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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치 Apr 23. 2020

장소라는 감각

히피하피소셜클럽 일곱번째 글쓰기 

열도가 낮은 일상이 된지 오래 되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차츰 차츰 그렇게 되었다. 항상 일정 수준의 불같은 열선이 깔려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람 빠진 풍선도 나보다 기력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될 정도로. 오랫동안 음악이나 향기, 장소가 기억을 환기하는 데 가장 주효한 것들이라고 생각해왔고 그것들을 매개로 복기해내는 것이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치만 지금의 나는, 어떤 것을 복기해내는 즐거움도, 단순한 것들이 주는 기쁨도 떠올리기 힘들다. 버티기 힘들어서 단순해졌는데, 단순해지는 것도 못견디는 날들. 



작년 10월에 회사 근거리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나는 무척 달떠있었다. 머리 속으로 면접이 어떻게 돌아갈지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했다. 잘 된다면, 내가 다닐 회사가 될 그곳에 대해서 끊임없이 검색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혼자 종종거리면서 앞으로 더 나아질 날들을 생각했다. 집중이 안될 땐 바로 앞에 나가서 담배를 피면서 긴장되어 저릿해진 손을 주물거리면서 혼자 마음을 다잡았다. 그곳에서 딱 두번의 시간들을 견디니까 나는 새로운 사원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것이 내 마음의 평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그런 식으로 쥐어질 때만은 근거 없는 희망이 마음을 채운다. 


그리고 요즈음 그 스타벅스는 아침마다 마음을 다 잡는 장소로 바뀌었다. 오늘 하루도 어떻게든 지나갈 거라고 나에게 되새김질하는 장소로. 몇달 전 혼자서 손을 주물거렸던 그 곳에서 지금의 나는 아주 잠깐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 앉은 자리는 그 전과 같지만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들을 길고 길게 적어내리는 곳이 되었다. 하루는 어김없이 갈 것이고 나는 내일 아침에 이 곳에서 또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있겠지만, 그래도 손에 잡히는 잠깐의 시간을 하루에 잠시라도 두는 것은 일상을 버틸만 하게 해준다. 딱 버틸만하게만 해준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같은 장소가 다르게 기억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조금은 나아질 일상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억했던 장소가, 그게 현실이 되었음에도 예상치 못하게도 하루 치의 지옥을 견디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 



무작정 행복을 기다리는 일의 허망함에 대해서 생각한다. 허망함을 공중에 흩뿌리고 싶어서 다시 생각한다. 단순하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인생에 많은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그냥 모르는 채 지나갔을 역삼동의 어떤 스타벅스에 대해서 세세하게 감정의 결을 나누어 가며 기억하지 않았을 것에 대하여.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조금은 힘이 날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생각하고 있다. 오늘의 걱정을 오늘에만 쏟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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