이곳 ‘펨브룩셔 코스트 패스’ 위에서는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웨일즈 남부 해안을 따라 바다와 맞닿아 있는 이 해안 언덕은 정확히는 해안 절벽이겠으나 부드럽고 완만한 절벽의 실루엣이 언덕 혹은 능선을 연상시켰다.
‘펨브룩셔 코스트 패스’의 키가 큰 풀들 사이로 난 산책길을 따라 몇 걸음 걸었다. 여름이지만 우리나라의 습한 공기와 달리 까슬까슬한 바람이 불었다.
자연과 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이런 길을 배낭 하나 메고 이대로 쭉 걷는다면 수시로 떠올라 마음을 흩트리는 상념들을 나도 정리할 수 있을까? 육체적인 활동을 싫어해 ‘제주 올레길’도 ‘서울 둘레길’도 걸어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완주하려면 2~3주가 걸린다는 ‘펨브룩셔 코스트 패스’를 걷고 걷는 하이커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영국 웨일즈 남부 펨브룩셔 ①
웨일즈(Wales)의 자연이 전하는 진짜 힐링 _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