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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Yi Sep 22. 2015

그 장면, 산낙지와 함께 토해낸 것

옥희의 영화 _ 홍상수, 2010


폭설 후, 계절학기 강의 때문에 학교에 나온 송교수는 유일하게 출석한 두 명의 수강생과 수업 대신 삶에 대한 철학적인 문답을 주고받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식사를 마치고 낙지 집에서 나온 그는 눈 쌓인 길가에 무언가를 토해낸다. 그가 걸어 나간 자리에는 산낙지 한 마리가 꿈틀대고 있다.


그만두길 잘했어.
이게 맞는 거야, 나는 자격 없어.


송교수가 '그만두길 잘했다'고 되뇐 일은 텅 빈 강의실에서 때려치워야겠다고 다짐했던 시간강사 일일 수도, 또는 옥희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그녀와의 관계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었든 간에 술에 취해 무언가를 게워내고 속 시원해하는 이미지는 다분히 상투적이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상투를 거부했던 학생들과의 문답 장면에 바로 이어진다는 점은 그 상투성을 배가시킨다. 두 장면의 지극히 인위적인 '이어붙임'은 영화 초반부의 한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인위적인 걸 통하지 않고는 네 진심이 안 통해. 인위를 통해가지고 네 진심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 컷에 지극히 인위적으로 자리한 산낙지라는 토사물.



여기서 산낙지는 마치 상투의 상징과도 같이 느껴지는데, 이 토해내진 '상투'는 영화 밖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홍상수 감독은 일찍이부터 영화의 구조, 전개, 촬영 등의 작법과 관련하여 일반적인 영화들이 따르고 있는 '틀'이 학습된 것일 뿐이라는 견해를 밝혀온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옥희의 영화를 시발점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그 틀의 해체를 시도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의 구토는 더욱 적극적으로 상투를 거부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왜 하필 산낙지였을까. 이 무용한 질문에 대해 홍상수 감독은 아마 '그냥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고 무심하게 답하겠지만, 그의 전작 해변의 여인의 한 대목에서 조금의 힌트는 찾아볼 수 있을 것도 같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버지'라고 대답한 문숙은 뒤이어 "산낙지 같아요. 날 뒤에서 온몸을 꽉 잡고 쥐어짜고 놔주질 않으니깐... 징그러워."라고 덧붙인다. 당시에도 충분히 자유로운 창작 스타일로 주목 받던 홍상수 감독이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착 달라붙어 옥죄고 있던 어떠한 제약과 같은 틀은 있었을 것이다. 옥희의 영화에서 그는 그 '징그러운' 것을 게워내버리고 새로운 경지에 다다른다. 아니, 지금도 구토는 진행중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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