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진심

양말의 계절, 타인의 취향 그리고 존중

by 노현지


남편은 양말에 진심이었다.
지나가다 양말 매장이 보이면 한번은 멈춰섰다.
정말 양말이 필요할 때면 마트 양말 코너를 최소 3회 이상 돌며 이 양말을 만졌다, 저 양말을 만졌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팔짱을 꼈다가 다시 한 손을 올려 턱에 괴는 등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 버금가는 고심의 제스춰를 취했다.

그 끝에 골라온 양말들은 죄다 남색, 검정, 회색에 줄무늬 혹은 작은 도트. 패션으로 주목 받을 욕망도, 또 그런 안목도 없는 남자였기에 남편의 주요 검토 사항은 양말의 두께, 촉감, 신축성 등이었다. 고심 끝에 고른 양말을 처음 신고 하루를 보낸 뒤 눈과 손으로 미처 파악하지 못한 단점을 발견할 때는 올림픽에서 간발의 차이로 금메달을 놓친 것 마냥 아쉬워했다. 그리고 다시 양말 매장을 기웃거렸다.

반면, 구두와 샌들을 주로 신어 양말을 신을 일이 별로 없는 내게 양말은 그냥 누가 준 것, 서랍 안에 있는 것을 신는 것이었다. 결혼 후, 늘 거기서 거기인 양말들을 사기 위해
진심을 다하는 남편이 처음엔 귀여웠다가 수시로 장바구니에 담기는 양말에 당황했다가(신기하게도 남편 양말은 해지기도 잘 해진다!, 장보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잡아 먹는 것이 점점 답답해져 남편이 양말을 고르러 가면 돌아서서 한숨을 쉬곤했다.

그런 내게 변화가 생겼다. 몇년전부터 여름의 습기를 가을바람이 말리기 시작할 때면 집안을 걷는 데도 발바닥이 시리고 아팠다. 발뒷꿈치는 까끌까끌 각질이 일어나 거칠어졌다. 양말을 꺼내 신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신다보니 양말에 대한 관여도가 높아졌다. 발을 너무 조이지 않으면 좋겠고, 조금 더 도톰하면 좋겠고, 봉제선 마감이 투박하게 튀어나오지 않으면 좋겠다. 자주 신다 보니 그런 양말이 의외로 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거기에 남편보다 한 술 더 떠서 주로 집안에서 신는 것이라 해도 이왕 신는 양말이 내 취향에 꼭 맞게 예뻤으면 좋겠다.
마트의 양말들은 성에 안 차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핸드폰에 고개를 박고 십여 페이지 넘게 검색을 하다 깨달았다. 내 발이 불편해지고 나서야 이해되는 남편의 마음.

남편은 발이 불편한 것을 참지 못했다. 오래전 둘이 떠난 유럽 여행에서 딱 한번 싸웠던 때가 남편이 불편함이 감지된 신발을 신고 파리 시내를 횡단할 때였다. 남편이 발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예민함도, 그래서 남편이 양말 고르는 데 쏟는 정성도 나의 이해와 공감 안에 들어 와 있지 않았다. 남편의 입장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마음대로 판단해서 '유난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가끔은 놀리고, 때론 면박까지 준 지난 날이 미안했다.
사람은 역시 겪어봐야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법.
하지만 세상 모든 상황을 직접 겪어 낼 순 없으니 앞으로 잘모르는 타인의 입장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섯부른 판단이 아닌 인정과 수용뿐인 듯 하다.

얼마 전 겨울을 맞아 인터넷으로 산 울 양말이 도착했다. 블루 컬러가 예쁘지만 너무 까끌거려 신을 수가 없다. 실패다. 이번엔 조금 비싸더라도 양질의 양말을 사리라
다짐하는 내게서 얌체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간 내가 남편에게 던진 가자미 눈과 한숨이 내 뒤통수에 줄줄이 엮여 있는 기분.

"여봉봉, 그동안 미안했어.
이제 양말 맘껏 사~ 나도 그럴께!"

매거진의 이전글라 비앙 로즈(La Vie en R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