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더'의 기적
[그림단상] 흰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이것은 좀 긴 이야기다.
올 겨울, 꽤 많은 첫눈이 왔다.
눈뭉치를 굴려 눈사람 하나를 만들고 뿌듯하게 돌아보니 눈썰매를 타고 있는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나게 달리는 눈썰매 위의 아이를 부럽게 바라보는 내 아이들도 눈에 들어왔다. 사실은 내가 더 부러워하고 있었다. 일찍이 본 적 없는, 눈 오는 날을 더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 하지만 눈은 곧 녹았고, 썰매에 대한 나의 감흥도 눈과 함께 사라졌다.
다음 눈은 정말 펑펑 내렸다.
서울에 온 이후 그렇게 내리는 눈은 처음 본 듯 했다. 놀이터에는 눈썰매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이 더 늘었다.
“나도 저거 타 보고 싶다.”
모자 위에 쌓인 눈만큼이나 잔뜩 부러움이 쌓인 아이의 말에 지난 번 첫눈이 온 이후 눈썰매를 미리 사두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폭설에 이은 한파로 눈은 3일이나 놀이터와 길가에 쌓여 있었고, 동네 아이들은 자전거와 킥보드 대신 썰매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 주문을 한다한들 택배는 눈의 소멸과 함께 도착할 것이었기에 나는 또 다시 썰매 사는 것을 미뤘다. 그리고 이쯤 쏟아졌으면 더는 이렇게 큰 눈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또다시 눈이 쏟아졌다. 나 외에 다른 부모들은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는지 전보다 더 많은 눈썰매가 밤도 잊고 아파트 단지 안을 돌아다녔다. 다들 어찌이리도 부지런하고 준비성이 철저하다는 말인가... 나는 왜 그때라고 눈썰매를 주문하지 않았던 것인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표면이 미끈미끈한 시장가방을 가지고 나갔다. 그것으로도 즐거워해주는 아이들이 고마워 더 큰 용기를 냈다. 재활용 수거 날 버리려고 집 앞에 내둔 커다란 종이 박스의 등장. 해가 바뀌어 10살이 된 첫째 아이도 들어갈 정도로 큰 박스였다. 아이들은 그 안에 장난감들을 넣고 함께 썰매를 타기도 하고, 눈을 떠서 박스 안에다 넣으며 놀기도 했다. 우리만의 새로운 놀이의 발견이었지만 사람들이 지나갈 때면 나는 조금 부끄러웠고 이번엔 꼭 썰매를 사리라 다짐했다.
그로부터 일주일도 되지 않아 눈 예보가 떨어졌다. 우리는 대형마트와 스포츠용품 매장이 모두 있는 큰 쇼핑몰로 달려갔다.
아뿔사... 너무 늦었다.
오프라인 매장에는 눈썰매가 모두 품절이었다. 나 외에 모든 사람들은 학습효과가 뛰어나고, 재빠른 듯했다. 원하는 걸 다 가질 순 없고, 계획대로 안 될 때도 있는 거라고 실망한 아이들을 아이스크림으로 달래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그냥, 후회할 때 그때, 바로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으면 됐잖아!!’
속으로 머리를 수십 번은 쥐어 뜯으며 스스로를 나무랐다. 다음 날 눈은 다행히 예상보다 적게 내렸다 일찍 녹았고, 우리는 합심하여 올라프를 만들어 본 것에 만족했다.
그 뒤로 올라가는 기온을 보면서 이제 눈은 끝이겠구나 아쉽게 체념했다. 하지만 눈썰매를 주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다음 겨울 첫눈에는 눈썰매를 탈 수 있겠지. 참 빠르기도 하다.
배송이 시작됐다는 택배는 좀처럼 도착하지 않았다. 코로나 탓에 택배 물량이 많다는 것, 또 열악한 택배 노동자들의 근로환경이 이슈가 된 이후로 너무 빨리 오는 택배에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에 올때가 되면 오겠거니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또 다시 눈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택배는 여전히 배송 시작점에 있었고, 그제야 걸어 본 판매자와의 통화에서 내 썰매가 누락된 것을 알았다.그날 바로 택배 접수 처리를 해 주었지만 눈이 오기 전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앞서의 눈 보다 더 적게 내린 눈 덕분에 눈썰매에 대한 아쉬움은 예상보다 적었다. 정말 올해의 눈은 끝이구나 확신이 들 때쯤 눈썰매가 도착했다.
둘째 아이 키 만한 눈썰매 2개를 어디로 치우지도 않고 현관에 세워놓기를 며칠. 마침내, 우리의 썰매를 위한 눈이 한.번.더. 내렸다. 한밤중에 내린 눈이 썰매를 타기에 충분하게 쌓였다. 기온도 다시 영하로 내려가 눈은 잘 보존되었다.
다만, 잦은 눈의 학습효과는 썰매의 구매 속도 뿐아니라 길 가의 눈을 치우는 속도도 빠르게 했고, 나는 아이가 학교에 간 오전 내내 창문에 붙어서 길 한쪽으로 치워지는 눈을 아련한 눈으로 보았다. 아... 썰매와는 정말 이다지도 인연이 없단 말인가.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 법! 마침 입주를 시작한 길 건너편 아파트는 아직 관리행정이 빠르지 않아 햇살을 받은 눈이 반짝반짝 반짝이며 소복하고 탐스럽게 유지되고 있었다. 드디어 나의 아이들도 눈썰매를 타고 눈 위를 달렸고, 나는 그 썰매를 끄느라 무릎과 허리에 통증을 느끼면서도 매우 즐거웠다.
그날 종종 집안으로 들어와 얼린 몸을 녹여가며 3번이나 밖으로 나가 썰매를 탔다. 재택근무를 하느라 함께 놀지는 못하고 집안을 오가는 나를 바라보던 남편이 말했다.
“그렇게 기다리더니 결국 한 번은 타네.”
정말 그랬다. 올 겨울 썰매는 끝인 줄 알았는데 또 눈이 왔다. 기다림과 간절함에 대한 화답처럼 한 번 더.
어쩌면 인생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끝이라고 생각 했을 때 ‘한 번 더’ 기회가 올지도. 뭐, 물론 끝이라고 생각한 것이 정말 끝일 수도 있고.
그래도 내 인생의 다음 단계가 무엇일 지 알 수 없다면 나는 순진하게 ‘한 번 더’의 편에 줄을 서 봐야겠다.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보다 그렇게 되길 바라는 바람을 담아. 절망의 편에 서기엔 흰 눈 위를 달리는 눈썰매가 너무 즐겁다. 그러다 끝내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아이들도 받아들인 ‘원하는 걸 다 가질 순 없는' 진리를 되뇌이며 민트초코칩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야지. 그리고 다시 ‘한 번 더’의 줄 끝에 발을 디밀어 보리라. 어쨌든 내 인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굴러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눈썰매 첫 시승의 날,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썰매를 타느라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던 내 손에는 만찬을 위한 통닭이 들려있었다. 이 보다 즐거울 수 있을까. '한 번 더’의 기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