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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Yi Mar 28. 2017

그 대사, "유머 감각 없기는."

<토니 에드만> _ 마렌 아데, 2016


우스꽝스러운 분장으로 말도 안 되는 역할놀이를 하며 직장까지 찾아온 아버지 빈프리드의 끝 모를 장난에 이네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사실 이네스의 주변엔 이미 시답잖은 농담을 우스갯소리라고 던지는 남성들로 가득하다. 방금 전까지도 그는 직장 상사로부터 성적 매력을 업무와 연결 짓는 농 섞인 제안을 들어야 했다. 거기엔 그의 "페미니스트적인 면을 건드릴 수도 있겠지만"이라는 비꼬는 듯한 단서까지 붙어 있었다. 이러한 무례에 곧바로 "내가 진짜 페미니스트였으면 당신을 참고 이 회사를 다닐 수 있겠어요?" 하고 쓴소리로 맞받아치는 그가 이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겪어왔을 고충이 어떠했을지는 안 봐도 빤하다. 그런데 뒤이어 데이트를 위해 만난 애인 팀마저도 당신의 독기를 죽이기 위해 섹스를 한다느니 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열이 뻗칠 대로 뻗칠 수밖에. 결국 섹스를 거절하는 이네스의 단호함에 팀이 덧붙인 한 마디 "유머 감각 없기는," 이 한 마디가 어쩌면 결정적으로 이네스의 발동을 걸리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안달하는 팀에게 갑자기 기상천외한 장난을 제안하고, 그 결과물인 케이크를 베어 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진짜 유머 감각 있는 게 뭔지 지금부터 보여주겠다는 듯이.



이네스는 곧바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토니 에드만'의 명함에 적힌 연락처를 알려 주고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장난에 응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그렇게 궁금해하시던 딸의 '진짜' 삶이 어떠한지를 직접 보여주겠다는 거다. 그녀의 친구가 주최한 행사에 갑자기 초청되어 온 빈프리드, 아니 토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네스에게 묻는다. "여기서 제가 할 일이 있나요?" 있다. 그가 할 일은 이제 이네스가 현재 데이트 중인 남자와 인사하고, 이네스가 평소에 친구들과 어떤 식으로 유흥을 즐기는지, 그리고 적나라한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이네스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빈프리드가 가장하고 있는 '토니'는 더 이상 이네스의 아버지가 아니기에 그녀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참견할 명분이 없다. 이네스는 당당하게 그의 앞에서 마약을 하는 모습까지 전시해버리지만 이러한 맞대응이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컴컴하고 시끄러운 클럽에서 그녀의 친구들과 억지로 어울리고 있는 토니, 아니 빈프리드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네스는 흐르는 눈물을 참기가 어렵다. 



이렇게 영화 <토니 에드만>에서 부녀가 주고받는 장난과 도발의 줄타기는 서로에게 크고 작은 생채기를 입힌다. 토니의 장난은 계속 어긋난 타이밍에 도착하여 한없이 어색한 순간을 만든다. 그가 리셉션 만찬에서 만난 이네스의 고객사 CEO에게 웃자고 건넨 농담은 하필, 자신에게 무심한 딸을 '외주'로 돌려야겠다는 것이다. 이네스가 지금 외주로 돌릴 규모와 그 책임 문제 때문에 회사와 치열하게 협상 중이었다는 걸 '아웃 소싱'이란 단어의 뜻도 모르던 그가 알았을 리는 만무하다. 이네스와 친구들의 약속 장소에 리무진까지 준비해 깜짝 등장하려던 계획은 이네스가 약속 시간에 한참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우스꽝스럽고 어색한 만남이 되어버린다. 아버지 앞에서 범법까지 저지른 딸을 장난스레 질책하기 위해 채운 수갑의 열쇠는 하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지어 그가 시추 현장 노동자에게 무심코 건넨 농담은 그 노동자를 해고 위기로까지 몰고 간다. 이렇듯 이 영화 속 '유머 감각'은 통속적인 가족극에서와 같은 따뜻한 화해를 의도하는 장치로 쓰이지 않는다. 아니 그러긴커녕 웃음과 유머로도 좁힐 수 없는 둘 사이의 또는 두 세대 간의 거리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



어긋난 유머의 타이밍은 결국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이네스의 생일 파티 장면에까지 이어진다. 바로 전날 이네스에게 긴 장난의 마무리와 같은 공연을 제안하며 "이걸로 그만 끝내자"고 말했던 빈프리드지만, 처음 부쿠레슈티행을 결정했을 때부터 가장 염두에 두고 있었을 딸의 생일 축하 자리에는 반드시 참석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상적인 장난을 할 때엔 자신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분장은 하지 않았었지만, 사소한 분장을 하고 나타나 딸에게 폐만 끼쳐왔던 그는 이번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가린 '쿠케리' 탈을 쓰고 나타난다. 그런데 그가 파티장에 도착해 목격하게 되는 것은 이네스가 한 발 앞서 벌이고 있는 훨씬 더 거대한 장난의 현장이다. 이렇게 끝까지 유머의 박자를 맞추지 못한 두 사람, 온몸을 완벽하게 무장한 아버지와 평소의 무장을 벗어던진 나체의 딸은 마침내 서로를 끌어안는다. 이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포옹은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였다는 식의 화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가 얼마나 다른지, 그 고유한 차이를 받아들이겠다는 포용의 포옹으로 보인다. 내내 우스갯소리로 가득하던 영화가 도달한 이 유머기 없는 장면은 영화라는 매체가 그 섬세한 결로 전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감정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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