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치 Apr 23. 2020

이름에 대하여  

히피하피소셜클럽 네번째 글쓰기 


오래도록 물어왔다. 어렸을 때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이따금씩 생각날 때마다 자주 물어봤다. “엄마, 아빠, 나는 왜 슬기야? 이름을 어떻게 짓게 되었어? 이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이 될 뻔하지는 않았어?” 어린 시절에는 사실 누구나 이름으로 놀림 받은 기억이 있지만 나는 나로만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는 가늠할 수 없었고, ‘왜 나만 늘 친구들이 다슬기, 슬기로운 생활, 이슬뽕 등등으로 부르면서 놀리는걸까.. ‘하며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내 이름을 사랑하게 될 뭔가.. 로맨틱하거나 어떤 거창한 기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납득하여 조금 이름을 사랑할만한 계기를 찾았던 것 같다. “슬기롭게 자랐으면 해서 그렇게 지었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가 한글 이름이잖아!” 그건 조금 마음에 들었다. “슬기 말고는 유리라고 지을까 했어” “왜 그렇게 안지었어” “유리는 깨지니까, 그런 이름은 짓고 싶지 않았어” 음.. 어쩐지 마음에 드는 스토리 하나 나왔다. 그래도 충분치 않았다. 대체 어떤 기원을 들어야 만족할 성 있겠냐만은, 오래도록 슬기라는 이름을 싫어했던 것 같다. 

나에겐 몇 번의 변곡점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언젠가부턴가 ‘나’에 대한 집착이랄까, 자의식같은 것들이 옅어지게 되는 몇번의 계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부터는 이름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적어졌다. (싫다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 그래서 몇번이나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던- 이름을 주제로 한 이 글이 유난히 쓰기 어려웠다. 


변곡점에 대해 되짚어보면, ‘왜 나만’이라는 강박에서 천천히 벗어나게 된 까닭인 것 같다. 가스라이팅으로 얼룩졌던 연애들도, 어지러운 가족의 일도, 유난히 힘들었던 취업과 이직 경험들도, 몇 번을 오래도록 속앓이했던 친구들과의 관계같은 것을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졌달까. 물론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꼭 나에게만 일어나는, 나여서 일어나야만 했던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그 오래 된 강박에서 벗어난 나의 나름의 성장이 만족스럽고 그 길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은 길을 걸으면 그것만으로 좋을 것 같다. 그것이 앞으로의 불행들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게 하지는 않겠지만, 그 정도로 충분하다. ‘이름’에 대한 호오가 없어진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멀리 와버렸다. 



다시 이름으로 돌아가서, 내가 다정하게 부르는 이름들을 생각한다. 물론 나는 나를 부르는 나의 이름을 많이 듣곤 하지만 요즘은 내가 부르게 되는 이름들을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 사랑하는 동물들의 이름. 그리고 그 이름이 상징하는 많은 것들이 더 일상을 많이 채웠으면 좋겠다. 그것들을 호명하는 순간의 감정만으로 살 수 있게 되면 좋겠지만,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 괜찮았으면 좋겠다

사진들은 뜬금없는 2020년의 치앙마이


작가의 이전글 나의 북유럽 여행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