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둠 속 작은 불빛에 의존해 나지막이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꼬리 칸에 가본 적 있어?
You've ever been to the tail section?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기나 해? 우리가 탑승했을 때?
Do you have any idea what went on back there? When we boarded?
엔진 칸의 문 앞에서 남궁민수가 건낸 '인류 마지막 담배'를 받아 문 커티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을 때,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을 몇 번이고 다시 보아왔던 이 '봉빠'의 뇌리에 몇몇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아, 이 아저씨가 이번 영화에도 '썰' 푸는 장면을 (심지어 영어로) 넣었구나...
이른바 이 '썰 신(scene)'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면 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파트 지하실에서 몰래 영양 보충을 하려던 경비원 앞에 웬 방해꾼이 나타난다. 급한 마음에 경비원이 떠올린 방책은 아파트 단지에 떠도는 지하실 괴담으로 그를 내쫓는 것이다.
근디 말이여, 가만히 쪼까 들어봐요...
지하실 전체에서 이이잉 이이잉 대는 소리 같은 게 안들리는감유?
주임님은 혹시, 보일러 김씨라고 아시는교?
11년 전 요 아파트 지을 당시 얘긴디요...
괴담, 소문, 과거... 썰은 주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실체가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이후의 영화 전개에서 조용한 힘을 발휘한다. 살인의 추억(2003)에서 서태윤 형사를 비롯한 경찰들이 잠복하고 있던 초소에 비를 피해 뛰어들어 온 여중생들. 그녀들이 대뜸 꺼낸 학교의 변소 괴담은 사건 수사를 새 국면으로 이끈다. 마더(2009)에서 도준의 친구 진태가 혜자에게 들려준 동네의 뜬 소문은 다시 한 번 그녀를 추동하는 계기가 된다.
맞어, 아저씨 그거 알아요?
범인 어디 사는지!
이거 진짠데요. 우리 학교요, 안성여중이요.
거기 뒤에 오래된 변소 있거든요.
그 변소 밑에 미친 남자가 숨어 사는데...
어머니, 그거 알아?
그 죽은 애 말이야, 문아정이.
걔에 대해서 좀 아나?
사실 걔에 대해서 소문이 조금 있었어,
옛날부터.
물론 죽은 애한테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봉준호 감독의 작품에서 썰 신의 존재를 처음 의식하게 된 건 괴물(2006)에서였다. 물론 썰을 푸는 화자가 플란다스의 개에서 경비원 역을 맡았던 변희봉 배우로 겹친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긴 했겠지만, 이 기시감이 꼭 영화로부터만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나지막이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는 상대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 경험은 많은 이들에게 익숙할 터. 더구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라면 그 분위기는 배가되기 마련이다.
얘들아 잠깐, 앉아. 하아...
니들 보기엔 강두 얘가 그렇게 한심빠따냐?
니들은 잘 모르겠지만 강두 얘가 어릴 적에 무지 똑똑했시야.
예를 들면 두 살 때인가...
사실 괴물에서 아버지 희봉의 썰을 듣던 남일과 남주는 꾸벅꾸벅 졸다 금세 잠이 들고(강두는 진작부터 자고 있었다) 결국 그 이야기에 끝까지 집중하는 청자는 없다. 하지만 꼭 극중에서의 누군가가 그 썰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진짜 이 이야기를 숨 죽여 들어줬으면 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관객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썰 신의 정서는 봉준호의 영화들을 일관되게 관통해 온 토속성과도 이어진다. 그의 첫 글로벌 프로젝트인 설국열차(2013)에서 장장 5분이 넘게 이어지는 커티스의 영어 썰 신이 유난히 이질적으로 느껴진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개인적으로는 그래서 더 인상적이기도 했다).
얘기 잘 들었다, 커티스.
근데 문은 못 열겠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 줄 알어?
문을 여는 거야, 이런 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에서 썰 신의 위치는 시간 상 점점 영화 후반부로, 그에 따라 썰이 갖는 영향력의 무게도 점점 더해져 왔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이 썰 신이 이야기꾼 봉준호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집약시켜 놓은 장면이 아닐까 하고 감히 생각해본다. 결국 과감하게 금기의 '문'을 열어 젖힌 설국열차 이후 그의 영화들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이 봉빠는 또 그의 썰을 숨 죽여 기다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